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2)
“하나.”
하--앗!
“둘.”
하--앗.
한겨울, 구령에 맞춰 쩌렁쩌렁 울리는 연무장.
백 명이 넘는 무인들이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상의를 벗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은, 대부분 사천지부에 응시해 합격한 화산파 문하생들이었다.
“후우. 후우…….”
“헉…… 헉.”
화산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자, 사천 전역에서 몰려든 남자들.
나이도 체구도 재질도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공통된 것이 있었으니.
화산파의 직계제자.
이 기본 훈련과정을 통해 역량이 우수한 자는, 화산파의 연명부에 적을 올릴 수 있다는 것.
창천에 뜬 해처럼 위세가 오른 화산파의 직계라니. 이는 신분 상승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도, 희망과 의지를 한 아름 가슴에 품고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거기! 기합소리가 그게 뭐야!”
“죄송합니다!”
구령 소리가 작아지자, 이들 사이로 지나가던 인물들이 소리쳤다.
이들은 전문 교관이 아닌 문하생들. 지금 가르침을 받는 이들보다, 좀 더 빨리 입문하여 적응한 이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정식으로 입적한 신분은 아니지만, 군대만 해도 몇 달 고참이 제일 무서운 것처럼, 이들의 눈빛과 질타가 가장 매서웠다.
“똑바로 해! 똑바로!”
“흠.”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도복을 입은 이들도 있었다.
바로 본산에서 직접 교육생들을 살피러 온 화산파 제자들이었다.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중정에서 연무장을 바라보던 노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장로 구문목.
이번 사천에 발생한 여러 소란을 잠재우고, 마인을 처단하여 사람들을 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이다.
공식적으로 화산파 서열 7위. 근래 들어 화산파의 명예를 크게 높인 이가 이곳에 직접 나타나 현장을 보고 있었다.
“다들…… 그저 입문생답지 않은 열의가 있어 보입니다. 앞으로 화산이 얼마나 번창할지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런 명성을 ‘만들어 준’ 인물이 있었다.
바로 일가(一家) 백난향(白蘭香).
마교에서 모두 열 개의 조직으로 구성된 십가.
각 조직마다 저마다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그 가운데서도 일 가주는 조금 특별했다.
바로 장악력.
수하들이 따르는 충성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언제든지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덕분에 임무 수행에 관해선 살마의 깊은 신임을 받는 자.
그런 그가 사천 성도에 왔다는 건, 작금의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는 살마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합! 합! 합!”
“그런데 구문목 장로.”
수련 무인들의 외침이 메아리치던 가운데, 다시금 백 가주가 입을 열었다.
“예. 말씀하시지요.”
“아무리 사천 전역에 공표를 했다지만, 짧은 시간에 이 많은 인원을 소집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인데……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
“아, 그게 뭐,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신뢰지요. 사람을 모으는 방법 중 믿음 만 한 것이 없으니까요.”
“흐음. 그래요?”
“결국은 다 화산파의 이름이지요. 정파의 기둥. 오래된 역사. 그리고 강인한 무인들이라는 결과까지.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백 가주님?”
“아니. 아니외다.”
백난향은 다소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얼굴을 되돌렸다. 전말을 다 알고 있는 그로서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파의 기둥이라. 화산의 이름이라. 그거 다 우리가 만들어 준 것 아니던가.’
거짓된 명예이고 거짓된 신뢰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우스운 형국이다.
더 우스운 것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자신에게까지 저렇게 말한다는 것.
‘하여간, 강호의 인간이란 것들은 재미있어.’
몇 달간 같이 호흡을 맞추다 보니, 백난향은 정파에 대한 세계관. 그리고 그들의 생각과 수완까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마교와는 비슷하면서 다르다. 그가 본 강호는, '명예'에 목숨을 거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명예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는, 어찌 보면 마인보다 더 저열하고 비열한 뒷공작들도 있었다.
당장 눈앞의 화산파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강호를 구한다, 양민을 구한다. 그런 허울 좋은 명예를 위해서, 천하 공적으로 지정하고 있는 자신들. 마교인들과 손을 잡고 거짓 위상을 세우지 못해 안달이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열등감, 무림의 쌍벽이라는 소림과 무당을 앞서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작용하고 있었다.
‘뭐. 공포를 신뢰로, 권위를 명예로 치환하면 별로 다르지 않을지도.’
이런 경험이 앞으로 마교 천하, 언제고 강호인을 부릴 때 어떤 방식이 더 효율적일지를 알 수 있는 사전 공부가 제법 되는 것이다.
“그럼, 계속 수고해 주시오.”
드르륵. 드륵. 드륵.
백난향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앉아 있던 십여 명이 모두 일어났다.
그가 짧은 목례 후 나가자, 따르는 수하들 대여섯이 함께 자리를 빠져나갔다.
“흐음.”
배석 자리의 절반 가까이 비워졌고, 구문목이 다시 자리를 앉을 때쯤. 뒤에 있던 노인 하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구문목 장로님. 굳이 이런 공식 석상에 저들을 데려오는 게 맞는가 싶습니다.”
구준석 장로였다.
“왜요? 문제가 있습니까?”
“보는 눈이 있어서 말입니다. 저들의 출신들도 있고…… 또 언제 돌발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지가 염려됩니다.”
“그렇기에 더욱 옆에 둬야지요.”
구준석의 말에 구문목은 자신의 하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저들이 바라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게 하는 것. 그것이 대우라고 생각할 겁니다.”
“허나 저들의 출신은…….”
“그걸 원하는 겁니다. 같은 위치에 앉아서 우리도 너희와 같은 놈들이다. 인간사 다를 바 없다고 알려주어야, 저들이 좋아할 겁니다. 그들에게 좋은 감정을 끌어낸다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어떤 의미입니까?”
“더 피를 흘리고, 더 죽어주는 것이지요. 모든 악행은 저들이 모두 덮어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문파들과 격이 다른 명성과 인정을 가져갈 것입니다. 하니…….”
그는 다시금 구준석 장로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곧 뒈질 놈들 옆에 꽃 한 송이 놓을 정도. 그만한 대우는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렇습니다.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구준석 장로가 밝은 표정으로 응답하자 구문목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르륵.
그러고는 연무장을 응시하다가,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저기, 장로님.”
뒤쪽에 기립해 있던 한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미간을 찌푸리던 구문목이 상대방 얼굴을 보고는 반갑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오. 두진이 아니냐?”
“예. 어르신.”
“호오. 그래,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그것이…… 아직 대금이 입금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대금?”
그는 슬쩍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구준석 장로가 다가와 말했다.
“이번에 입문생도 있고, 나갈 곳이 많다 보니. 일단 우선적으로 갚아야 하는 곳부터 해결하느라…….”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진에게 말했다.
“네가 소개했던…… 거기가 어디였지?”
“전문염왕채라는 곳입니다.”
“전문염왕채…….”
슬쩍 시선을 돌리자, 누군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밝은 표정이었던 구문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내 목소리를 차갑게 하여 대답했다.
“고작해야 파락호들이 운영하는 고리대가 아니더냐. 시끄럽게 굴지 말고 기다리라고 전해라. 시간이 더 걸린다고.”
“하. 하지만 어르신. 이미 한 번의 기한을 넘겼습니다. 더구나 한 번에 목돈을 융통한지라 이자가 워낙 세기도 하고…….”
“시끄럽다! 어차피 양민의 고혈을 빨아 불법적인 운영을 해온 자금 아니냐? 사정이 될 때까지 더 기다리라 해! 못 기다리겠다면 우리가 실력행사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전해주고.”
“아…….”
찔금.
두호의 표정은 썩은 달걀처럼 변해 있었다.
오늘로 입금해야 하는 상황인데, 구문목 장로는 처음 거래 때와 태도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아마도 이제, 사달이 나도 크게 날 터였다.
‘그쪽도 보통이 아닌 거 같던데…….’
그들이 누구인지는 본인이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이들도 호락호락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을 아꼈다.
당장 눈앞의 주먹, 화산의 칼이 더 가까웠으니.
***
겨울이 왔다.
그간 설휘네는 음무기와 요림이 떠났고, 뜻밖의 식구들이 넷 늘었다.
요리나 청소 같은 가사 전반을 돕는 시종이 둘, 거기에 약초꾼과 유모였다.
시종들은 난리로 인해 오갈 데 없어진 이들 중 심성이 좋은 이들을 골라 받았고, 약초꾼은 스스로 청해서 들어온 이였다.
그리고 유모는 미리부터 급여를 주고 고용하고 있었다.
나중에 소령이 아이를 낳을 경우를 대비해서다.
챙! 채챙!
마당에서는 한겨울임에도 대련이 한창이었다.
용진과 적송. 이 둘은 각기 자신의 병기를 이용해, 진지하게 승부에 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설휘가 있었다.
‘적송의 성취가…….’
놀라보게 성장했다.
그의 재능이 이 정도였는가 의심이 될 정도로.
물론 그 이면에는 설휘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한때나마 탈마에 올랐던, 그리고 정종무공의 심득까지 가진 그의 무리는 이미 인간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니 옆에서 지켜보며 초절정. 그 이상의 경지로 이끄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삼화취정이라니. 정말 신기한 일이야.’
설휘가 정말 놀라워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본래 무위가 초절정이었던 적송이 한 단계 더 경지 상승을 했을 때, 당연히 초마에 오를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머리 위에 세 개의 꽃봉오리를 피우는 현상을 보였다.
이는 정종무공의 삼화취정. 초마가 아닌 신검합일에 가까워지는 때의 증상이었다.
그 장면이 설휘가 자신의 무위를 돌아보게 했다.
‘그간 익혀왔던 무공들, 그리고 경지 상승에서 보였던 기운들로 보아, 분명 초마에 오르는 게 맞았다. 헌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태극삼신정?
그저 새로 익힌 무공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라는 건 믿기 힘들었다. 적송이 익혀온 것이 바로 마공이었기 때문이다.
정공을 토대로 한 무공은 화경으로, 마공을 토대로 한 무공은 극마로 이어진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지금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기존에 알고 있던 경지 상승의 중요 뼈대는, 내공이 아니란 말이 된다.
그보다 경지가 오를수록 더 큰 깨달음을 얻을 때,
그것이 자연이란 바탕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 뭐랄까요. 편안했습니다. 과거엔 뭔가 번뜩임과 함께 신체에 변화가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 것은 없으되 그저 편안함이 가득했습니다.
설휘는 적송의 소감에서 오랜 의문점 하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깨달음의 주체는 결국 상단전.
그곳을 하나의 소우주로 보았을 때, 적송은 좀 더 세상을 넓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정신의 변화는 내공의 변화 역시 가져왔을 터였다.
어차피 마기는 순수함이 변질된 기운이 아닌, 변형된 기운이니까.
‘만약. 내가 현경을 이룬다면…….’
극마와 화경처럼. 마신이 되는 극단적인 효과는 없을 거였다.
다만 그 근원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탈마에서, 그리고 현경에서 찾을 수 있는 태초의 힘.
그것을 운용할 수 있다면, 상단전은 소우주처럼 넓어질 것이다.
그런 과정을 반복해 가다 보면, 결국 마신을 상대할 수 있는 미증유의 힘을 얻을지도 모른다.
‘전혀 몰랐던 접근 방식이었어.’
남을 가르치는 가운데서 오히려 배운다고 하던가.
자신보다 수준이 낮은 하수를 가르치려면, 가르침의 눈높이가 하수만큼 낮춰져야 한다.
그런 노력을 하면서, 더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로, 기존의 자기 성취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런 걸 여유라고 하는 것일까.
조금 엉뚱하게도, 수하들과 평화로운 생활을 영유해 보고자 살아가던 가운데, 외려 치열하게 수련하던 때보다 더 큰 도움을 얻었다.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미래. 마신과도 상대할 수 있는 힘. 그걸 얻을 실마리를 잡게 된 것이다.
‘태초의 기운이라면…….’
설휘는 과거를 떠올렸다.
곤마는 죽어가는 가운데 제3의, 아니 제4의 힘을 잠깐 선보였다.
어둠보다 더 짙고, 빛보다 더 밝은.
만약 자신이 그 힘을 끌어올 수 있다면…… 그 아득하던 절대자와 대등한 싸움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큭.”
설휘가 상념에 막 빠져나오던 때였다.
용진은 바닥에 쓰러졌다. 시뻘게진 얼굴로.
“비겁하게 찌르기를. 다시 한 번만…….”
“그럼 또 진다.”
“대장.”
설휘가 끼어들며 제지하자, 용진이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그를 더욱 속이 터지게 하는 이는 따로 있었다.
“아서라. 네놈이 매일 한량처럼 돌아다닐 때 난 여기서 수련만 했어. 그런데 어떻게 이길 거냐?”
“쳇.”
용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취월장한 적송의 실력은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렇게 티격태격하던 사이, 그들 앞으로 시종이 다가왔다.
“어,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만.”
시종이 말에 적송은 병기를 거뒀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용진도 억울한 표정과 달리 더는 대항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 남자가 뒤돌아설 때, 멀리서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그놈이지 뭐.”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익숙한 차림의 녀석을 단번에 알아보는 용진이었다.
“그러고 보니, 받을 돈 있지 않았어?”
설휘의 말에 용진이 두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랬지요. 시간도 늦었고. 제대로 한번 손 좀 봐줘야겠군요.”
용진은 괜한 화풀이를 다른 이에게 할 요량이었다.
그가 가져올 소식을 아직 듣지 않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