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거자필반 (3)
‘대체 뭐지? 어디서 튀어나온 놈이지?’
복면을 쓴 교주, 천월성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시스템이 알려온 ‘권역 이탈 플레이어’는 어디까지나 소령이라는 여자 하나뿐.
갑작스런 이탈. 예상 못 한 돌발 상황이라, 이리저리 추적하는 데 1년 가까이 걸렸다. 그래도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소령이란 여자는 무위도 높지 않았고, 큰 문제를 일으킬 성품도 아니라, 평소의 감시는 낮은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대체…… 플레이어였다면서…….”
추적 대상을 보며 흐느끼는 남자.
아마도 소령의 남편으로 추정되는데, 놈의 언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플레이어라는 말에, 그게 뭐냐고 되묻기는커녕 바로 납득하고 무언가를 떠올린다. 이건 명백히 일반인이 보일 수 없는 반응이다.
거기에 안갯속처럼 살피기 힘든 무위 또한 마찬가지.
‘최소 살마. 최대로 놓으면…… 말도 안 되는데.’
상대의 무위 수준이 짐작되지 않는다. 그건 여차하면 자신에 육박한다는 뜻인데……. 이 역시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일이었다.
탈마라니? 그럴 리가 없었다. 상시 위험한 싹을 보이는 이는 사전에 다 정리했거늘.
그렇다면 남는 가정은 최악 중의 최악.
‘시스템의 존재를 아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인가?’
아마도 은폐나 잠입 같은 특수 능력 레벨이 극히 높은, 그래서 자신이 시스템으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
그렇다면 말이 된다. 하지만 그건 거꾸로 상대가 아주 까다롭다는 말.
‘일단은…… 상황을 볼까?’
까닥까닥. 스르륵.
천월성의 손짓에, 살마와 향개가 뒤로 물러났다.
부부는 여전히 뜻 모를 말을 나누고 있었다. 교주는 저들의 감정이 격양된 와중에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을 생각이었다.
“생각이 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이지 말았어야지! 왜 이렇게까지 한 거요……. 우리 애는! 애는 무슨 잘못이 있냐고. 대체 왜…….”
설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소령.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삶을 이어온 것인가. 그것이었다. 헌데.
“가가. 이번이…… 제 마지막 삶이에요.”
“……!”
마지막.
그 말에 설휘의 움직임이 완벽히 멈췄다.
눈동자, 그 안의 동공조차 숨이 멎은 것처럼 멎어버렸다.
“미안해요. 저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요. 마지막…… 이 지옥 같은 삶의 마지막만은…… 내 뜻대로 하고 싶었어요. 작고, 소소한 행복을 찾으면서.”
“마지막이라니, 설마 당신……?”
“네. 제게 더는 코인이 없어요. 이번이 남은 마지막 목숨이에요.”
“…….”
설휘는 충격에 먹힌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둥근 모양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배를 보자,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그래, 그녀도 힘들게 살아왔을 거다.
원치 않아도 사람을 죽이고, 때로는 고문당하고 죽고. 그런 것이 플레이어의 삶이다.
수라지옥처럼 끝없이 죽고 죽는 고통스러운 지옥의 끝에, 삶의 마지막을 평화롭게 보내고 싶은 것을…… 어찌 잘못이라 할 것인가.
“전 괜찮아요. 다만 우리 아기가, 겨우 얻은 아기 얼굴도 못 보고 가는 게 너무…….”
소령은 눈물을 흘리며, 힘들게 말을 이었다.
“괴로워요.”
“…….”
괴롭다. 그저 간결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담긴 말.
슬쩍 시선을 피한 설휘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앞이 뿌옇게 변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해된다. 그게 이유라면, 너무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이 개 같은…… 그 개새끼가…….’
절대자. 시스템을 이용해 세상을 제 맘대로 조율하는 천일공노할 버러지.
반드시 도려내야 할, 역병보다 더 악독한 새끼다.
충격으로 주저앉을 듯 휘청거리던 설휘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를 떠올린 것이다.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냐. 어떻게 해서든…… 소령을 구해야 해.’
이미 벌어진 상황은 어쩔 수 없다. 어찌 됐든, 그녀를 여기서 반드시 구해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의 몸 상태와 적들의 능력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 당장은 극마의 극한 수준. 이 정도로는 교주와 싸움이 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이는 교주.
그의 능력을 최소한으로 잡아도, 탈마의 두 번째. 기신의 영역쯤 될 것이다.
그리고 옆의 극마고수 둘. 그중 살마는 극마에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지금 이대로는 싸워봐야 필패. 소령을 구하려면 자신의 무위를 탈마의 경지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허나 어떻게? 세맥 타통에 필요한 운공 시간만 최소 2각 이상이다. 그 시간 동안 눈앞의 적들이 가만히 기다려 줄 리도 없는데…….
푸르르. 우뚝.
“설휘, 너무 애쓰지 말게.”
한참 고민을 씹던 중에, 갑자기 소령이 말해왔다.
“……?!”
설휘의 눈이 커졌다.
말투가…… 이상했다. 뭔가 무겁고 묵직한 것이, 소령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이질적이다. 그렇다면.
“너는……?”
AI!
설휘는 직감했다.
소령이 더는 무리라고 여겨 AI에게 이 순간을 맡겼다는 것을. 혹은 AI가 자신이 나서겠다고 소령을 뒤로 물렸거나.
“설마…… 사유강?”
신야자일 리는 없으니, 그인가 하여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이것.
“아닐세. 나는 관자평(冠子平)이라 하네. 소령이란 플레이어에 등록된 AI지.”
“…….”
“어쨌든 오늘 처음 보는 처지지만,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알고 있네.”
“뭐? 어떻게…….”
“나름 AI들 사이에선 유명하다네. 절대자의 분노를 일으킨 유일한 남자. 제한된 운명을 넘어서서, 시스템의 제약에서도 벗어난 단 하나의 존재로.”
설휘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사유강이 꽤 오래 전에 말했던 것과 달리, AI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플레이어들의 평가를 AI끼리 주고받을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소령에게도 AI가 있다면, 지금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미안하네. 안타깝게도 우린 여기까지일세.”
“무, 무슨 소리야? AI라며? 당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면, 여기서 도망칠 능력이 되지 않아?”
“현실적으로, 임신한 여인의 몸으로는 무리야. 태내에 있는 아이 때문에 내기를 과하게 운용할 수도 없어. 저들은 지척에 있으니 네가 탈마에 오를 기회를 주지 않을 테지. 하지만 그 무엇보다.”
AI 관자평은 냉막하게 말을 이었다.
“저 녀석을 처리하고 나면, 절대자가 나타난다. 너야 어찌어찌 도망칠 수 있을지 몰라도 소령은…….”
“아…….”
설휘는 그 말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툭툭. 툭툭.
복면을 쓴 교주는 계속 이쪽을 보고 있었다.
확실히 그가 있었다. 어찌어찌 온갖 술수를 써서 극마의 몸으로 탈마의 고수를 쓰러뜨린다 해도, 딱 거기까지일 터.
다시 만나게 될 절대자를 상대로, 소령을 지키는 건 불가능하리라.
“그럼, 결국…….”
“괴로워 마라, 설휘. 그저 담담히 받아들여. 이건 소령이 선택한 운명의 결과일 뿐이다. 그녀는…… 여기까지지만, 너는 그렇지 않으니까.”
“이봐……. 난…….”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자. 어쩌면 벗어나는 것을 넘어 초월하는 단계까지 우리는 기대한다. 그대는 나만 아니라 우리 모든 AI, 그중에서도 사유강이 인정한 최고의 플레이어니까.”
그 말이 설휘의 귓가에 울리듯 들렸다.
타악.
스스로 절벽 밑으로 몸을 내던진 소령의 모습이 느리게 흘러갔던 것이다.
- 궁금한 점이 많을 걸세. 이번 생이 끝나면, 자네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준비를 해 두겠네. AI의 능력 중 하나지.
전음으로 은은하게 전해지는 목소리. 그리고.
“고마워요. 행복했어요.”
멀어져 가는 소령의 희미한 목소리.
“아…….”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슬픔과 함께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온몸에 끓어올랐다.
“으아아아!”
“이런!”
“어서!”
설휘는 달려들었고, 뒤에서 지켜보던 복면인들과 향개가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까마득한 벼랑. 높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이거 하나는 알고 있었다.
이제 소령은 살지 못한다는 것.
“……너무 슬퍼 마시오. 부인.”
설휘는 갈라지고 쉰 목소리를 흘리며, 절벽에 한발씩 다가갔다.
그리고 소령이 떨어진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린 또 만날 것이오. 그대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척.
설휘는 바닥에 떨어진 소령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스윽.
그것을 목에 댄 채 검날을 위로 올렸다.
소령이 없는 삶. 천금 같은 아이를 잃는 삶.
이번 생은 더는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했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설휘는 생각하고 다짐했다.
다음 생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길일 것이라고.
“그래, 피하지 않겠다. 제대로 싸워주마. 반드시 넌 내 손으로 죽여주마.”
으득!
천미려가 말했다. 절대자를 죽이면 만날 수 있다고.
그땐 자신도 볼 수 있을 거라고.
소령도 마찬가지리라. 장벽이 한없이 높기는 하되, 어쨌든 방향만은 있었다.
그것이.
“그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라. 이 개새끼야아아아!”
유일한 위안이자 마지막 의지.
설휘는 그렇게 스스로 목을 그었다.
스극. 푸아악!
거칠게 솟아오르는 피 분수. 삽시간에 검게 물드는 시야.
[설휘 님은 죽었습니다.]
[현재 583개의 목숨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가진 목숨은 583개.
허나 필요하다면 언제든 임무를 받는 방식으로 늘릴 수 있다.
그리고 설휘는 이 정도라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절대자를 죽이기 위한 준비물로서는.
***
[시스템 내 허가되지 않은 접속 요구가 있습니다.]
[차단에 실패하였습니다. 다시 차단에 들어갑니다.]
[실패. 1회에 한해 AI 관자평의 요구가 수용되어 시뮬레이션 접속이 강제로 진행됩니다.]
얼마나 분노를 곱씹었던 것일까.
설휘는 알림창이 보이는 순간에도, 아직까지 가슴이 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랑했던 여인과 아이를 모두 잃었다.
그 생각만 하면, 그저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설휘의 극도의 감정은.
▶ 처음부터 시작한다.
▷ AI로 시작한다.
▷ 계속 이어서 한다.
▷ 저장한 지점을 불러온다.
▷ 시뮬레이션 Lv2로 시작한다.(New!)
선택지문과 함께 사늘하게 식어갔다.
분노도 따라서 차갑게 굳는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또렷이 머릿속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게…… 관자평의 안배인가.”
그중 새로 추가된 선택지문에 설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시뮬레이션 Lv2로 시작한다.’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시뮬레이션 Lv2로 시작하실 경우, 원하시는 만큼 시뮬레이션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관지평의 말대로 그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시스템이 대체 무엇인지, 천미려와 소령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지.
그리고 저놈의 절대자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시뮬레이션 Lv2를 실행하려면 생명 코인 100개가 필요합니다.>
<비용을 지불하고 ‘시뮬레이션 Lv2로 시작한다.’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목숨이 백 개라…….’
목숨이 몇 개라도 상관없었다. 필요하면 시스템 안에 들어가 목숨 수를 늘리면 된다.
설휘에겐 그간 삶에서 왜 소령이 플레이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는지가 궁금했다.
자신이 선택한 지문으로 움직일 때, 그녀는 항상 같은 행동을 반복했으니.
그런데 플레이어라면?
매 순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 리 없지 않은가.
<선택하셨습니다.>
살짝 긴장한 상태로 선택하니, 이것이 떴다.
설휘는 그렇게 조금 더 기다렸다.
그러자.
<무엇을 알려드릴까요?>
익숙한 문구가 떴다.
시뮬레이션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지는 모른다.
이전에 한번 시험해 본 적이 있으니, 한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설휘는 먼저 가장 궁금한 것부터 질문했다.
“내가 시스템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움직일 때, 소령은 대부분 같은 행동만 반복해왔다. 그녀가 플레이어였다면, 그리고 나와 함께 시스템 속에 있었더라면 이런 행동이 말이 안 되는 부분 아니냐?”
<질문 접수 완료. 분석 중-∇.>
질문이 끝나자, 시뮬레이션은 분석했다.
설휘는 궁금했다. 과연 어떤 답을 들려줄지. 소령의 플레이어로서의 행보가 드디어 나타나는 순간인 것이다.
<찾았습니다! 답해드리겠습니다.>
“……!”
설휘는 바짝 긴장하여 눈앞에 글자가 뜨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