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인형설삼 (3)
“그런데…… 조금 의아합니다만.”
취곤이 말을 걸어왔다. 설휘는 부서진 마차 안을 살피면서 되물었다.
“뭐가?”
“보통은 표행이 습격당하면, 그걸 수습하기 위해 별도로 인원을 보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벌써 삼 개월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시신 수습도 안 되었잖습니까. 칠성표국이 이럴 리가 없는데.”
“…….”
설휘는 조금 생각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표국이 화를 당했다면, 다시 정비해서 현장에 나가는 것이 맞았다.
의뢰주에게 배상도 해야 하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탈취당한 표물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흉수는 어디인지 등을 파악해야 하니까.
큰 문제만 해도 그렇고 내부 단속, 죽은 표사들이나 쟁자수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시체를 수습하고, 그들의 가족에게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사건 현장을 이렇게 방치해 놓는다?
칠성표국 같은, 뿌리 깊은 표국에서 이랬다고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건 표국 운영의 기본만 되어도 할 일인데 말이다.
“흐음.”
마차에는 주검이 된 시체 두 구가 있었다.
보통 운송에 마차가 따르는 일은 보표나 표사급들. 그리고 전투 후에 부상자들을 태우는 용도로 쓰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시신에 많이 훼손되었다고 해도, 옷차림이나 장비를 갖춘 것으로 보아 원래 부상자였던 사람으로는 보이진 않았다.
‘기습받은 흔적이 있다…….’
마차 안에서 당했다.
이는 상당한 고수가 침입했다는 뜻. 고작 마차 문을 박차고 나올 틈도 없이, 순식간에 당했다는 것.
파작. 달그락.
설휘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악취가 물씬 풍기고 시신은 썩어 문드러졌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시신을 가까이서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코를 막고 찬찬히 들여다본 설휘는, 곧 특이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거…… 흥미로군.’
다친 곳은 뼈가 부러지고 살이 뭉그러져 있었다. 검으로 기공을 쏘아낸 무공이 아니라, 매서운 병기로 일 합에 제거한 모습이었다.
이제껏 기공을 활용한 싸움을 주로 겪은 설휘에게, 이처럼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모습은 낯선 것이었다.
‘무공보다는 무술이 뛰어난 인물들이라는 건데…….’
“뭐 좀 찾으신 게 있습니까? 으윽.”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린 채 취곤이 투덜거렸다.
방치된 지 석 달이나 된 시신은, 사람의 형상만 겨우 유지하고 있을 정도.
그걸 잠시 보고 있던 취곤은 설휘가 아직 살피지 못한 한 가지를 짚어냈다.
“독에 당했군요.”
“……독?”
“예. 쥐는 고사하고 벌레도 들끓지 않고 있잖습니까. 시신에 독이 남아 있으니 짐승들도 피하는 것이지요.”
“……!”
그랬다. 말을 듣고 보니 시신 옆에 죽어 있는 몇 마리의 쥐, 그리고 산의 야생동물들 몇이 보였다.
아마도 멍청한 놈들이 와서 한입 뜯어 먹고는 절명. 그 이후로 짐승들도 입을 대지 않게 되었으리라.
“흐음…….”
하지만 이 정도의 무위를 가지고도, 굳이 무기에 독을 발라서 쓰는 철저한 놈들이라.
설휘는 약간이었던 심증에 확신을 더한 기분이었다.
“뭔가 짐작 가는 곳이 있으십니까?”
“……대충.”
본인이 배운 기공의 묘를 살리는 공격이 아니라, 병기의 묘를 살리는 무술.
무인의 기상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전적인 전투를 추구하는 이들.
설휘가 알기로, 이런 버릇을 가진 이라면 크게 둘이었다.
하나는 군. 오위영이니 칠기대니 하는 군부.
또 하나는 황실의 특수부대들. 금의위나 동창 같은 첩보조직이자 군인인 그런 이들.
생각이 거기에 미친 설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볼 건 다 봤으니 이제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또 어딜……. 아, 칠성표국에 가보시려고요?”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갈 필요가 없어졌다. 이런 참극을 벌일 인물들이라면, 그쪽도 안 봐도 뻔할 터.”
“그게 무슨…….”
어리둥절해하는 취곤에게 설휘는 담담히 말했다.
“표국이 석 달 동안, 사건 현장을 수습하지도 않고 내버려 두고 있다는 건 무슨 뜻이겠나?”
“뭐, 무슨 급박한 사정이 생겼거나 여력이 없다는 말이겠……. 잠깐만요, 설마 칠성표국이 화를 당했단 말씀이십니까?”
눈을 부릅뜨는 취곤.
표국이 참사를 당하고도,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는 경우라면 한 가지.
아예 그 표국 자체가 멸문당했을 때다.
그 뜻을 짚어낸 취곤은 몸서리를 쳤고, 설휘는 대답 대신 물음을 던졌다.
“이 근방에서 한 손으로 꼽을 세도가가 누구지?”
“당연히…… 승선포정사(承宣布政使司)나 도지휘사 아닙니까?”
승선포정사는 이 구역의 관할을 맡은 행정직이다.
군은 도지휘사. 취곤이 보기엔 그보다 높은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설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관할 도성의 주인 말고, 가장 높은 신분. 가장 힘이 강한 이 말이다. 강호인들 제외하고.”
“강호인을 제외하고요? 아니, 그럼 이쪽엔……. 헉!”
취곤이 갸웃하다가 말고 또 한 번 눈을 부릅떴다.
표국을 습격하고 재물을 탈취하는 이들은 9할이 녹림.
녹림72채니 장강수로 108연합체니 하는 도적단들이다. 당연히 칠성표국에 해를 끼친 자도 그중에서 찾으려고 했다.
허나 그들 또한 따지고 보면 엄연히 강호인의 범주에 들어간다. 설휘 말대로 강호인을 제외한다면 녹림 또한 제외.
그럼 말 그대로 이 근방에서 가장 힘이 강한 이라면…….
“혹시 군왕(郡王, 친왕의 나머지 아들)도 범위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까?”
잠깐 생각하던 취곤이 이내 물었다. 조심스럽게.
“범위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들밖에 없어. 그래서, 이 주변에 없나?”
“이, 있습니다. 주태직이라고, 왕족의 세 번째입니다.”
“그렇군.”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단언했다.
“그 셋째라는 군왕이 아마도 배후이거나, 혹은 이번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 것이야.”
늑대를 잘 아는 것은, 같은 늑대다.
인형설삼 같은 영약의 존재를 알고, 그걸 빼앗으려 하거나, 아니면 본인 외에도 그걸 탐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터.
설휘가 보기에는 일단 그와 이야기를 해 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의 거처로 가자. 어느 쪽이냐?”
“…….”
취곤은 그 말에 등골이 서늘해 왔다.
군왕이라니, 그의 거처에 가서 뭐 어찌한단 말인가. 분위기상 절대 좋은 말이 오가지 않을 텐데.
아니, 애초에 직위도 관직도 없는 일개 무인이, 그런 귀한 분을 만날 볼 수야 있겠는가?
주제 파악 못 한다며 괘씸죄로 치도곤만 당하면 행운일 것이다.
“이, 이, 이쪽입니다……. 관도를 거치는 게 빠릅니다.”
취곤은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는 진저리를 쳤다.
‘적당히 내빼야겠군.’
판을 잘못 찾았다. 그냥 표물 운송인 줄 알았더니 자그마치 황족 간의 알력이라니.
고작해야 한 지역의 장물아비인 취곤에겐, 괜히 엮였다간 개죽음당하기 딱 좋은 큰 판이었다.
***
주우우욱.
활대가 웅크리듯 안으로 말려들었고, 동시에 시위가 팽팽해졌다.
화려한 갑옷으로 무장한 남자는 과녁을 바라보며 범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가 시위를 놓자.
패애앵 사아아아- 팍!
화살이 과녁으로 정확히 꽂혀 들어갔다.
“오!”
옆에 있던 군인 복색의 장년인 하나가 탄성을 흘렸다.
정확히 관중.
한 치의 오차 없이 과녁 중심에 맞은 것이다.
“대단하십니다, 전하. 이 정도면 최전선의 장군들과도 겨루어 봄직할 것 같습니다만?”
“하하, 과찬이십니다. 장군께서 옆에 계시니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화려한 갑옷의 남자는 젊었다.
약관이 조금 넘은 나이처럼 보였고, 생김새도 귀공자처럼 말끔했다.
그가 바로 군왕 주태직. 명황실의 핏줄을 이어받아, 이 지역을 입맛대로 재단하는 이였다.
“잘 손질하게.”
“예!”
청년은 봉황이 새겨진 활을 뒤에 대기하고 있는 병사에게 건네고, 불가에 둔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그 뒤를 따라, 장년인도 따라 앉았다.
“그나저나 저번 일도 그렇고……. 따로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하는데, 제가 담이 작아 제대로 대접을 못해드렸습니다.”
주태직의 말에 노장이 고개를 저었다.
“잘하신 겁니다. 시국이 시국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번에 서로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아무렴요. 저희는 한 장군과 늘 같은 방향이고 싶은 마음입니다.”
쪼르르륵.
때마침 시비가 차 한 잔을 내놓았다.
넓은 들판과 숲을 바라보는 운치. 두 사람은 한적하게 차를 한 잔 마셨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흘렀을까.
군왕이 다시 운을 뗐다.
“한 무장께서는 화살이 날아감에 있어서, 활대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님 시위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둘 다 역할이 있겠지요.”
“그건 당연한 말입니다만, 굳이 꼽자면 그중에서 뭐가 더 화살이 날아감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보시냐는 겁니다.”
“음.”
한 장군은 잠깐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재질과 크기 같은 걸 여러모로 고려해봐야겠지만…… 굳이 말한다면 활대입니다.”
“…….”
군왕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시위는 명주실을 이용하는데 탄성이 없습니다. 만들어도 튕기는 반발이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활대가 얼마나 단단한지, 또 그러면서 유연한지. 탄성을 이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예?”
갑작스런 말에 한 장군은 귀를 세웠다.
“화살을 잘 맞추려면 화살대, 시위도 있겠지만 결국은 쏘는 사람이더군요.”
“호오.”
“똑같은 자세, 똑같은 호흡, 똑같은 힘의 분배로 사격 후까지 마무리를 짓는 것. 저는 그런 의미에서 금의위의 도움이 필수적이라고 보았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한 장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군왕의 말에서, 앞으로 자금성의 입성만 아니라 대계에 앞서서 함께하겠다는, 그런 의지를 볼 수 있었다.
그 시작은 아마도 이번에 얻은 최고의 영약, 인형설삼이 될 터.
사사사삭.
둘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금 정원을 바라볼 때였다.
타다닥. 털썩!
병사 하나가 다급히 뛰어오더니 빠르게 부복했다.
“무슨 일이냐?”
눈앞의 이는 한 장군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대신 물은 것이다.
“그, 그것이! 침입자가 있습니다!”
“침입자?”
황당하다는 얼굴의 청년, 주태직.
그도 그럴 것이, 이 주변은 철옹성처럼 경계가 이뤄지고 있지 않은가.
“어디냐?”
한 장군이 다시 물었고, 병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들을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 2종 치장 창고 뒤쪽 건물입니다.”
“뭐?”
온갖 기관진식으로 만들어진, 말 그대로 철옹성 창고를 언급했던 것이다.
***
“더 가야 합니까?”
취곤은 이마가 땀으로 흥건했고, 무릎은 가시에 찔린 듯 시큰거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지붕을 뛰다시피 하다 보니.
물론 이동 중에 들키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을 보고 막 고함치려던 경계병은 노인의 일격에 순식간에 제압되고 말았고, 그렇게 몇 번 지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여기에 인형설삼이 있다.”
척 봐도 일반적이지 않은 창고.
철로 만들어진 입구에, 지붕은 기왓장도 올리지 않은 완만한 벽으로 이뤄져 있다.
그냥 볼 때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들어가는 이를 철저히 배제할 의도의 비정상적인 창고 앞에서.
“자, 드가자.”
노인은 가볍게 철문을 때렸고.
쩌어엉!
두터운 철문이 단 한 번에 일그러지며 열렸다.
“하하…….”
취곤은 이제 어이가 없음을 넘어서,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철문을 손으로 부수는 것도 그렇지만, 언뜻 본 문짝의 두께가 주먹보다 더 두꺼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