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거자필반 (1)
꿀꺽.
적송은 침을 삼켰다.
그는 방금 두 눈으로 확실히 보았다.
복면인 중 하나의 움직임이 어땠는지를.
‘말도 안 돼…….’
몇 달 전이었다면, 자신으로선 감히 알아보지도 못했을 극도의 쾌다. 이제껏 나름 성취를 보여왔던 용진이 단 두어 수에 나자빠질 정도로.
“이거 미안하게 됐네. 이쪽이 말도 들어보지 않고 덤벼들어서 말이야…….”
피식.
웃는 것일까. 복면인들 중 앞으로 나서 있던 자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직은 대화가 가능하다는 뜻일까. 적송은 침착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그쪽이 바라는 게 뭐지?”
“소령이라는 여자.”
“……뭐?”
적송은 머리를 갸웃했다.
저쪽이 소령을 찾는 이유가 뭘까. 아니, 애초에 고작 한 개 대주에 불과했던 그녀를, 척 봐도 극마고수급인 저들이 어찌 알고 있는가.
“네가 궁금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녀가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면 돼.”
“…….”
“이봐. 괜히 잔머리 굴리나 본데, 서로 어렵게 가지 말자고. 우리도 마음먹으면 오래 걸리지 않아 찾을 수 있다고.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게 귀찮을 뿐이지. 알아들었나? 적송.”
“……!”
적송의 눈이 커졌다.
이들은 자신을 알고 있다.
역용술로 얼굴을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행동을 벌이는 것일까.
‘침착하자. 어차피 내가 불지 않으면, 녀석들도 쉽게 찾지 못한다.’
후우.
적송은 한숨을 내쉬고, 차분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마음먹으면 찾을 수 있다는 말, 그걸 달리 말하면 자력으로 찾으면 시간이 꽤 걸린다는 얘기다.
그리고 저들의 태도로 보아 저들은 소령을 찾고 있지만 은영단, 넓게는 곤마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남는 건.
‘일제자? 혹은 이제자…….’
어느 쪽이든 안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절대로 위치를 알려줘선 안 된다.
“어디 있는지 생각났다. 근데…….”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의 보던 적송이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 왜 소령을 찾는지. 그 이유.”
“……”
“이쪽은 한솥밥을 먹던 동료다. 대체 무슨 일로 그녀를 찾는지, 그걸 모르면 알려주는 게 부담스러워.”
“그건 아까 말했잖아.”
“……?”
“네가 궁금할 필요는 없다고.”
“……그럼 답은 나왔군.”
적송의 손은 이미 품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단번에 주변을 둘러보며 손을 품에서 빼었다.
“다음에 보는 걸로.”
스아아아아아--- 쾅!
화약이 터지고 눈앞을 분간할 수 없는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흡? 이건…….”
더군다나 알싸한 향내.
독인가? 반사적으로 폭발을 일으킨 적송을 잡으려다, 복면인들은 주춤 물러섰다.
그렇게 몇 호흡 더 늦게나마, 달아나는 적송을 향해 움직이려 할 때.
“아서라. 그냥 놔 줘.”
앞에 있던 복면인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다른 선두에 선 이, 다른 복면인을 바라보자.
“성공했습니다.”
“잘했다.”
그들은 화약 냄새와 함께 눈앞의 안개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놈의 뒤를 밟아볼까?”
***
그 시각 설휘는 집 뒤에 있는 산,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모퉁이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벌써 일 년이라…….’
이곳에 온 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고리대업으로 돈도 벌었고, 수하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떠나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정말 하늘의 축복으로.
자식도 얻었다.
‘어쩌면 이것이 본래의 길일지도 모른다.’
문득 천미려의 사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거대한 적에 대적하지 말라고, 조용히 세상 밖에서 사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던 노신선.
모난 돌이 정을 맞는 법이다. 무력으로 두각을 나타내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것이 중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권력 욕심 없이 소소하게 사는 것이, 어찌 보면 사람으로서 진실로 행복해지는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간 시스템 안에 있을 때 몰랐는데,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니 뭔가 또 얻는 게 있었다.
재미있게도 무공에 대한 집착을 하지 않다 보니, 더 멀리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지금 내 경지는 어느 정도가 될까…….’
특별히 극마나 화경 같은 경지 상승의 효과는 없었지만, 막연하게 그때보다는 더 강할 것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정, 기, 신.
상승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단초가, 어느 때보다 원활하게 자신의 주위를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설휘는,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군가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올라오는 속도를 보면 경신법을 쓰는 것으로 보이고, 방향이 정직한 걸 보면 자신 식구 중 한 사람일 터였다.
“너는!”
“대장.”
적송이었다.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고, 옷에는 피가 잔뜩 묻은 채로 나타난 것이다.
“어찌 된 일이냐?”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적송은 빠르게 그간 일어난 상황을 얘기했다.
화산 지부에서 용진이 다친 것도, 그리고 정체불명의 마인들이 소령을 찾는 것도.
“소령은 왜?”
설휘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좋은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
설휘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소령이라니. 과거에 그녀가 연관된 일이 있었나? 하고 되짚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참혹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적송에게 물었다.
“용진은?”
“죄송합니다.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지만…… 살릴 방도는 없는 듯합니다. 장기가 전부 손상되어…….”
“아.”
설휘는 이마를 붙잡았다.
설마하니, 용진이 이렇게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화산 지부에 강한 고수가 있어도, 어차피 그들을 대면할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최근에 경지가 크게 상승한 적송만 있으면 충분히 빠져나오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우선, 용진에게 가보자.”
“예, 알겠습……. 어?!”
일순 적송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렸다.
콰아앙!
저 멀리서 거대한 폭발과 함께 심상치 않은 기의 파동이 흘러나온 것이다.
“저곳은……?!”
타닥!
적송이 말끝을 흘리던 그때, 설휘는 쏜살같이 아래로 달려 나갔다.
저 방향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건물.
소령이 머물고 있던 집이었기 때문이다.
***
‘뭔가, 잘못된 거야.’
있는 힘껏 신법을 펼치며, 설휘는 점점 불길한 예감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왠지 이 나쁜 예감의 근원이 자신의 일이라고 여겨진 까닭이다.
운명을 바꾸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길이 잘못이었을까.
시스템을 벗어난 것이 잘못이었을까?
전부 확신할 수 없지만, 왠지 하나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문제가 모두 자신에게 비롯된 것임을.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극마급 고수들이 자신. 아니, 소령을 찾을 리 없지 않은가.
“제발…….”
훙! 훙! 퍼더더덕!
공중을 밟다시피 하는 폭발적인 경신법으로, 설휘는 단숨에 집 앞까지 다가섰다
그리고 마당에 들어서고는 우뚝, 발을 멈추고 말았다.
“아…….”
피였다. 거둬들인 시종이 목이 잘린 채 바닥, 담벼락, 심지어는 지붕까지 날아가 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실 문 앞에는 유모로 짐작되는 여인의 사체가 있었다.
몸통이 없었다. 이는 낯선 침입자를 향해 덤벼들어서 화를 입은 게 아니다. 보자마자 바로 검기, 그것도 화염 계열의 폭발력으로 날려버린 것이다.
시체가 그을려 있는 것도 그것을 뜻하는 것일 터.
“이런, 개새끼들…….”
설휘는 이를 악물며 다시금 걸었다.
소령. 소령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몇 곳을 뒤져 봐도 보이지 않았다.
“소령! 소려엉! 어딨소!”
설휘는 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찾아 헤맨 그는 바닥에 있는 발자국을 발견했다.
타다닥!
신속하게 이동한 그곳에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흔적이 보였다. 보폭을 대충 가늠해 본 설휘는, 그 방향이 검령산을 향해 있다는 걸 알았다.
“대, 대장……?”
때마침 달려온 적송. 그는 설휘를 보자마자 변을 당했다는 걸 직감했다.
“적송. 용진에게 전해주거라.”
“…….”
“이번 생에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리고 때가 되면…….”
설휘는 약간은 울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의 소원을 이룰, 이뤄줄 날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내 반드시 그리해주겠노라고 알려 두거라.”
“……알겠습니다.”
뜻을 모를 말이었지만, 적송은 묻지 않았다.
패액!
대답을 듣자마자 설휘가 움직였다. 동시에 일어나는 기의 파장.
“……세상에.”
그 모습에 적송의 눈이 부릅떠졌다.
화살처럼 달려 나가는 설휘. 그의 몸에서 이는 변화가 단순한 게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이는 한갓 깨달음보다 더욱 특별한 변화.
놀랍게도 설휘는 환골탈태로 보이는, 극적인 경지 상승을 실시간으로 조율하며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
산속으로 들어가던 설휘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바닥의 잔풀 때문에 흔적이 희미해질 때쯤, 안쪽에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발…… 제발…….’
지금 설휘는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오로지 소령의 생사만 확인이 되면, 무엇이 됐든 눈앞에 이들을 모두 죽여버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점점 접근하는 길 끝에 시선이 올라갔다. 나무에 올라서 자신을 노려보는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뭐야. 우리 뒤를 밟은 거냐?”
예상대로 나뭇가지 위에서 망을 보고 있던 이들. 모두 둘이었다.
한 명은 복면인이었고, 또 한 명은 낯이 익었다.
농염한 기색이 흐르는, 젊은 여인.
“호오. 이 녀석. 기운이 범상치 않은데?”
둘은 곧 지면을 밟으며 자리에 섰고, 설휘를 경계했다.
“너는…….”
설휘는 두 사람 중, 특히 뇌쇄적인 모습의 여인을 보며 당황한 듯 눈이 커졌다.
시아영.
옥녀관의 수장이며 천리 길도 추적한다는 사향흑묘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일제자 살마 휘하의 고위급 인물이, 대체 여기 왜 와 있단 말인가.
“너는 뭐지? 날 아는 눈치인데?”
상대의 시선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시아영.
그런 그녀를 노려보며 설휘가 말했다.
“소령은.”
“…….”
“소령은 어디에 있냐?”
설휘의 물음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던 와중에 시아영이 피식 웃었다.
“그년은 왜? 네가 기둥서방이라도 되시나? 깔깔깔.”
“…….”
그 말에 설휘는 눈빛이 변했다. 단 한 마디에 살의가 빗발친 것이다.
“호오. 한번 해보자는 거군? 가만 생각해 보니 그년, 누군가의 아이를 밴 것 같은데. 설마 그 애가 네…….”
팟.
설휘는 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급속한 쇄도로 순식간에 그녀와 거리를 좁혔고.
“흥!”
시아영은 빠르게 뒤로 뛰며, 품속에서 암기를 던졌지만, 곧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피이이익!
빨랐다.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아니 압도적인 움직임으로 도래한 설휘가,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진 것이다.
“그 더러운 입…….”
쩌엉!
그리고 그대로 폭발했다. 설휘가 염화공을 격발시켜 일격에 죽여버렸다.
“이, 이놈!”
경악한 복면인이 설휘의 등을 향해 달려왔지만.
퍼억.
권강이 뿌려져 완전히 그의 몸통을 관통해버렸다.
투욱. 투욱.
“끄아아아악.”
“……!”
그렇게 덧없이 두 명이 쓰러졌을 때, 설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파사사…….
저 멀리서, 소리가 들린 것이다.
“제발!”
빠르게 주변을 훑으며 달려가던 설휘. 하지만 그는 순간, 뭔가를 보고 흠칫 동작을 멈췄다.
‘아……?’
느리게, 아주 느리게 보였다.
권강으로 몸이 꿰뚫린 놈의 복면이 풀어지는 걸.
그리고 천천히 드러나는 그 얼굴을 확인한 설휘는 움직이지 못했다. 몸이 얼어붙었다.
“아…….”
털썩.
바닥에 나뒹구는 사내. 완전히 복면이 풀어진 그의 얼굴을 보고 설휘는 충격을 받았다.
“네가…… 네가 왜…….”
자신의 손에 죽은 복면인.
그는 놀랍게도 자식처럼 떠나보낸 수하. 요림이었다.
그리고 요림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제껏 가장 떠올리기 싫었던 끔찍함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끔찍했던 기시감이.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오!”
“…….”
설휘의 비명 같은 외침에 요림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는 이미 정상인의 눈이 아니었다. 마성에 사로잡힌, 광마로 변해 있었기에.
마치 예전, 자신을 배신했던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