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3)
“그래서 제날짜에 납부할 수 없다고?”
“분위기상 그렇게 될 것 같…….”
“전에는 확실하다고 보증하지 않았나.”
“그게…… 저도 확실한 줄 알았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정파는 원칙을 중요시하고 약속을 지키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아, 그래서 우리 전 재산을 화산파에 넙죽 넘기셨습니까?”
“전 재산요? 그건…… 변순데요?”
퍼억!
한 대 주먹을 처맞은 두진은 고개를 휙휙 돌렸다.
역시나, 언제 맞아도 아프다. 주먹이 맵기도 하지만 부위가 절묘한 게, 이 정도 고통이면 사람 때릴 줄을 아는 놈이다.
아마 본교에서도 어떤 특정 단체에 속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어떻게 할까요?”
“흠.”
용진이 물어보자 팔짱을 낀 설휘가 잠깐 고민했다.
“제가 받아오겠습니다. 어차피 돈 쓴 놈들 목적은 뻔하니까.”
적송이 기다렸단 듯 말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용진도 참여 의사를 밝혔다.
어차피 돈이라면, 적당히 자금줄 몇 개만 털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좋다. 둘이 가거라.”
“옙.”
“언제든 환영이죠.”
적송과 용진이 웃음빛을 띠었다.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간만에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일까.
“다만, 살인 같은 극단적인 행동은 피해야 한다. 괜히 그랬다간 화산파, 그리고 마교 쪽 인원들과 싸우게 될 거다.”
“그럼 저들이 완고하게 나오면요?”
“그냥 나오너라. 지금으로선 그들과 대적하지 않는 게 더 나아. 적송? 용진은 쉽게 흥분하는 성미가 있으니 네가 책임지고 상황을 판단해라.”
“알겠습니다.”
“아니. 제가 무슨 흥분을 한다고…….”
용진은 불만이 많은 듯 혼잣말로 구시렁댔다.
그런 그를 보며 설휘는 뒤돌아섰다.
이 정도로 얘기해 뒀으면 충분하리라. 돈보다 더 중요한 건, 마교에 발각되지 않는 것이다.
이번 생은 큰 분란 없이 살려고 하는데, 괜히 그들의 시선을 끌어서 좋은 건 없었다.
***
“무슨 일 있어요?”
달그락.
방으로 들어온 설휘에게 소령이 차를 내려 내밀었다.
어느새 척 보기에도 배가 많이 나와 있는 게, 한 달 뒤 애가 나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아니오. 잠깐, 문제가 있었는데…… 곧 해결될 거요.”
“무리하지 마세요.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건강이 제일 중요해요.”
“말만 들어도 행복해지는구려.”
예전에 소령의 성격은 조금 기복이 있었다. 무뚝뚝하거나, 또는 갑자기 벌컥 하거나 하는 식으로.
그러다 아기를 가진 뒤에는 매우 온화하게 변했다. 기복도 줄어들고 말투도 조심스러워졌다.
물론 한 번씩 감정 조절이 되지 않기도 하지만.
“그나저나 고민을 해봤는데…… 전에 말했던 아이 이름 말이오.”
“정했어요?”
설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이(台怡)라 짓는 건 어떻소?”
“어떤 뜻인데요?”
“태(台) 자에서 사(厶) 자는 코를 가리키고, 구(口)는 입을 나타내는 거라, 생명을 뜻하오. 또 태 자를 아이를 밸 태(胎) 자로 말해도 이상하지 않소. 거기에 이(怡) 자는 기쁠 이 자요."
말인즉슨 생명이 태어나거나, 아이가 와줘서 기쁘다는, 부부의 마음이 전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이리 지었다고 설휘가 첨언했다.
“태이라…….”
“어떻소?”
설휘가 물어보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어감이 너무 좋아요.”
“나도 그렇소.”
설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소령의 배에 손을 살포시, 조심히 얹이며 말했다.
“태이야……. 내가 너의 아빠란다.”
“…….”
“아직 답답하지. 괜찮아. 이제 곧 우리는 볼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잘 참아다오.”
설휘는 본인이 말하면서 뭔가 가슴이 뭉클했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건, 정말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이제껏 가져온 수많은 감정 중 가장 위에 있는, 편안하고 안락한 기분 그 자체였다.
“아.”
그렇게 이름을 부르고 소령을 쳐다보았는데.
주륵.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뭔가 한마디라도 잘못 얘기하면 툭 하고 흘러내릴 것 같이.
“부인…….?”
“아, 제가 너무 감정에 취했나 봐요.”
그녀는 눈을 훔쳤다.
임산부라서 그런가, 설휘보다 훨씬 더 감정의 추이가 큰 듯 보였다. 그녀는 몇 번 호흡을 고른 후 말했다.
“사실 많이 힘들었거든요. 말하지 못할 만큼. 그런 내게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
스윽.
설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현실이오. 우리가 만난 것도, 태이가 우리에게 온 것도.”
“…….”
“모두 현실이 만들어낸 기적이오.”
“네. 기적이에요…….”
왈칵.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를 설휘는 안아주었다.
체온이 높아져서일까, 유달리 그 품이 따듯하고 포근하다.
‘이런 게 행복이란 거구나.’
마음이 편안하고 안온했다.
그리고 한없이 푸근한 기분이었다. 수많은 삶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그리고 바랐다. 지금 느끼는 이 작은 행복이 계속 이어지기를.
***
화산파 사천지부의 내실.
화려한 실내장식과 호화로운 융단이 깔린 곳에, 한 사내가 포박된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끄응...”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는 자의 이름은 이강.
일대제자 중 한 명으로, 화산파 사천지부의 자금을 관리하는 담당책이었다.
“정신이 좀 드나?”
“…….”
이강은 눈을 껌벅였다.
꽁꽁 묶인 몸. 그리고 마지막 기억은 정신없이 두들겨 맞은 것이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침입자는 둘.
그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흐음, 이제야 좀 대화다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겠군. 돈은 어디 있나?”
“무, 무슨 돈! 너희 도적 놈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어허. 머리를 너무 세게 때렸나. 기억을 못 하는 모양인데.”
사내 중 하나가 머리를 긁적였다.
“우린 도적이 아니다. 전에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온 건데, 그쪽이 갑자기 땡강 부리다가 벌컥 하고 먼저 손을 썼지 않나.”
“빌린 돈……? 어디서 거짓말이냐! 그간 부채는 전부 상환…….”
“전문염왕채.”
뚜욱.
막 발칵 하려던 화산파 제자. 이강이 거기서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마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게 이제 떠오른 모습.
“이제 기억 나나? 그런 얼굴이네.”
“빨리 갚고 처리하자고. 괜히 얼굴 붉히지 말고.”
“…….”
한데 이강의 표정이 다시 완고해졌다.
그는 눈앞에 있는 침입자 얼굴을 스윽 보더니 말했다.
“이봐. 본점에는 지금 돈이 없어.”
“엉……?”
“본파가 벌이는 일은 규모가 보통이 아니야. 사정을 잘 모르고 왔나 본데, 나간 자금이 회수되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린다고. 그러니 나중에 상황이 나아지면 그때 갚을 테니……. 컥!”
그리고 얻어터졌다.
퍽. 와장창.
발길질 한 번에 묶여 있던 의자까지 박살 난 것이다.
“어이어이. 괜히 힘쓰지 마.”
벌컥 하는 용진을 말리는 이가 있었다. 적송이었다.
“어쩌라고? 그냥 이 새끼 말만 듣고 빠지라고?”
“아니. 굳이 그놈과 상대할 필요가 없어서 말이야. 이거 봐.”
용진을 다독거리며 적송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는 화려한 실내장식과 수납장, 그리고 묘한 곳에 위치한 옷장 등을 하나하나 짚어 보며 말을 이었다.
“딱 은형진법이잖아. 돈 없다고 배 째라는 건데, 뭐 하러 째냐?”
“……!”
그 말에 여유롭던 이강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하니 화산파 상승의 진법을 한눈에 알아차릴 줄 몰랐던 것이다.
“하긴, 어찌 돈을 관리하는 놈 방에 제대로 된 게 하나 없다더니만……. 이런 게 있었군.”
“…….”
용진이 납득하는 것을 보고 적송이 끄덕였다.
“그냥 진법 깨고 돈 가져가자. 괜히 푸닥거리하지 말고.”
“흥.”
이강이 코웃음을 쳤다.
“이곳은 화산파의 사천지부다. 한낱 파락호들이 진법에 대한 알면 뭘 안다고 깨니 어쩌니……. 어?”
촤르르륵.
기관진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의 기물이 흔들리더니 이내 완전히 바닥으로 사라졌고.
쿠구구궁.
뒤이어 거대한 수납장이 벽면에 붙어서 솟아올랐다.
“깨지네?”
“이, 이런 씨팔……!”
퍼억!
용진의 일격을 받고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게거품을 물면서.
끼이익.
“우와.”
수납장을 열어본 용진과 적송은 환호를 질렀다.
장 안에 가득한 금괴와 은괴.
자신들이 보낸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있었던 것이다. 그 양을 가늠해 보던 용진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야. 이거……?”
“음, 너무 많은 돈이야. 출처가 의심스러운데.”
화산파는 대외적으로 마인을 토벌하고 소지품을 챙겼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상황을 아는 설휘 쪽 사람들에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려면 마교가 두둑한 금전을 내줬겠는가. 그것도 당장 화살받이로 죽으라고 내모는 그들에게?
“전표가 있군. 이건 인근 중소문파의 것인데……. 소리 없이 약탈하고 증거를 없앤 모양이야. 어째 이상하더라니.”
“하, 더러운 놈들.”
적송의 추측에 용진은 탁. 하고 침을 내뱉었다.
사천은 넓다. 중앙의 여력이 닿지 않는 낙후된 지역도 많고, 작은 마을에 무관을 연 중소문파들도 많았다.
개중에는 정말로 마인들에게 학살당해 재산을 약탈당한 자들도 있겠지만, 여기 모인 금전의 양으로 보아…….
사실은 정체를 숨긴 화산파의 암수들에게 죽거나 빼앗긴 이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의 피해를 마교의 마인들 탓으로 돌린 모양이었다.
죽은 자들은 억울하고 원통하겠지만, 말을 할 수 없으니까.
턱. 터턱. 투욱.
용진은 자신이 들고 온 보자기를 펼쳐, 수납장에 가득한 금자 은자를 전부 때려 박기 시작했다.
“이봐. 적당히 챙겨.”
“왜, 수고비는 더 얹어야지.”
“나 참.”
적송이 용진을 말리다 말고, 자신도 품에서 꺼낸 자루에다 금자를 가득 채웠다.
그러다 힐끗, 한 번 뒤돌아보았는데.
“못 보던 얼굴이군.”
“……!”
“……!”
갑자기 뒤에서 처음 보는, 화산파 도복을 입은 놈들이 나타났다.
‘이런.’
그를 본 적송은 직감했다.
이번엔 애송이가 아닌 녀석들이라고.
인원은 모두 다섯. 키는 죄다 컸고, 그중 앞에 있던 셋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들을 빠르게 훑은 적송은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상대하기 버거운 실력자임을 느낀 것이다.
‘고수. 나보다 훨씬…… 위다.’
최근 오기조원, 그리고 삼화취정을 겪으며 경지가 대폭 상승한 그였기에, 기감이 대폭 확장되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눈앞의 놈들은 마교 기준으로 극마.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느껴졌다.
“누구야? 너희들.”
처억.
용진이 먼저 그들 앞으로 나섰다. 그러다가 눈을 좁혔다.
사채꾼 두진. 자신들에게 이곳을 알려준 놈이, 복면을 쓴 이들과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들이냐?”
“예, 어르신. 확실합니다.”
‘어르신?’
저들의 대화에 적송의 미간이 좁혀졌다.
두진은 이미 십가의 하나라고 밝혀진 바였다. 그런 놈이 어르신이라 부를 만한 인물이라면…….
수군수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맨 앞의 복면인과 다른 복면인이 뭐라고 은밀하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역시. 그랬군. 이제야 대충 짐작이 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하자.
“어이, 뭐냐고 너희들은……. 대답 안 해?”
짜증이 치민 용진이 한마디 던지며 달려 나갔고.
“용진. 안 돼!”
적송은 말렸지만 한발 늦었다.
휘이익!
맨 앞의 복면인을 노린 용진. 그는 재빠르게 퇴보를 밟으며 그의 얼굴을 노렸는데, 그 순간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촤아아아악.
“……!”
빛처럼 빠른 무언가가 자신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 이후. 용진은 휘청, 중심이 흔들려서 급하게 자리에 섰다.
“큭!”
그리고 곧 자신의 어깻죽지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걸 확인했다.
창졸간에 복면을 쓴 세 명 중, 뒤쪽에 있는 하나가 움직여 공격해 중상을 입힌 것이다.
휘익! 쉭! 퍽!
“크아아아!”
그리고 연이은 삼 격. 용진은 급히 뒤로 물러섰고, 비명을 토해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는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여기서 죽는다.’
하지만 적송은 덤비지 못했다.
급이 다른,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
기파로 보아 이놈들은 화산파가 아니다. 그렇다고 두진처럼 십가에 속하는 하급 마인도 아니다.
‘마기를 풍기지 않아. 내력을 철저히 갈무리한 상대…….’
최소 초마에서 극마.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목적을 띠고 파견된, 본교에서 직접 내려온 인물들이리라.
“크으으으…….”
그렇게 미약한 용진의 신음 소리와 함께, 얼어붙은 적송에게로.
“저기, 사람을 한 명 찾으러 왔는데…….”
맨 앞에 있는 복면인이 나서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협조해 줄 수 있겠나?”
“…….”
당연히 부탁이 아닌 협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