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345화 (324/379)

345화. 그리움 (3)

쏴아아악. 철썩!

“으읍! 으푸푸푸!”

싸늘하고 차가운 것이 얼굴을 뒤덮는다. 두진(斗震)은 허우적거리며 눈을 떴다.

콜록콜록! 쿨럭!

사레들린 기침을 한참 내뱉고 나자, 뭔가 묵직하면서도 송곳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잘 잤으면 일어나지. 명색이 장사하는 곳인데, 어여 정리해야 할 것 아니여?”

“…….”

또르륵.

두진의 눈동자가 주변을 굴렀다.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꽁꽁 묶인 두 팔.

내가 왜 이렇게 되어 있지? 하고 고민해도 상황 파악이 안 되어 몇 번 눈을 껌뻑였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실감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보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얼굴과 복부에 느껴지는 묵직한 고통이 자신을 반겼다.

“으브브. 으으으으…….”

다음으로 입안에 느껴지는 거북함. 재갈이었다.

“아, 그래. 입에 힘 풀어.”

툭. 우지직! 쓰윽.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온 입안을 쥐어뜯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흐억. 헉. 어억…….”

툭. 투둑. 주르륵.

아득해지는 정신 줄을 부여잡고, 그는 주변을 돌아본 후.

‘시발. 뒈졌다…….’

무표정한 얼굴의 남녀 다섯. 하나같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얼음장 같은 시선에,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오는 기억. 기절하기 전에 겪었던.

질풍처럼 처맞던 순간의 매타작.

‘썩을, 몸 좀 사릴걸.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넜어야 했는데…….’

두진은 뒤늦게 후회했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방비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디서 족보 없이 돈놀이를 하는, 예의 없는 신출내기들이 나왔다고 말을 들었을 때.

혹시 우리가 모르는 족보 있는 놈들은 아닌지.

세상일 손 놓은 은거고수의 가업이 아닌지.

자신들이 모르는 거물이 근처에 둥치를 튼 것이 아닌지 의심했어야 했었다.

늦어도 눈앞에서 앞세운 놈의 모가지가 뺑그르르 날아오른 순간, 바로 눈치를 채고 납작 엎드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눈탱이가 팅팅 부은 정도에서 끝났을 것이다.

혹여? 설마? 하고 괜히 상대의 능력을 모르고 덤비다가 아까운 이빨 서너 개만 날리지 않았는가.

“흐음.”

툭. 털썩.

두진의 앞에 무심한 표정의 사내 하나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분위기로나 주변 시선으로나, 두진은 상대가 이 중에서 대장이라는 걸 알았다.

‘엄청난 고수일 거야.’

감히 반감이 있을, 깜냥도 부려서는 안 되는 경이로운 존재라는 직감도.

기억이 어렴풋하긴 하지만, 줘 터지는 순간에 휙휙 하고 손이 보이지도 않던 것이 떠올랐다.

대개가 삼류. 잘나 봐야 이류인 이 바닥에서, 그렇게 싸움을 잘하는 이가 있을 리 없다.

즉, 상대는 진짜 고수. 강호에서 한가락 하는 양반이다.

그런 분이 왜 이런 촌구석까지 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너 어디냐?”

“……예?”

설휘가 반쯤 앉은 채로 두진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어디 식구냐고.”

“…….”

고저가 없는 냉담한 목소리.

얼음처럼 싸늘한 눈빛에 두진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냥 사파의 사람이라고 말할까?

하지만 그게 거짓말인 걸 걸리면 어떻게 하지?

머리를 너무 세게 맞아 희미하지만, 약간 기억이 났다. 자신을 보자마자 콕 집어서.

마인이라고 말한 것이.

그래서 우물쭈물, 고민한 끝에 솔직하게 답했다.

“……십가(十家)를 통해 왔습니다.”

“십가? 일제자 쪽 사람이군.”

“……헙!”

바로 즉답하는 말에 두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십가.

일제자 살마를 따르는 무사들로, 인원은 대략 백 명 정도로 이루어진 한 개의 가(家).

그런 곳이 모두 열 개로 이루어진 게 십가이다.

소리 없이 조용히 활동하는, 어찌 보면 핵심요원들.

그렇기에 십가라는 말에 바로 일제자를 거론하는 건, 본교의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추론이다.

아니 본교의 식구라도 직급이 높거나, 해당 업무로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다.

‘대체 누구지?’

데굴데굴.

열심히 눈을 굴리는 두진을 앞에 두고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자 마후에게 혈사단이 있다면, 일제자에겐 십가가 있었지. 어떻게 몰리자마자 바로 중원 장악에 나섰나 했더니, 미리부터 힘을 썼던 것이었구나…….’

이미 아득한 기억이 되어버린, 사제자 휘하에서 전력을 다할 때가 기억났다.

뭐. 지금 와서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만.

설휘는 여전히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두진을 보고, 애매하게 말을 찍었다.

“그럼 어디까지 넘어왔어?”

“어, 어디까지라 하시면?”

“살마 님께서 사람들을 풀었을 것 아니냐. 권역이 어디까지냐고. 충돌하고 싶지 않으니까.”

“아.”

두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미 본교 쪽 사람인 게 확실해졌으니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충돌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말을 꺼낼 정도면…….

“……다른 지방은 모르겠지만, 이 근방이라면 사천의 성도 중심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사천? 이쪽은 아직 없고?”

“예. 우선은 아마 큰 지역부터 장악하고, 그다음 중소 문파가 있는 쪽을 차근차근 포섭할 계획인 듯합니다. 저 같은 말단은 사전에 먼저 보내 동향 파악을 우선으로 합니다.”

“하긴, 그게 수순이겠지.”

설휘는 잠깐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시간상 지금쯤 일제자의 휘하가 서서히 퍼져 나갈 때다.

중원 도처에 마인들이 출몰하고, 그걸 막아서는 화산파. 그들의 명성이 올라가긴 시기가 아닌가.

그 상황을 주도적으로 움직인 것이 바로 십가였다는 것은 지금 처음 알았지만.

“대장. 어떻게 할까요?”

의중을 묻는 수하의 말에 설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녀석을 바라보고는 한마디 툭 던졌다.

“반간계를 써 보자.”

“예?”

반간계. 간첩을 포섭하여 역으로 써먹는 술책.

그 말에 음무기가 생각이 다른 듯이 되물었다.

“그냥 죽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이에 적송도 화답했다.

반간계는 간첩을 회유하여 역정보를 흘리거나, 적 조직을 내부에서부터 분열시키는 술책. 성공하면 최대의 효과를 거두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보통 한 번 배신한 자는 두 번 배신할 수 있는 법입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저도요.”

한쪽에 물러서 있던 소령도 화답했고, 그러자 두진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앞서 동실동실 떠오른 앞잡이 놈의 머리가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는데, 어째 삽시간에 자신의 처형 장소로 바뀐 것이다.

“음.”

설휘는 잠깐 고민하듯 턱을 괴었다. 그러고선 어느새 의자에 앉아 지켜보던 용진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는 대장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어, 왜?”

음무기가 반사적으로 묻자 그는 담담히 말했다.

“본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거든.”

“…….”

***

새로운 삶의 정착은 이렇게 시작했다.

귀주 성도에 제법 떨어진 마을에서 밭과 논을 사들였고, 수하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집들도 샀다.

편안한 잠, 균형 있는 식사, 오붓한 저녁에 마시는 차 한 잔.

사채업은 명목상의 가게였고, 사실은 돈을 모으는 것이 표면적으로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두진을 받아들이는 건, 용진의 말처럼 등잔 밑이 어둡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차피 곧 중원은 마교와 화산 무리들로 혼란에 빠진다.

그들을 피해서 안전하게 살 수 없다면, 오히려 대놓고 평범한 사람들인 척, 그들과 함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고리대금을 하고 있기에 무력을 동반한 영업이 될 수 있었고, 큰돈이 오가는 사업이기에 숨겨온 자금을 풀어내기에도 좋았다.

물론, 조직의 모습을 겉으로는 정상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조금 귀찮긴 하겠지만.

때문에 두진의 가치가 더해졌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움직이는 현업 사채꾼 아닌가?

충분히 겁을 주어 이쪽으로 전향시키면, 위장 활동하기에도 좋고, 더욱이 사채꾼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별도의 정보망도 매력적이다.

마교와 정파. 양쪽을 모두 경계해야 하는 이들 입장에선, 구할 수 있는 정보통은 오로지 하오문뿐. 그렇게 정보를 한쪽에 치우쳐서 구하는 건 위험하다.

이동이나 주둔지가 매우 제약적이기 때문일 터였다.

덕분에 두진은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다.

적당히 겁을 주어 을러댄 후, 따로 무공을 알려 주겠다고 했더니, 놈은 눈물을 흘려가며 충성을 맹세해 버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휘익. 휙.

화창한 날. 적송은 마당에 서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조장 몇몇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설휘는 그의 앞에 서서 그의 자세를 지도하는 중이었다.

“다시.”

적송이 호흡을 고른 후 자세를 다시 잡았고, 이내 첫 초식을 펼쳐 보였다.

그가 펼치는 무공은 태극삼신정(太極三身正).

본래 무당파의 무공이 아닌, 설휘가 개량한 무공이다. 태극의 묘리 위에 손과 몸. 그리고 발의 조화를 이용해 만든 것이다.

“다시.”

세 개의 초식이 이어지던 그때 설휘가 움직임을 지적했다.

“흡!”

적송은 또다시 호흡을 골랐고, 자세를 잡았다.

같은 동작을 무려 한 시진이나 해오던 때문인지 팔다리가 간간이 떨리고 있었다.

‘조화롭게만 만들어도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오를 것이다.’

적송은 고수가 되고 싶어 했다. 강한 무공에 대한 열방이 어느 조장보다 강했다.

과거라면 더 상승의 마공. 폭발적인 힘을 가진 무공을 주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설휘가 보기에 무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화였다.

체력과 내공. 그리고 깨달음.

이 세 가지의 조화가 우선이었다.

앞서 나가는 것이 있다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모일 것이다. 그리되면 그것만으로도 한 단계 혹은 두 단계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조화. 그것이 모든 것의 중심이지.’

극마든 탈마든.

설휘는 느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행해져야 한다. 자연의 조화. 기의 조화가 일어나야 한다.

초식이란 그로 가는 길을 만드는 작업이다.

어떤 식으로 가더라도 마지막 목표점에만 오른다면. 자신이 지나갔던 길은 모두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좀 더 정진하도록.”

설휘는 그렇게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뒤이어 수련 소리가 울려 퍼지고,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아마도 수련을 방해하는 조장들이 저마다 한마디 하는 것일 터.

익숙하지만, 그리웠던 광경이라 그런지 설휘의 표정도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

설휘는 지붕에 올라 생각했다.

이번 생은 조장들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주기로.

사실 고리대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수하들의 여유자금 때문이다.

음무기의 바람처럼 큰돈을 안겨다 주고, 말 그대로 이곳을 떠나며 즐겁게 살기를 바랐다.

요림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곳을 떠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한곳에 얽매여 있기엔 그의 삶이 너무 단조로울 테니까.

적송은 무공 실력을 올려주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그런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본인의 능력을 올리는 것이 삶의 최우선이라는 것에 의심하지 않았다.

용진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 물어봤더니, 함께 있고 싶다고 했다.

딱히 갈 곳이 없는 게 이유라나.

“어찌 살아야 하나…….”

수하들의 삶. 그들의 꿈을 이룬 다음,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붉은 노을을 보던 설휘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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