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대환단 (1)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단다.
저 무림맹주의 아들이!
“으아아아…….”
취곤은 긴장이 풀려, 풀썩 땅에 주저앉았다.
척살령. 그것도 자그마치 무림맹에서 내린 척살령 때문에, 그간 얼마나 고초를 겪었던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 한 끼 시전에서 사 먹지도 못했다. 계속해서 도망 다니며 공포에 떨어야 했던 설움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게 이제 끝이다.
이 눈앞의 노신선 덕분에 모든 게…….
“어……?”
“왜 그러나?”
“아니. 잠시. 잠깐만요.”
취곤은 거기서 얼핏,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노신선과 서평왕의 인형설삼이야 어쨌건, 자기가 이번 일에 휘말리게 된 까닭은.
“아니, 그럼 저는 왜 이 고생을 한 겁니까?”
다름 아닌 피 묻은 보검.
어느 날 머리맡에 덜렁 놓여있었던 그 검, 맹주의 아들이 찼었던 검 때문 아닌가.
무인이 애검을 내버리고 다닐 리 없고, 그래서 엄한 취곤이 누명을 쓰게 되고 심지어 척살령까지 내려졌다. 그런데 그 맹주의 아들이.
실은 죽은 게 아니라 멀쩡히 살아 있었다고?
눈앞의 노신선이 버릇없어서 그냥 몇 대 패주고 가둬뒀다고? 그럼 그 피 묻은 보검은?
“……혹시, 어르신……. 어르신이 그러신 겁니까?”
“그랬지.”
“아니, 왜요!!! 제가 뭔 잘못을 했다고……!”
“정말로 잘못한 것 없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
갑자기 삼엄하게 변한 설휘의 얼굴. 그에 취곤은 뭔가 섬뜩해져서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아니, 그……. 제 업이라는 게, 좀…….”
“죽은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유품, 혹은 멀쩡히 가지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도둑맞은 귀물. 그런 것들이 장물이지.”
“……옙.”
“물건의 소유자를 뻔히 알면서도 그냥 좋은 값을 쳐주는 곳에 냅다 팔기만 했던 게, 그러면서 이익을 보는 게 자네 일 아니었나. 자네가 그리 큰돈을 모으는 동안 억울하게 누명 쓰고 도망 다니다가, 혹여는 죽는 이들이 몇이나 되었을 것 같은가.”
“…….”
그런 거 일일이 세어가며 어찌 일을 합니까요, 하는 소리가 취곤의 목까지 올라왔다.
물론 목까지다.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여기서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대가리가 깨지리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으니까.
“그…… 혹시, 서평왕은.”
말을 돌릴 겸, 의문도 해소할 겸. 취곤은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 작자가 왜?”
“정말로 병이 치유된 것입니까? 영약 없이도요? 아니 그럼 어르신은 엄청난 포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그마치 왕을 낫게 하신 것인데.”
“……너무 눈에 빤히 보이는구나. 이놈.”
끌끌끌.
설휘는 혀를 찼다.
혼날 것 같으니 일단 관심을 돌리려는 수작질. 그게 너무 뻔히 보였다. 하지만 이 또한 그와 연관이 있으니 말을 하기는 해야 했다.
“아무리 왕이라 해도 도~통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더구나. 도적놈에게는.”
“도, 도, 도적놈이요……?!”
“신하된 몸으로 천자에게 상신해야 할 걸 제 것으로 빼돌린 거야 이해한다. 제 놈도 군왕이고, 살고 싶었을 테니. 허나, 영물을 엄한 곳으로 빼돌리려고 애꿎은 칠성표국을 부숴버렸지.”
“아…….”
그 사건에 휘말린 자들은 억울하게 죽었다. 심지어 그 남은 세력들까지 전부 도륙냈다.
아무리 군주의 덕은 무치라 하는 말이 있다 쳐도, 굳이 그런 사람 앞에 예의를 갖출 마음이 없었다는 말.
“확실히…… 칠성표국은 이번 일에서 온전히 피해자군요.”
“그래. 그러니 나한테 줄 포상이 있거든, 그들의 유가족들에게 주라고 했다.”
“그게 제대로 될까요?”
취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왕의 포상을 거절한 것만 해도 큰 무례다. 자칫 그것만으로도 오라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설휘 같은 미친(?) 듯이 강한 고수에게 그러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 재물을 피해자에게 돌려주는 경우는, 어느 덕 높은 군왕이라도 보기 힘들다.
모름지기 중원의 군왕들은 위엄을 잃는 것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이다.
“제대로 안 되겠지. 그러니 네가 살펴라.”
“어, 어르신! 미치……. 아니, 저더러 죽으란 말씀입니까?!!!”
설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취곤은 거의 경기를 일으켰다.
결과가 좋게 끝나서 망정이지, 서평왕이 기군망상(欺君罔上)의 죄를 들어 설휘는 물론이고 자신까지 싹 잡아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애초에 사연이 뭐가 얽혔건, 한 지방의 왕부의 창고를 털었고, 그걸 들켰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설휘의 옆에 있었고. 그런데 뭐?
이제 와서 서평왕에게 자신의 찜찜한 약점을 알고 있는 껄끄러운 가시가 되어서, 그 눈 밑에 콕 박히라고? 이건 뭐 그냥 나가 죽으라는 소리나 진배없지 않은가.
“뭐 문제가 있느냐? 큰 도둑놈의 일을, 작은 도둑놈이 성실히 돕는 형국이 될 터인데.”
“서평왕입니다! 당장 절 죽일 겁니다! 뭔 말을 꺼내기도 전에요!”
“그 뒤로 잠자리가 뒤숭숭해지게 되겠지. 서평도적왕이 말이야. 그치는 나에게 제법 겁을 먹었으니, 네가 말만 잘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일이다.”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설휘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장 수백의 병사들을 눈앞에 두고도, 오히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노신선. 아니 강호의 노고수다.
그러니 서평왕도 마음은 불편할지언정 나름 조심은 할 터였다. 언제 취곤이 겪었던 것처럼 머리맡에 칼 하나 푹 박아 놓고 갈지 모르니까.
“재원은요?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지만, 칠성표국 사건의 관련자들에게 합당한 보상금을 내주려면 그게 돈이 한두 푼이 아닐 텐데…….”
“그러니까 다름 아닌 네놈의 재주가 필요한 것이다. 어차피 왕부나 관리들은 무림인들을 일부러 무시하는 것들 아니더냐?”
“……예?”
갑자기 이게 또 무슨 말인가. 관과 무림이 서로 관여하지 않는 것이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자신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스윽. 툭툭.
의아해하는 취곤에게, 설휘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받아들고 보니 척 봐도 무공서. 그런데, 표지에 적혀있는 이름이란 것들이…….
<혈마수>, <태극권요해>, <매화검법>.
총 3권의 무공 비급. 그걸 보고 취곤은 잠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 어르신? 이건…… 여기 마(魔)라고 적힌 글자대로라면…….”
“그래, 마교의 무공이다.”
“……!!!”
그는 입을 틀어막고 경악했다.
마교. 수십 년 전 화산파와 함께 세상을 한번 집어삼키려 했던 무력 집단.
그들 스스로 자중지란하지 않았다면, 분명 강호는 그들 것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태극권요해와 매화검법. 이 두 무공은 뭔가. 자그마치 구대문파인 무당과 화산의 무공 아닌가.
“이, 이걸 어떻게 하라고요? 저 같은 놈이.”
“어쩌긴? 장물아비가 장물을 받았으면 팔아넘기는 것 아니더냐?”
“아, 아니. 그랬다간…….”
“그리고 무림인들이 뭐라고 노성을 지르건, 그런 걸 듣고도 귀를 막는 서평왕을 끼고 있지.”
“……?!”
“너도 무사할 게고, 그치도 큰돈을 벌 수 있겠지. 평소에 싫어하는 무림인들에게 골탕을 먹이는 일이니, 외면하지 않고 네 판매를 도울 게다. 서로서로 좋을 것 아니냐.”
규모가 보통이 아니다. 여기까지 내다보고 이런 것들을 계획했단 말인가.
취곤은 잠시, 이걸 거부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미 왕이라는, 혹은 무림인들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처지.
내리면 잡아먹힌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정신 바짝 차리고 해야 했다. 그래야 한 가닥 살길이 열리고.
“평생 발 뻗고 잠자기는 글린 생이군요. 젠장할.”
“그럼 죄짓고 평생 편히 잘 생각이었더냐?”
“……말을 맙죠. 알겠습니다. 어르신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지요. 그래서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이십니까?”
툭툭.
취곤은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걸 한숨으로 토해냈다. 제발. 여기서 다른 일이 더 얹히지만 않기를.
“달려오시던 방향이 왕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시던데…….”
“아, 그거.”
설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말해도 모를 것이야. 원래 인형설삼 같은 매우 귀한 영약은 확실히 숨겨 놓아야, 다음 생에서 찾을 수 있거든.”
“……다음 생요?”
또다시 나타난 상식을 벗어나는 대답.
취곤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듯 허탈한 기분으로 들었고, 설휘는 말 상대라도 필요했던 듯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래. 시스템에서 벗어나면 도구함이 사라지거든. 그래서 미리 꿍쳐 놓아야 하는 법이지.”
“……아, 그렇군요.”
사실 취곤이 이해하는 건 상관없었다. 어쩔 건가. 눈앞의 노인은 분명 인간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존재라 여겨졌으니까.
“하여튼, 이번 생은 대충 이 정도로 마무리하면 되겠군. 슬슬 황천길이 보이는 듯도 하고.”
“……어르신, 황천길이라니요? 어떤 이유로 죽는 겁니까?”
“아니,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수명이 다 된 거지.”
“그런 것도 알 수 있으신 겁니까?”
“그래. 강제적으로 더 잡아둘 순 있지만, 그건 의미가 없지. 모쪼록 다음 생에서는 좋게 보도록 하자.”
“하하……. 어르신은 다음 생에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악담인지 덕담인지 모를 말. 취곤은 반쯤 머리가 휑- 해진 기분으로 되는대로 내뱉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왔다.
“난, 먼저 도문을 수행할까 한다.”
“도문이요?”
“그래. 아직 나 역시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엔 많이 부족하다. 마공에 대해서는 수많은 선조의 깨달음, 그만한 비급이 존재했지만 정종무공은 아니거든. 해서 수많은 사상가가 남긴 말들, 혹은 깨달음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하려고 해. 마침 시스템에 벗어나 있으니 더없이 좋은 조건이고.”
“……무운을 빕니다. 어르신이라면 잘 해내실 겁니다.”
취곤은 노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대부분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입에 발린 말 한마디 정도는 했다.
그리고 왠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느껴지기도 했고.
“그럼 가마. 다음 생에 보자.”
“예, 어르신.”
노인의 말에 취곤은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구부리며 인사했다.
품속은 두둑했다. 이게 가짜가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얘길 잠시 주고받은 것에 대해 큰 소득을 올렸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 어르신?”
공중을 밟고 허공으로 올라가는 어르신.
그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련하더니, 점차로 눈부시게, 마지막에는 실명할 것처럼 강렬한 빛들이 밝고 찬란하게 눈앞을 수놓더니 서서히 사라졌고.
“……어어?”
노인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에 취곤은 눈을 몇 번이고 껌뻑거렸다.
그에겐 이 상황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
[도구함]
<귀한 영약>
음양생사과(陰陽生死果), 장생신과(長生神果), 태양어란(太陽魚卵), 천지설엽초(天地雪葉草), 능라영수초(凌羅靈水草), 만년빙화(萬年氷花). 구색열화내단(九色熱火內丹)
<절대영약>
[만년자령초] [공청석유] [인형설삼(개량)New!]
“흠.”
한편, 설휘는 새로 추가된 영약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원하던 영약을 거의 다 손에 넣은 것이다.
총 세 개의 목숨.
절대영약을 구하면서 소비한 목숨의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