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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물레이션-350화 (329/379)

350화. 거자필반 (2)

“……제법 피곤하게 만들었군.”

절벽. 낭떠러지 바로 앞까지 몰아붙여 온 복면인이 단언했다.

무인이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몸이 무거운 임산부. 그런 소령을 추적하고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산이었다.

추적 중에 죽일 기회가 분명히 여러 번 있었는데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어떤 조화를 부린 건지, 여자는 예상치 못하게 위기를 벗어났다.

이런 경험은 그간 숱한 추적과 척살을 해 온 그로서도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

뒤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비탈은 자신들이 완전히 점령했다.

제법 도망질에 능력을 보였지만, 표적은 이제는 독 안에 든 쥐다.

“……내가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나 보네. 당신들이 직접 이렇게까지 쫓아오는 걸 보면.”

미래를 직감한 것인가.

소령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간 곱게 길러왔던 머리카락은 온통 피에 엉켜 엉망이 되어 있었고, 공격을 피하던 와중에 찢긴 의복은 그런 당찬 모습도 되레 안쓰럽게 보이게 했다.

“객쩍은 소리 마라. 운명은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그냥 목을 내놓으라고? 웃기지 마. 너희들에게 죽을 바에는 차라리…….”

스윽.

소령은 자신의 목에 칼을 댔다. 그 모습에 잠시 움찔했지만, 복면인 둘과 노인 하나는 곧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파르르르.

눈앞에서 바로 자진하여 목숨을 버리려 하던 소령.

허나 그녀의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음은 충분히 각오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몸은 그와 달리 한순간이라도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해봐. 어서.”

“…….”

“왜? 갑자기 겁이 나나?”

부들부들.

대체 무슨 변고일까. 이제껏 필사적으로 힘을 내가 왔던 몸이, 정신을 따르지 않고 있었다.

“익. 이익!”

파르르르!

두 번 세 번 마음을 다져 보았지만, 검을 든 손은 세차게 흔들릴 뿐.

그저 한 번 그으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끝날 터인데,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

“이래서 여자는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뱃속에 든 아이 때문에 자결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군.”

“……!”

복면인 하나가 이죽거리며 비웃었다.

‘우리 태이…….’

그에 소령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모정. 아니면 어미로서의 본능이랄까.

여기서 결딴을 내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 처참한 미래가 기다린다. 허나,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몸은, 뱃속에 새 생명을 잉태한 그녀의 몸은, 단 한 순간만이라도 더 삶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본능이라는 게, 대단하기도 했지만 여기서는 발목을 잡는군. 마지막이 조금 허탈…… 응?”

피식피식 비웃던 도중, 복면인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뭔가가 그의 감각에 잡힌 것이다.

파우우웅!

“헉!”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자신에게 쏘아진 기공!

알아차리자마자, 복면인은 급히 호신공을 끌어올리며 방어했고.

콰아앙!

그럼에도 뒤로 튕겨나가자, 그는 전력을 다해 두 손으로 맞받아쳤다. 갑작스런 기습에 담긴 힘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미친! 이게 무슨……. 권강?”

드드득. 구구구국!

한순간에 거의 일 장에 달하는 거리를 밀려 나갔다.

“……!”

“……!”

같은 편이 기습당하는 걸 본 이들이 모두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온몸에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는 의문의 사내. 그가 싸늘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고 있었던 것이다.

***

‘이게…… 뭐냐, 대체.’

설휘는 공격자들의 면면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둘은 복면. 하지만 복면을 쓰지 않은 낯익은 존재. 그는 설휘도 잘 아는 존재였다.

“당신…… 향개?”

일제자 살마의 오른팔이자, 마교 공식 서열 10위의 극마고수.

어떻게 이자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일까. 대체 무슨 연유로.

“가만. 그럼 너희들은…….”

오싹.

설휘는 언뜻 스치는 불안감과 함께 옆에 있는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특히 자신의 권강을 어렵지 않게 막아낸 인물을.

“살마. 일제자?”

“너……? 어떻게 알았나?”

설휘의 단정에 이번엔 복면인 쪽이 당황한 듯 보였다.

“그리고 당신은…….”

설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한 명의 복면인을 향하고,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교주…… 천월성?”

“…….”

복면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체구와 움직임을 살핀 설휘는 확신했다. 마주친 적은 단 한 번이지만, 그 특유의 기세와 체격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놈이다. 정말로 교주가 이곳까지 온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뭐지? 당신들이 여기에 왜?”

하지만 대체 왜? 어째서 일제자가, 거기다가 교주까지 자신을 추적해 온 것인가. 그리고 조금 전 보았던 요림은 대체 무슨 술수에 걸린 것인가.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왜 이들이 여기서 소령을 공격하고 있는 건가.

차라리 자신을 목표로 해 왔다면, 뭔가 시스템의 추적이라든가 그런 걸 생각하겠지만.

“미안해요.”

“부인……?”

그때였다. 꺼질 듯 가냘프게 소령이 흐느꼈다.

설휘는 당황했다. 미안하다니. 그녀가 대체, 자신에게 사과할 일이 뭐가 있다는 것인가.

“다 제 잘못이에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데…… 하루하루가 행복해서…… 욕심으로 미루다 보니…….”

“걱정하지 마시오. 부인. 이자들이 보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만사를 다 포기할 건 아니오.”

꾸욱.

설휘는 두 주먹을 쥐고 전의를 끌어올렸다.

괜한 죄책감. 소령은 자신 때문에 이 모든 사달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설휘의 경험상, 이렇게 추적당한 적은 전에도 있었다.

사과를 해야 할 것은 오히려 자신이지, 애먼 운명에 휩쓸린 그녀가 아니었다.

“마음 단단히 먹으시오. 내가 당신을 반드시 구하…….”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게, 그게…….”

“……?”

헌데 뭔가가 이상했다. 소령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흐느끼기만 할 뿐.

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마치, 뭔가를 쏟아내기 직전처럼 격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부인?”

그에 이상함을 느끼는 설휘. 그런 중에 옆에서 더 신경을 자극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정말 충격적이군. 이토록 젊은 자가 혈마수라는 최상승 무공을……. 본교에 이런 강자가 있었나?”

“아닙니다, 교주님. 표적이 옆에 그런 고수와 동행한다는 정보는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 흠, 그럼 이걸 어떻게 한다.”

스윽. 슥.

교주 천월성. 어울리지 않게 복면까지 쓴 그는, 잠시 뭔가를 고민하더니 곧 설휘를 향했다.

“거기 너, 일단 물러서라. 이건 네가 낄 일이 아니다.”

“뭐라고?”

“이 여자, 소령은 네가 아는 여자가 아니야. 네 부인은 더더욱 아니고. 네 조악한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설휘가 인상을 쓰며 노려보자 교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이어진 말에.

“이 여자는, ‘플레이어’라는 존재다. 고난과 환란을 몰고 다니는 존재지.”

“……?!”

일순. 숨이 멈췄다.

동시에 설휘의 몸이, 정신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멈췄다.

크게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고, 교주가 말을 이었다.

여전히 복면을 쓴 채로.

“납득이 안 되겠지? 갑작스런 이야기겠지만, 이 세상에는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다. 삼라만상 모든 것을 수치화해놓은 것이지. 그리고 그 안에서,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존재한다. 바로 이 여자.”

“……”

“소령이라는 이름의 플레이어는 이제껏 수십, 어쩌면 수백 번의 삶을 경험했지. 겉보기는 이십 대이지만, 실제 이 여자의 나이는 수백을 넘었을 거다.”

“…….”

“어쩌다 이 여자와 엮였는지 모르겠지만, 플레이어는 세상에 환란을 불러오는 존재. 그래서 내가, 마교의 하늘인 내가 직접 움직인 거다. 외관에 속지 말고 관계없는 너는 물러서…….”

“소령이, 플레이어, 라고?”

설휘는 말을 끊었다.

천월성이 뭐라고 갖다 붙이든, 어차피 그의 말을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중요한 건.

“흐으으윽……!”

눈앞에서 흐느끼며 무너져 내린 소령. 그녀의 반응. 그리고 그로 인해 계속해서 각인되는 말들뿐.

소령이, 플레이어?

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인가.

이제껏 플레이어는 오직 나…… 나만…….

‘아.’

하지만 그 순간.

너무도 당연한 전제가 깨어졌다.

세상에 플레이어가 단 한 명? 그건 아니다. 당장 AI 사유강도, 그가 보았던 플레이어가 수천 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정말로? 가만. 그러고 보니…….’

혼란에 빠져 있던 그의 머리는 빠르게 옛 기억을 띄우기 시작했다.

이제껏 의문스러웠던, 아니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소령은 예지력이라는 게 있다고 했지…….’

생각해 보면, 어째서인지 설휘의 삶에서 중요한 충고나 조언을 던져왔던 소령.

그녀는 마치, 자신이 행하는 결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미래를 아는 것처럼 보였었다.

‘내가…… 그랬듯이…….’

하지만 그게 플레이어로 죽음을 경험하며 알게 되는 것이라면, 이는 맞아서 떨어진다.

그리고 또 하나, 과거 설휘는 시뮬레이션으로 플레이어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 “현 상황에서 나 말고 다른 플레이어들이 존재해?”

- <분석 중……◇>

- <1명의 플레이어가 존재합니다.>

그때의 결과는 분명 한 명.

당시의 설휘는 그 대상이 바로 교주, 지금 눈앞에 있는 자라고 여겼다.

그런데 또 한 명의 플레이어가 있었다니.

‘절대자…… 플레이어…… 그의 수하…….’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랬다.

변수가 아니라 항시 고정된 상수이니까.

그리고 그럴 경우.

- “수하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려줘.”

<규정된 지역 너머의 일은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사령대 인물들과 흩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의 소령은 사천 땅보다 훨씬 먼 곳에 있었다.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랬기에 당시 시뮬레이션의 질문에 '플레이어'였던 소령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들은 더 있었다.

‘그때 AI의 행동도 그랬어.’

“어? 소령, 네가 어떻게?”

“원래 너는 여기 올 수가 없는데…….”

마태룡을 찾기 위해, 화산파의 몰래 숨겨진 지부에서 AI가 흘린 말.

AI 또한 미래를 안다. 그런 AI가 당황해서 내뱉었던 말.

그 말은 AI가 아는 미래가 비틀렸다는 얘기가 된다.

왜? 소령이 플레이어로서 따로 움직였기에.

‘나는 저 신선의 힘으로 플레이어에서 벗어났지만, 그녀는 아니다. 여전히 시스템의 존재에 속해 있고…….’

그렇기에 이번엔 자신이 아닌 그녀를 시스템이, 교주와 일 제자가 추적해 온 것.

와장창!

머리에서 뭔가 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든 조각이 맞춰지자 설휘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원래부터 시스템은 이런 계획이 있었던 걸까.

아님.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만든 것일까.

“이건 아냐. 이럴 수 없어! 이건 아니라고!!!”

설휘는 머리를 감싸며 울부짖었다.

이제껏 잊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려고 했다.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잊힌 것은 혼자만의 속편한 생각이라는 걸.

저 기분 좋으라고 수하들을 이끌고 나온 이상, 그들이 시스템에 속해있기에 다른 플레이어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는 걸.

용진이, 적송이, 요림이 그랬다.

과거 이런 식으로 자신을 찾아왔던 살마, 그리고 교주의 모습처럼.

“왜…… 왜 내게 말하지 않은 거요?”

설휘는 소령을 향해 물었다.

죄를 지은 것처럼, 벌벌 떨고 있는 소령에게.

“플레이어라고. 내가 플레이어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씨발 왜 말하지 않았냐고! 너는 알고 있었잖아!”

설휘는 분노에 끌어 찬 울분을 토해냈다.

플레이어란 걸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건 자신을 농락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당신……? 설휘. 가가도 플레이어……였어요?”

눈물 맺힌 부릅뜬 눈. 소령의 물음에.

“……?!”

설휘는 뭐가 어떻게 어긋난 건지 희미하게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아. 그래. 몰랐구나.

그녀는 몰랐던 거구나.

시스템이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설휘 자신만은 완전히 벗어나 있었으니까.

그것이 노신선, 천미려의 사부가 풀어준 제약이었으니까.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네놈도? 아니, 어떻게?”

갑자기 급격히 당황하는 천월성 교주의 당황스런 시선 속에서.

우드득.

설휘는 허망하게 웃었다.

본인도 그렇지만, 그녀도 참 기구한 삶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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