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1)
설휘는 앞으로 계속 이어질 삶들을 생각해 보았다.
한때 제일의 목적이던 천미려. 그녀를 찾아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아니, 사실상 불가능했다.
수백 번의 죽음과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그는 천천히 지쳐갔다.
그리고 이제 납득하기에 이르렀다.
천미려의 스승, 신선이라는 자가 왜 그리 어렵다고 했는지,
그걸 몸으로 이해하기까지, 또 인정하기까지 꽤 많은 목숨이 필요했다.
수백 번의 시도와 좌절. 반복되는 피로와 허망함에 지쳐, 그는 조금 다른 곳에 눈을 두어 보았다.
그게 바로 지금의 삶.
예전에 못다 했던 수하들의 꿈을 이뤄주는 것.
직접 해보니 생각 외로 푸근하고 정겨운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다만 이다음은?
“…….”
갑자기 문득, 다시금 허망함이 밀려들었다.
천미려를 끝내 찾을 수 없다면, 그렇게 만든 절대자와의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무슨 수로?
수백 번의 삶이 지났지만, 그날의 싸움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까마득한 격차. 자연의 힘. 그걸 넘어서는 존재라니.
‘막막하구나.’
생각하면 할수록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끝을 알 수 없는 동굴에 들어선 것 같은 아득함이 설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차라리 절대자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면, 어떻게든 전의를 불태울 수 있었을 것이다.
탈마의 정점. 그리고 그걸 넘어서는 마신의 경지.
꿈같은 일이다.
남은 목숨을 전부 수련과 싸움에 매진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일 푼이나 될까.
‘AI가 말한 게 이런 것이었나.’
사유강이 스쳐 가듯 했던 말. 목숨이 많이 생겼을 때 마주치게 될 문제라고 했던 것.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감정의 마모.
더는 얻을 기연도 보이지 않고, 성공의 가능성도 희박하다.
앞으로 5백 번, 아니 5천 번의 삶을, 수라의 길을 걸어도 오를 수 없는 마의 단계. 그것이 바로 마신경. 절대자가 이룬 경지다.
그럼에도 기어이, 각오를 다지며 오로지 놈을 꺾는 집념만으로 삶을 사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차라리 그동안 이뤄보지 못했던 꿈들. 오래전 태황각에서 함께 지냈던 수하들을 살려주거나, 그들의 꿈을 이뤄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무슨 걱정을 그리하세요?”
때마침 등 뒤로 다가온 사람.
설휘는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소령…….”
소령이 다소곳하게 그의 옆에 앉았다.
문득 향기로운 냄새가 설휘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며 가라앉은 기분을 풀어주었다.
“무슨 고민이든, 대장만 짊어지실 필요는 없어요. 이제 우린 함께니까요.”
그 말에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여기에 오면서 강조했던 말.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같이 이겨나가자고.
그리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라고.
“잠깐 잊을 뻔했다. 우린 함께라는 걸 말이다.”
“그래요. 이젠 잊지 마세요.”
소령은 그렇게 한마디, 한마디에 여운을 불러일으켰다. 어느새 자신의 마음에 안식을 주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고갈되었던 정신이 회복되는 듯했다. 그저 가까이 있기만 해도 기분을 좋게 만드는 사람.
스윽.
“……!”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던 설휘는 눈이 커졌다. 갑자기 그의 손 위에, 소령이 손을 포개어 온 것이다.
그러고는 담담히.
“좋아한다는 말, 지금 해도 되는 거죠?”
“…….”
설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그녀의 제안이, 그리고 행동에 말하기 힘든 그 ‘기분 좋음’이 있었다.
‘그래. 이맘때쯤…….’
숱한 위기를 느끼며 소령과 함께 있었던 시간.
그리고 강호로 나와, 여기서 나눴던 감정들.
한지에 스며드는 물감처럼, 어느새 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이 정도로 커져 버린 것이다.
더는 설휘만 가졌던 일방적인 마음이 아니라.
“……이건, 아닌가요?”
반응을 보던 소령이 살짝 주눅 들어 손을 뗐다.
꾸욱.
설휘는 떨어지는 손을 붙잡으며 천천히 그녀를 응시했다.
“아니. 아, 아닌 게 아니라.”
“……?”
“그게…… 네가 조금 더 지체했다면, 내가 먼저 하려고 했다는 말이다.”
이번 삶은 그렇게 살기로 맹세했다.
가까이 있는 수하들을 지키는 것으로. 그들이 원하는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다른 이는 직접 들어야 했지만, 소령의 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꿈은 왠지 자신과 비슷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같이 삽시다, 소저.”
“……!”
일순, 소령이 고개를 홱 들었다. 그 표정에는 당황과 부끄러움이 역력했다.
그런 그녀에게 설휘는 바짝 다가가, 얼굴을 거의 맞대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이.”
스륵.
말과 함께 그녀의 입에 입술을 포갰다.
늦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하는 삶을 말이다.
***
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설휘네는 이사를 하였고, 구촌(舊村)에서도 제법 큰 집터를 얻을 수 있었다. 큰 문제 없는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러는 사이 강호는 점점 시끄러워졌다.
마인이 출몰하여 민가를 습격하고, 그들을 징죄하는 정파 무사들의 활약 이야기가 시골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여기서 마인은 당연히 일제자의 휘하가 보낸 화살받이들. 그리고 정파의 무사란 두말할 것 없이 화산파의 도인들이었다.
실제로는 중원과 마교를 해 처먹기 위한, 두 조직의 짬짜미 거래였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그저 화산의 용맹과 의기를 칭송하며 추종할 뿐.
사천 전역에 화산파 도복을 입은 직계 제자들이 활보하고 다녔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모이는 등 점점 그 위세가 날로 커지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간단한 식사를 마친 요림은 조심스레 문 앞에 섰다.
요기 후 잠깐 좀 보자고 설휘가 말했기 때문이다.
“들어오게.”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슬며시 문을 열었다.
스르륵.
사람의 성품을 보여주듯, 방 안은 단조함 속에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자주는 아니지만 매번 들를 때마다 방 안, 서재의 차분한 분위기는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앉게. 이야기가 좀 길 것 같으니.”
설휘가 한쪽을 가리키며 안내했고, 그는 설휘 맞은편으로 걸어가 앉았다.
단목으로 된 감청색 책상과 그 위에 한쪽에 비치된 문방사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따뜻한 찻잔이 보였다.
슬쩍 주변을 훑어본 요림이 물었다.
“무슨 일로…….”
“뭐가 그리 급한가. 차 한 잔 들면서 말하세.”
설휘가 웃어 보이자, 그는 그제야 조금의 여유를 찾았다. 갑자기 내실에서 따로 보자는 언질이라 뭔가 긴급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뭔가 분위기상 그건 아닌 모양이다.
후르릅.
권한대로 한 모금을 하며 찻잔을 내려놓자.
“요즘 기분은 어떤가?”
설휘가 물었다.
“좋습니다. 이렇게 터를 잡고 생활하는 데 만족하고 있고요.”
요림이 바로 대답했다.
“다행이네. 이전보다 나아서.”
“아무래도 환경이 바뀐 탓이 컸습니다. 본교에 있다 보면 분위기상, 마성을 이기지 못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지.”
설휘는 먼저 음무기부터 시작해서, 이곳까지 따라온 모든 조장들에게 태극삼신정을 가르쳤다.
신, 기, 정을 모두 조화롭게 만들어 경지의 상승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건 최소 목표일 뿐, 실은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있었다.
바로 마성의 통제.
마교의 마공은 그 근본 성질이 호전적이다. 그래서 마기를 익히면 기본적으로 호승심이 강해진다.
이 정도면 괜찮으련만, 여차하면 힘을 주체하지 못해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날뛰는 현상이 생긴다.
아무래도 주위 사방에 같은 마기를 뿜어내는 이들, 잠재적 경쟁자이거나 언제고 다툼의 상대가 되는 마교인들이 눈에 보이는 일이 많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교단에서 몸을 빼,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로 거주지를 바꾸자 일차적으로 폭력적인 충동이 확 줄어들었다.
여기에 설휘가 개량한 태극삼신정을 가르치니, 그 효과는 겹으로 나타났다.
단순히 무공 수준이 일취월장한 것이 아니라, 마공을 익혔으면서도 스스로 마성을 숨길 수 있게 되는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수고가 많았군. 자, 받게.”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설휘는 미리 준비해 놓은 작은 함 하나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건…….”
상자 안을 슬쩍 확인해 보더니, 요림은 당황한 눈으로 설휘를 바라보았다.
“뭐, 대단한 게 아니야. 그냥 경비 정도만 넣었네.”
“경비가 뭐, 건물을 몇 채 살 정도입니까?”
“우리 일 자체가 원래 험하지 않나? 그간 정산하지 않았던 자네 보수네.”
“……정 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셨나 봅니다. 이 정도로 확실히 물건을 준비하신 걸 보면.”
“힘들었지.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음무기 요 녀석이 돈을 워낙 많이 챙겨가지 않았나. 원래 한두 달 뒤에 주려고 했는데, 반년이 넘게 걸릴지는 몰랐지.”
“…….”
“…….”
달칵.
요림은 더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은자와 금자가 가득한 함을 받아들고, 잠시 눈을 내리깔다가 설휘에게 물었다.
“굳이 제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거야…….”
설휘는 예상했다는 듯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무인이라면 응당 더 넓은 곳을 주유하고 싶어 하지 않느냐, 요림. 내가 느끼기엔 넌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는 성격이야. 그것이 무위의 상승이든, 사람됨이든, 너를 더욱 나은 사람으로 이끌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원한다면 음무기처럼 방탕하게 풍류를 즐길 수도 있겠지. 그러다 파락호가 되어 이름 모를 객잔에서 만날 수도 있겠고.”
“아름답지 못한 만남이겠군요.”
“뭐 어쨌든, 이제 그만 나서는 게 좋지 않겠나. 새로 사귄 여인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
“……!”
일순 요림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맴돌았다. 설휘는 그를 보고 악동처럼 웃었다.
“누가 그걸 꼰질렀나 궁금한가?”
“네…….”
“표정을 보니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인데, 이미 늦었네. 반년 전에 출가했던 음무기일세.”
“허…….”
요림은 이마를 짚었다. 반년 전이면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하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이후의 일을 이미 예상했단 말인가.
아무래도 음무기는 거의 신기 있는 놈이 분명했다. 최소한 남녀상열지사에 관해서는.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한참 복잡하게 표정을 구기고 있던 요림은, 얼마 후에 조심히 시선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대장, 저 말고 다른 이들은……?”
“걱정 말게. 적송은 무공에 빠져서 여기 계속 있겠다고 하고, 용진도 비슷하네. 뭐, 녀석은 자주 집을 비우니, 출가한 걸로 봐도 되겠지만.”
“뭐, 제멋대로인 녀석이긴 하지요…….”
요림이 피식 웃자, 설휘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잠시 미소를 교환한 요림은.
“그럼,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떠날 채비를…….”
“지금 가게.”
“예? 그래도 같이 밥 먹은 세월이 있는데 인사라도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럼 해야지.”
“……?”
“다들 기다리고 있네. 바깥에서.”
그 말에 요림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방문을 열자마자.
“오! 드디어 가는 거요?”
“한몫 단단히 챙겼나? 혹시 금액은 얼마인지 알려주면…… 작은지 많은지 알려주겠네.”
용진이 밝은 표정으로 맞이했고, 적송이 미심쩍게 물었다.
“떠나는 사람 붙잡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소령은 그런 적송을 다그쳤다.
그런 그들 앞에 서서 요림은 예의를 차리며 인사했다.
“대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오는 설휘를 보며 말했다.
“잘 다녀오게.”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
요림은 주섬주섬, 그간 준비해온 것들을 채비했다. 그러고는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뒤돌아 읍을 해 보였다.
“대장. 절 한번 해도 되겠습니까.”
“사제지간도 아닌데 무슨…….”
“받아주십시오.”
퉁. 퉁. 퉁.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설휘를 향해 삼배지례를 했다. 제자가 스승에게 올리는 예우로 대우한 것이다.
설휘는 뒷짐을 지며 미소 지어 보였다.
“또 만날 일이 있을 겁니다.”
요림이 예를 차린 후, 일어서서 말했다.
“그래. 인연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지. 생각나거든 한 번씩 들르도록 하게.”
“……예.”
요림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소령을 보고 뭔가 생각이 났는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대장께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미리 축하드립니다.”
“……?”
“……?”
설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용진과 적송, 소령은 모르는 듯 보였다.
“소 소저는 아직 모를 겁니다. 그간 옆에서 지켜봤는데, 증상이 매우 비슷했으니까요.”
“……?”
“그럼.”
긴가민가한 말을 남기고 요림은 떠났고, 덕분에 의문을 풀지 못한 시선이 소령에게 몰렸다.
“……헙.”
그리고 한참을 갸웃하던 그녀는, 순간 헉하고 입을 막아버렸다. 그러고는 급히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좌중의 시선이 모두 설휘에게로 향했고.
“아.”
그도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요림이 말한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