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거자필반 (4)
[천마육성 시뮬레이션에서, 모든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합니다. 플레이어 설휘 님과 플레이어 소령 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선택지문의 선택에 따라서 세계관이 갈라지기도 합니다.]
……세계관은 공유하며 선택지에 따라 갈라진다고?
설휘는 계속 집중해서 문자를 읽었다.
[본 시스템에서 세계관 공유의 시작점은 ‘처음 시작하기’가 기준이 됩니다. 특정한 두 플레이어가 처음 시작하기로 진행하다 보면, 동기화된 플레이어의 직책이나 위치, 능력에 따라 상황이 다르게 적용됩니다. 먼저 시작한 플레이어는 차후에 동기화된 플레이어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플레이어 소령의 탄생 시기는?”
[보안 레벨 잠금]
[플레이어 설휘 님의 시뮬레이션 레벨이 낮아, 정확한 정보 제공이 불가능합니다. 귀하보다 좀 더 앞서서 태어났다는 것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음.”
차후에 등장하는 플레이어가 있으면, 그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설휘는 이 변화를 겪은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껏 거의 대부분, 저장하기와 불러오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친절하게도 시스템은 마침, 저장하기와 불러오기에 관한 설명을 해주었다.
[플레이어 설휘 님이 ‘저장하기’ 기능을 썼을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저장은 그 세계관에 쓰인 시간의 기록. 그것을 저장한 후 다시 불러오기 기능을 사용하는 순간, 이전에 만났던 플레이어의 캐릭터(인물)는 그때까지 기록된 더미(Dummy, 사람을 대신하는 인형)로 대체됩니다. 다만, 이 경우에도 예외는 있습니다. 바로 선택지입니다.]
‘선택지?’
설휘는 선택지문을 떠올렸다.
뜬금없이 튀어나오며 여러 가지 지문을 보여주는 선택지. 때로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고, 때론 기연을 내려주는 역할도 했다. 시뮬레이션은 지금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문의 선택지는 플레이어 고유의 선택이므로, 이때에는 모든 시간이 임의로 정지됩니다. 때문에 서로가 움직였던, 혹은 지나갔던 지점에서 양측이 조우할 만한 선택지를 골랐다면 그 순간 더미가 풀리며, 실제 플레이어로서 만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음…….”
시뮬레이션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소령이 플레이어일 때 만났던 경우도 있고, 혹은 실체가 아닌 더미일 때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계기는, 서로 동선이 겹칠 만한 지문을 선택했을 때로 한정된다고.
일단 이 부분은 쉽게 이해가 되었다.
‘그랬구나. 갑작스런 돌발 상황도 결국엔…….’
시간을 기록하고 불러들인다 해도, 두 사람이 고른 선택지에 따라서 갑자기 돌발 상황으로 판정되어 서로 만나는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이전 사유강이 봤던, 그가 알기로는 소령이 등장할 때가 아닌데 등장한 경우가 바로 이런 사례였다.
[두 플레이어가 조우하기 전에 한쪽이 죽으면, 다른 플레이어의 인식에는 그가 더미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선택지가 양측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에도 더미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때 더미의 성향은 시스템이 분석한 플레이어 성향과 같아지며, 가장 안전한 선택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씁쓸하고 허탈한 이야기였다.
말인즉슨, 설휘가 소령과 만난 대부분의 시간은, 실제 플레이어인 그녀와의 시간이 아닌 껍데기나 다름없는 가짜 삶이었다는 말이 되니까.
거기서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소령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했던 걸까?’
모든 플레이어 간에 조건이 동일하다고 하면 소령 역시 그간 자신의 껍데기, 더미를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령이 본 설휘 자신의 모습은 어떠했던 것일까?
마지막 삶. 함께 떠나 모든 걸 함께했던 걸 보면, 그냥 단순한 인연으로 끝나지 않았을 터인데.
<원하시는 질문에 모두 답했습니다. 더 물으실 내용이 있으십니까?>
시뮬레이션은 어떠한 고민이라도 해결해 줄 생각인지 시간의 제약 없이 계속해서 물어보고 있었다.
설휘는 잠시 생각한 후 화제를 돌려 물었다.
“만약…… 내가 죽으면? 그때는 어떻게 되지? 그 세계의 플레이어가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상황이 발생하는 건가?”
기본적으로 죽을 때까지 행동을 개시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만약 그럼 둘이 죽고, 다른 선택을 한다면? 같은 세계관에서 시작하는 게 맞을까?
<분석 중……. 답을 찾았습니다!>
시뮬레이션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 답을 내놓았다.
[두 플레이어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경우, 한 플레이어의 죽음은 다른 플레이어의 죽음까지 대기 모드로 진행됩니다. 다만 그 시간은 극히 짧으며, 인과관계에 따라, 선행 플레이어가 죽은 경우 더미가 된 채로 상황이 진행됩니다.]
“아.”
설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진 예상되는 바였다.
[사례로, 두 플레이의 시작점이 다르다 하더라도, 같은 동선을 지나가다 마주쳤다면 세계관이 합쳐지기도 합니다. 이때 상대적 시간의 간극은 강제 진행이라는 형태로 해결됩니다.]
“그렇군.”
강제 진행. 갑자기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시간이 휙휙 지나갔던 때의 이야기다.
가급적 큰 돌발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형태로 서로의 더미 플레이어가 활동하며, 최대한 서로 간의 간극을 좁히는 형태로 진행이 이어진다고.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자, 설휘는 왠지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치…… 구경거리 같군.”
플레이어들의 만남을 그저 하나의 재밋거리로, 누군가에겐 인생이 걸린 문제를 마치 흥미 있는 한 편의 경극처럼, 짜서 만들기 위한 배치와 설정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설휘는 재차 질문했다.
“좋아. 그럼 하나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는데…… 사랑은 뭐야? 갑자기 왜 그런 게 나왔지?”
<질문의 정확한 요지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일전에 내가 플레이어 소령의 머리 위에 있는 ‘사랑’이라는 표식을 본 적이 있어. 그녀의 사랑을 얻으면 목숨을 더 얻을 수 있다는 것처럼. 그건 왜 뜬 거지?”
당시의 상황을 머리로 떠올리며 세세하게 짚어나간 설휘.
“목숨의 추가는 본래 플레이어가 아닌 대상을 처치할 때만 주었는데…… 소령은 왜? 그것도 사랑이라는 갑작스런 행동을 요구한 까닭이 뭐냐는 뜻이야.”
최대한 차분하게 당시 기억을 떠올려 묻자, 시스템이 그에 반응했다.
<질문 접수 완료>
<분석 중……. 답을 찾았습니다!>
[천마육성 시뮬레이션 내 플레이어와 만남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이전에는 없었지만, 최근에 절대자께서 플레이어에게 부하(고통)를 주기 위해 업그레이드(발전)하여 만들어진 경우입니다.]
[하여, 사랑+3이란 것도 그녀가 더미인 경우일 때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플레이어와 같은 플레이어 간의 만남은 시스템이 오류(誤謬)를 많이 만들어냅니다.]
[경우에 따라 플레이어와의 소통에서 선택지문에 괴상한 문양이 보이거나, 뜻을 감추는 지문이 나타나는 것도 그와 비슷한 일종입니다.]
울컥.
‘고통이라고?’
설휘는 문장 하나에 예민해졌다.
절대자의 개입? 누군가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선택이, 고작 그의 유흥거리로 생겨난 거란 말. 당연히 엄청난 불쾌감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래서 그때 그런 게…….’
설휘는 시뮬레이션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그때의 그 괴상한 상황은, 플레이어와 플레이어의 만남 때문에 일어난 시스템 오류라는 걸.
차곡차곡.
소소하면서 이해가 안 되던 것들이 하나하나 풀리기 시작했다. 설휘는 이쯤에서 가장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좋아. 내가 시스템 밖으로 나갔을 때, 플레이어 소령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분명 더미가 아닌 실제 플레이어였어. 왜 그런 일이 가능했지?”
잊히지가 않는다.
마지막 목숨이라던 소령. 그녀의 절절했던 마지막 목소리가.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이 무형의 공간에서도 설휘는 그때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질문의 요지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시스템의 바깥이란 표현은 어떤 의미입니까?>
분석 전에 다시 시스템이 되물었다. 그에 설휘가 대답했다.
“시스템이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 시스템 내에 속하지 않은 인물. 그런 경우로 상정해 봐.”
<분석 중…….>
이번엔 시간이 꽤 걸렸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시뮬레이션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재차 분석 중…….>
<답을 찾았습니다!>
[해당 질문. 시스템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를 우선 ‘초월적 존재’로 정의하겠습니다.]
[초월적인 존재가 시스템 안을 들여다본다고 가정할 때, 당연하게도 그는 더미가 아닌 플레이어의 행동을 목격하게 됩니다. 다만 이 경우. 시스템 안의 플레이어 육성 시뮬레이션의 최종 형태, 가장 가망이 없을 경우를 기준으로 합니다. 쉽게 말해 목숨이 하나였을 때를 보통의 기준으로 정합니다.]
[이 경우 플레이어의 최종 형태. 직접 움직였던 동선이 아닐 때, 플레이어는 더미가 되는 게 아니라 증발하거나, 전혀 다른 곳에서 발견되게 됩니다.]
[레벨 제한 적용.]
[현 시뮬레이션으로서는 더 자세한 연산 추론이 불가합니다. 더 나은 시뮬레이션을 획득하신 후 다시 질문해 주시기를 권고합니다.]
“하…….”
이거였나.
소령의 마지막 목숨. 그 순간을 보았던 것은.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이제까지 설휘는 자신이 소령을 끌어들였다고,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면 자신이 부른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따라왔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시뮬레이션의 말처럼 증발했거나, 전혀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을 테니까.
“좋아. 그럼.”
모든 의문이 정리된 설휘는 다시금 시뮬레이션을 향해 물었다.
어쩌면, 이제껏 해온 모든 질문보다 이 질문이 설휘의 모든 것일지도 몰랐다.
“소령과 천미려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분석 중입니다.>
시뮬레이션은 빠르게 돌아갔고.
<찾았습니다!>
빠르게 결과를 토해냈다.
[플레이어 소령과 천미려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이 있으나, 시뮬레이션의 레벨이 부족하여 한 방법만 알려드립니다.]
[기존의 절대자라 부리는 ‘마신’을 죽여, 이 세계관의 시간선과 조정에 대한 권한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 설휘 님이 ‘마신’이 되는 순간, 세계에 대한 커스터마이징(재구성, 재설계)할 수 있습니다.]
[소령과 천미려의 부활은 물론이고, 원한다면 다른 이들도 가능. 직책과 위치, 나이 모든 것이 재설정 가능합니다.]
“부활이라고……?”
설휘는 글귀를 읽고 두 눈을 의심했다.
부활.
천미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마신을 죽이면.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뿐만 아닌.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래, 결국 그 새끼를 죽이는 것이 목표였어.”
설휘는 담담히 말했다.
돌고 돌아서 다시 찾아온 목표. 자신을 이렇게 만든. 모든 걸 빼앗아간 그를 죽이는 것이 맞았다. 그것이 모든 걸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더 궁금한 것이 있습니까?>
설휘는 여기서 소소한 몇 가지의 질문을 더 했다.
최고의 영약이 어디 있는지, 깨달음의 경지가 높은 도인이나 고승은 어디 있는지 등을.
그렇게 한참을 물어본 설휘는.
<시간의 기록을 불러들이시겠습니까?>
이전으로 돌아가는 걸 선택했다.
물론 이번엔 그때와 달랐다.
<시스템의 영역에서 벗어납니다.>
동료와 함께가 아닌 혼자였다.
절대자를 죽이기 위한 험난한 길.
그 첫걸음은 온 세상의 절대영약 모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