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인형설삼 (5)
차작. 차자작!
주변을 빼곡히 메운 어림군은 살기가 등등했다.
감히 하늘 같은 왕부의 담을 넘은 침입자. 거기다 천금 같은 귀한 보물을 훔쳐 달아나던 놈이다.
서평왕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든, 나중에 있을 좌천 때문에 목이 날아가게 생겨서든, 어림군이 이 도적놈에 대한 눈길이 좋을 리가 없는 상황.
차곡차곡 쌓여가는 전운 속에서, 왕자 주태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복장으로 보아…… 강호낭중이신가? 본왕은 딱히 강물을 어지럽힐 일은 하지 않았는데, 고인께서는 무슨 용무이신지?”
‘과연 서평왕(西平王) 주태직.’
취곤은 감탄했다.
말 한마디에 수많은 의미를 함축할 수 있다는 것은 범인이 가질 수 있는 역량을 넘어선다는 뜻.
강물과 우물물은 서로를 범하지 않는다? 이는 강호 무림과 관이 서로 적대하지도, 우호 관계를 맺지도 않는다는 고유의 관례를 뜻하는 말.
동시에 여러 가지 뜻이 담긴 복잡한 물음이었다.
무림인이 왜 왕부의 땅에 발을 들였냐는.
지금 이게 너 혼자 한 짓이냐, 아니면 강호 무림 전체가 왕부를 우습게 보기로 한 것이냐는.
그리고 쳐 죽여버리기 전에 네 소속이 어딘지 밝히라는 서너 가지의 뜻이 담긴 말.
그런데.
“얘, 뭐라는 거냐?”
“히끅!”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말이 너무 고매해서인지, 설휘라는 노인은 그 뜻을 도통 알아먹지 못했다.
이 무식함에 자신은 고사하고 상대마저 어이가 없어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상황.
취곤은 반쯤 얼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분은 주태직이라고…… 왕자의 셋째가 됩니다.”
“아? 이곳의 주인이구만.”
그제야 설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서평왕 옆에 있던 정주(正株), 금의위 위관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무림인이라도, 왕족과 황족 앞에서는 일개 촌민에 불과하다.
그래서 관인들은 전통적으로 강호인과 사이가 좋지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호인들은 대개 작위도 직위도 갖지 못한 무식한 것들이다. 그런 주제에 한 지방의 패주니 주인이니 하는 말을 주워섬긴다.
이것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수시로 서로 싸움이나 벌여대며 애꿎은 양민들까지 수탈한다.
우드득!
관리의 입장에서 강호인이란, 치안을 어지럽히는 잡것들일 뿐이었다.
기분 같아서는 단매에 쳐 죽이고 싶지만, 서평왕이 먼저 대화를 건넨 상황이기에 감히 끼어들지 못할 뿐.
“그렇소. 내가 여기의 주인이오. 이제 내 질문에 답을 해줬으면 하오만?”
“아, 나는……. 음…….”
설휘는 잠깐 고민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오늘 말고는 볼 사이도 아닌데, 굳이 통성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거치적거리지 말고, 그만 비켜.”
“……!”
“……!”
순간 주태직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옆에 있던 금의위 정주의 얼굴이 일그러진 건 물론이고, 설휘 뒤에 있던 취곤까지 몸이 얼어붙어버렸다.
‘아, 아무리 모른다지만…….’
앞으로 볼 사이도 아닌데 그냥 비키라고? 도둑놈 주제에 왕부의 주인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건방짐을 넘어서 목이 날아가도 모자라지 않을, 모욕감을 불러일으키는 대답이다.
“자, 가자꾸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설휘는 취곤에게 손짓하며 먼저 걸어 나갔다.
좌우로 시립된 무사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왕과 금의위. 그리고 바로 한 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왕부호위무사사.
“어, 어…….”
취곤은 그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엉거주춤 설휘를 따라갔다.
마음이야 눈물을 좍좍 뽑는 심정이었지만, 여기서 그를 따라가지 않으면 당장 설휘 대신에 자신이 녹신녹신하게 다져질 터.
“……재밌군, 이거.”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주태직은 어이없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감히 잡도둑 주제에, 눈앞의 이 많은 인원을 지나쳐 정말로 이곳을 나가겠다고?
감히 왕을 대하는 예의를 모르는 무식한 놈이라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누구 앞에서도 호쾌하고 당당하다고 찬사를 보내야 할지 모를 심경.
“전하. 명령만 내리시옵소서.”
으드득.
금의위 위관 정주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 목을 뽑아버리겠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주태직은 그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고, 손을 들었다.
스윽. 지이이이익.
신호를 받은 궁수 수십 명이 일제히 방향을 설휘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고, 이내 왕이 손을 내리자 그들은 활시위를 놓았다.
패애애애액!
일시에 머리 위로 수십 발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동시에 그걸 보던 취곤은 당장 기겁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였다.
사아아아아---
뚝.
허나, 화살이 날아가다 말고 거짓말처럼 멈췄다.
“어? 어어?”
허공에 멈춘 화살의 비. 상식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 궁수들이 일제히 당황했고, 왕과 금의위도 영문을 모른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철컥. 철컥.
믿기지 않는 현상은 또 있었다. 기립해 있던 병사들의 칼이 제멋대로 뽑혔다.
챙!
“억!”
“으악!”
슈슈슈슈슛!
앞으로 튀어나간 검은 이내 다시 방향을 틀었고, 자신들의 주인을 향해 있었다.
“……!!!”
서평왕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손 한 번 까닥하는 것으로 화살의 소나기가 멈추고, 수백 장병의 검이 저절로 뽑혀 그들을 겨누다니.
“…….”
“…….”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막 검을 뽑아 달려가려던 금의위 위관도 엉거주춤 서 있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크게 울릴 침묵 속에서, 몸을 돌린 설휘는 왕이라고 불리는 그에게 말했다.
“한 지방의 왕이시라니, 뭐. 자존심이 높은 건 이해하네만. 그 자존심이 수하들의 목숨보다 더 중한가?”
“…….”
“네, 네놈은 도적놈 주제에 무슨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냐!”
서평왕이 차마 말을 못 하는 사이, 금의위 정주가 간신히 힘을 다해 소리 질렀다.
고작 자기 자존심 때문에 군병을 죽음에 몰아넣는 것은, 분명 군주로서 자격 부족이다.
허나, 창고에 둔 보물을 빼앗기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그냥 물러서는 건, 모자란 군주가 아니라 그냥 멍텅구리 호구나 할 짓 아닌가.
“도적놈이라. 뭐, 그건 그렇지. 하지만 우습구만. 도적이 도적더러 도적이라 하는 것도.”
“뭐, 뭣이라?”
“녹봉을 받는 관리라면 어련히 알 일 아닌가. 관인이 인형설삼을 구했으면, 본래 그게 어디로 가야 할 노릇이던가?”
“……!!!”
북경.
세상에 귀한 영약, 몸에 좋은 것이 있으면 응당 자금성으로 가서 천자에게 상신하는 것이 국법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천자에게 갔어야 할 영약이 서평왕의 창고에 고이 숙성되고 있었다. 이는 무슨 뜻인가.
오십보백보다.
어차피 황제에게 올려야 할 귀한 영약을 중간에서 빼돌린 서평왕과 그를 위하는 문무관료의 협잡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와중에 칠성표국. 애먼 표국 하나가 산산이 분해된 것 또한 억울한 희생자를 만든 것이고.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인형설삼. 이런 식으로 법제를 시켜놓은 이유가 무엇인가.”
설휘는 거기서 한 번 더 물었다.
애초에 그는 사람의 손길 자체가 닿지 않은 영약을 바랐다.
영물이 가진 부작용이 있건 없건 그조차도 강력한 기운의 부산물이라, 그릇이 충분히 넓은 무인이 섭취하면 큰 상관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환단처럼 범인도 먹고 문제가 없을 정도로 가공을 하는 것은…… 부담은 없겠지만 그 대신 효능이 조금 떨어질 것이 아닌가. 약간 손해를 본 느낌이었다.
“……누가 먹든, 네놈이 무슨 상관인가?”
금의위, 정주가 힘들게 외쳤다.
스윽.
설휘는 거기서 고개를 돌려 서평왕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눈. 백태가 끼고 실핏줄이 몇 터져 나간 불그스름한 흰 자를.
“당금의 주군이 가진 병마를 치료하고자 함이었나?”
“……귀, 귀하가 어찌?”
정주가 흠칫했다.
서평왕이 가진 질환은 황반 변성이라 불리는 것.
눈에 백태가 끼고, 혈관에 출혈이 일어나며, 종국에는 영영 시각을 상실하는 끔찍한 질병이었다.
어지간한 약과 의원으로는 상세를 늦출 뿐 완쾌시킬 수가 없어, 영약 중의 영약이라는 인형설삼을 구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 부작용 없이 흡수할 수 있게 조화를 맞춘 단환으로 만든 것이고.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야. 저건 흔히…… 당뇨라 불리는 병의 부작용이다.”
“……당뇨?”
“그래. 췌장이 기능을 상실해 감에 따라, 목 아래의 갑상선이 기능 항진을 일으켜 대사질환……. 아니, 들어도 모르겠군. 나도 의문의 맥을 이은 적은 없어서 설명은 못 하겠다만……. 그냥 그런 게 있다. 어쨌든.”
스윽. 툭툭.
혼자서 영문 모를 소리를 한 노인. 설휘는 자기 가슴팍을 두들겨 보이고, 다음으로 서평왕을 가리켰다.
“정리하자면, 저 귀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인형설삼을 가져와 환단을 만들었다는 게지? 그걸 내가 가져가려니 너희들이 목숨 걸고 막는 거고?”
“……서평왕이시오. 좀 과하게 단순하게 한 말이지만, 어쨌든 그렇소. 고인께서 말씀하시는 바대로요.”
“그래. 그럼 내가 저 사람. 아니. 서평왕의 병을 고쳐준다면, 이 영약을 가져간다 해도 문제는 없지? 아니 그런가?”
“…….”
정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 미친 신선(그가 보기에는) 말대로, 정말로 서평왕의 천형이 벗겨진다면, 굳이 섭취하고 몸을 보전해야 할 영약 환단 따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
뭐, 의원들의 말로는 인형설삼의 효과는 건강에 그치지 않고 약간의 내공. 강호 무인들이 쓴다는 기공의 숙련도가 늘어나는 부가 효과가 있다지만…….
“가능……하시겠소?”
그따위야 아무려면 어떤가. 칼 들고 시정을 어지럽히는 자들의 힘 따위, 애초의 목표와는 상관없는데.
어차피 서평왕. 자애롭고 진중한 서평왕부의 주인이 건강만 찾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혹 거짓으로 모면하는 거라면…….”
“어쩌게?”
“…….”
그러게. 어쩔 것인가. 지금 이렇게 수백 병사들로 둘러싸 놓고도 아무런 위협도 주지 못하는데.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고민하는 정주 앞에서 노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취곤을 보았다.
그러고는 금의위를 향해 다시 말을 걸었다.
“잠시, 자리를 물러 주겠나?”
***
“어휴…….”
취곤은 나무 그늘 아래 푹 늘어져 있었다.
잠깐 서평왕과 면담을 가지겠다고 한 노인은 한 시진째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그동안 취곤은 꽤나 깊게 고민을 해 보았다.
‘저 노인네, 정말 신선일까?’
왕부에 사로잡혔을 때는 영락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저들의 화살이 멈추고, 병기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기현상을 보였다.
이 정도면 삼국지연의에 나온, 장각 삼형제나 보일 수 있는 도술의 영역이 아닌가.
이게 다가 아니다. 서평왕에게 직접 다가가 보였던 의술. 치유를 받던 서평왕의 얼굴에는 말도 못 할 환희가 스며들어 있었다.
사람이 그 정도에 감정에 쌓인 표정은 그로서도 처음 경험한 일이었다.
정말로 오랜 질병이 사그라드는 순간 보일 수 있는, 환자만의 표정이었다.
“그럼, 그 사람이 신선이면 난 신선과 함께 있는 건가?!”
그 생각에 취곤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러다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팔자 좋은 사람 여기 있네. 염병…….”
지금 자신은 무림맹의 척살령을 받아 든 처지이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맹주의 아들을 죽인 혐의로.
그나마 객잔에서 벌인 발연기 때문인지. 살인자는 취곤 본인에서 노인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참고자로 한 번은 무림맹에 출두해서 취조를 받아야 했다.
아무리 공명정대를 외치는 무림맹이라 하더라도, 사건이 사건인 만큼 취곤의 손톱 발톱은 멀쩡하지 못하리라.
“어르신께 말씀드려봐야겠다. 어? 오시는군.”
멀리서 보이는 한 점.
그리고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점이 점차 주먹만 해지는 것이 필시 설휘였다.
“여어.”
“일은 잘되셨습니까.”
설휘가 도착하며 인사하자 취곤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당연히 설휘는 그 모습에 의아해서 물었다.
“얼굴이 왜 그러느냐?
“그것이…….”
취곤은 대충 사정을 얘기했다. 그러자 설휘는 정말로 뜬금없는 소리를 꺼냈다.
“아, 그거라면 걱정 마라. 맹주 놈의 아들은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예?”
“제 아비 믿고 객잔에서 아무에게나 행패를 부리지 뭐냐. 하도 버릇이 없어서 좀 고쳐주려고 팼지. 그리고 사람을 시켜서 며칠만 맡아 달라고 놔뒀는데……. 지금쯤이면 이미 집으로 돌아갔을걸?”
“예에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