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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뮬레이션-359화 (338/379)

359화. 대환단 (2)

그동안 설휘가 영약을 모으는 와중에 발견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일반적인 영약과는 궤를 달리하는 영약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건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가, 도구함에 넣었을 때 표시가 떠서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절대영약.

이름부터 알 수 있듯이, 다른 영약보다 효과가 탁월하게 뛰어나다.

기운을 내공으로 치환할 경우, 다른 영약들이 평균 반 갑자의 내공을 보태준다면, 절대 영약은 일 갑자 혹은 그 이상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이름값을 한다고 할까. 이런 절대영약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숨겨지기도 깊숙이 숨겨져 있지만, 손에 넣으려면 물리적인 시간도 꽤 필요한 것이다.

당장 이번에 얻은 인형설삼만 해도, 세상에 드러나는 시기가 90년 후.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때로부터 거의 한 세기를 지나야 단서나마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생에서 장물아비 취곤을 만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 과정에서 설휘는 자신이 사라진 후 미래의 중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목격했다.

먼저 화산파의 독주.

마교가 화산파와 은밀한 협약을 유지하며, 중원은 결국 화산파가 천하제일문으로 올라선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쌓은 업보가 너무 많아서였을까.

채 10년도 되기 전에 무림맹에서는 분열이 일어난다. 화산파의 독선에, 구대문파는 물론이고 오대세가까지 들고일어난 것이다.

이후, 강호 각지에서 큰 싸움이 벌어진다.

자중지란과 이합집산을 계속하던 중에, 그 틈을 비집은 마교의 중원 입성.

그제야 정신을 차린 중원의 모든 정사문파가 합심해, 마교도들과 피를 피로 씻는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기를 다시 10년.

중원의 난장판을 보다 못해 그간 세속과 연을 끊고 있던 은거기인들. 진작에 죽은 줄 알았던 정파의 전대 고수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그중에는 현경-소문일 뿐이라 실제로 현경에 달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혹은 최소 화경의 극에 달한 원로 고수들도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마인들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물러났고, 중원은 수많은 피를 흘리고 나서야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그리고 무림맹의 지형이 변했다.

그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대표되던 기득권들. 예전이라면 적당히 손실을 피하며, 큰 싸움에서는 소극적으로 나서던 이들이다.

허나 그들도 이 전쟁에서만큼은 기둥뿌리가 뽑힐 정도로 전력을 다해야했다. 다름 아닌 은거고수들의 일갈 때문이었다.

-이 새파란 놈들이 어디서 뒷수작이야! 눈앞에 마교천하가 펼쳐지는 꼴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같잖은 정치질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대승적으로 협력하라고! 이 새파란 놈들아!

이미 진작에 돌아가신 줄 알았던 사문의 어르신들. 전대, 혹은 전전대의 장로와 장문인들.

현 구대문파 장문인들의 사부이거나 그 정도 배분의 인물들이 호통을 치니, 그간 정파에서 이름 좀 날렸던 거대문파들은 그 이름만큼의 역할을 해야 했다.

그렇게 마교와 동귀어진하다시피, 구대문파가 온 힘을 쏟아내고 난 후…….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구대문파라는 늙은 호랑이가 마룡과 건곤일척을 겨룬 후 중상으로 앓아누웠다.

뒤이어 신생 중소문파들의 약진이 이어졌다.

강호라는 호수 바닥에 깔려 있던 온갖 것들이, 정마대전이라는 태풍을 만나 수면으로 솟구친 것이다.

실전되었던 비급, 전설로만 들리던 영약들.

기존의 질서가 재편되는 그 혼란의 시기를 틈타, 설휘는 강호에 존재하는 최고의 절대영약들을 얻었다.

만년자령초와 공청석유와 인형설삼까지.

그리고 이제는 오직 하나. 소림에 침입하여 대환단을 훔치는 일만 남았다.

‘도구함은 열 수 없으니, 무조건 훔쳐 와야 한다.’

설휘가 절대영약을 구하면서 알게 된 또 하나의 불편사항.

그건 시스템을 빠져나오면서 도구함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귀한 것들은 숨겨놓았다가 다음 생으로 넘겼고,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숨겨놓았다가 다음 생에 이것들을 도구함에 넣은 뒤 시스템에서 빠져나오는 방식을 썼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기를 놓치면 사라지는 영약도 있었기에.

이미 강호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고를 다 알고 있는 설휘조차, 목숨을 세 번이나 날리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이번 생은…….’

소림에 들러야 한다.

설휘의 시간으로는 무사수행을 핑계로 마교를 빠져나온 지 어언 20년.

정마대전의 승리. 간신히 마교인들을 몰아내긴 했지만, 피투성이의 승리였다. 구파일방은 죄다 세력의 반 이상을 잃고, 무수한 동도들의 죽음을 겪었다.

그렇게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천하의 소림조차 문을 열고 사람들을 모으던 때.

설휘는 이때를 노리고 준비하며 기다렸다.

자그마치 20년을.

***

똑. 똑. 똑.

이른 새벽에 짧게 지나간 소나기. 오래된 기와 밑으로 물방울이 한두 방울씩 흘러내렸다.

주르륵. 퉁. 주르륵. 퉁.

건물 사이에는 임시로 만든 대나무 죽통을 타고 냇가로 이동했다.

청정의 소리가 퍼지는 이른 아침.

오옴. 자바자바 못지야…….

승려들은 열을 맞춰 앉아 책자를 펼치고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지나가는 한 고승. 손에 쥐어진 굵은 죽비가 자못 눈길을 끌었다.

“이처세불구무난 세무난칙교사필기(二處世不求無難 世無難則驕奢必起)…….”

승각기(僧脚崎)와 가사를 입고, 아침부터 동자승들을 가르치는 이의 법명은 종월(宗月).

본래 제자들의 규율을 담당하는 계율원주(戒律院主)였지만, 때때로 교육까지 겸하고 있었다.

“무슨 뜻이냐?”

종월이 묻자 이제 막 약관에 접어들었을 것 같은 승려가 반장을 하며 대답했다.

“세상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교만하고 사치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래. 맞다. 세상도 이와 같다. 우리가 지금 익히고 있는 보왕삼매론은 옛 선사들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종월대사는 흡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넓게 보면 생활의 지혜이며 좁게 보면 자기 관리에 대한 것.”

그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고, 힘을 주었다.

“항상 마음속에 기억해 두거라.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그리고 그것이 인생임을. 알겠느냐?”

“아미타불.”

“아미타불.”

배움에 힘쓰는 승려들의 일관된 대답.

계율원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음 서책의 다음 장을 펼칠 때였다.

“저, 원주님.”

처마 밑에서 조심히 그를 부르는 한 노승. 그는 수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종월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분이 오셨다고 합니다. 벽사항마검.”

“아!”

이번에 불가로 귀의한 중년의 무인이다.

계율원주는 서책을 한쪽에 올려두고, 가르치던 미래의 동량들에게 한 시진 정도의 자습을 명했다.

“빨리 가십시다. 그분을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그렇게 그는 노승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공부하며 빠져있었기에 따로 외인을 만날 시간이 없었던 그로서는, 이번이 좋은 기회라 생각되었다.

하압. 하!

본전으로 들어서자, 아침부터 수련에 열중하는 승려들이 보였다. 그리고 상석과 조금 떨어진 경내의 한 소나무 아래.

한 사람이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사나운 기도를 가진.

한 자루 잘 벼려진 검과 같은 사내가.

자박자박. 자박자박.

어느새 나오셨는지 소림의 방장께서도, 그리고 저 무사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소림의 신승 종연도 함께 자리했다.

“아, 오셨습니까. 계율원주.”

“방장님을 뵙습니다.”

버선발로 달려온 방장에게, 종월은 한 손으로 예를 표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님에게 시선을 돌렸다.

평범한 행색에 평범한 옷차림. 죽립을 벗자 드러나는 시원한 이목구비.

“설휘라고 합니다. 소림의 계율원주를 뵙습니다.”

“오.”

멀리서 보기엔 평범한 듯하나, 가까이서 보면 서릿발 같은 기도가 새어 나왔다.

종월은 한 손으로 반장을 하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아미타불. 소림의 종월이 벽사항마검을 뵙습니다.”

“그저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너무 과한 칭호이오니.”

“허허. 아닙니다, 아니에요. 실로 어울리는 별호입니다.”

상대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기에, 종월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실력을 갖춘 강자가 겸손함까지 보이기란 쉽지 않은 것이기에.

“설 대협. 소림신승이 위기에 빠졌을 때 협행을 보여주신 그때의 일, 그리고 정전대사(靜全大師)의 진전을 이으신 것을, 소림사의 사람이라면 이미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연이 닿았고,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 소림 방장은 말했다.

“그럼 마지막 배웅은 그토록 보고 싶다던 원주께서 함께 하시게나.”

“아…… 감사합니다.”

귀인께서 며칠 머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계월원주 종월은 손님으로 온 설 대협을 향해 말을 걸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

본전에서 배웅 나가는 거리까지는 대략 일 각 정도.

강호를 격동시켰던 손님과의 만남치고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상대는 자그마치 현 강호의 천하 사대고수 중 한 명.

20년 전 정마대전이 한창일 때에 엄청난 활약을 보이고, 싸움이 끝난 뒤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이제야 모습을 보인 인물.

바로 설휘였다.

“그나저나…… 소림을 어떤 이유로 찾아주셨습니까?”

“예. 소림신승께서 워낙 부탁을 하시기에, 한번 뵙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이곳을 지나가는 일이 있어서요.”

“그렇습니까. 노답은 강호에 도는 소문을 잘 믿지 않은 편이지만, 소림신승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엄청난 신위를 보이셨다고요?”

슬그머니 묻자, 상대가 한숨을 쉬었다.

“아직 한참 모자랍니다. 무인이라면 더 깊고 잔잔한 흐름을 따라야 할진대, 저는 아직 제 기도를 다스리는 데도 어렵습니다.”

“허허. 반박귀진을 논하십니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보시지요. 숲이 하염없이 적막하지 않습니까.”

스윽.

설휘가 산문으로 내려가는 중에 좌우의 숲을 가리켰다.

새 소리 하나 없다. 벌레조차 숨을 죽이고 있다. 숲을 지나가는 광포한 검수의 기도에, 죄다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실로 대단하십니다. 대협의 기도가 산천을 떨어 울리지 않습니까.”

“……덕분에 어디를 가도 표가 나니 세상만사가 피곤할 따름입니다.”

“하하, 그게 또 그렇군요. 왜 정마대전이 승리로 끝난 후에 홀연히 자취를 감추셨나 했더니.”

타고난 기도 때문에, 너무 시선이 이끌리는 체질이라는 것이다. 종월은 간밤에도 왠지 오싹오싹했던 그의 기도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몇 마디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고, 이내 산문 앞까지 다다랐다.

“앞으로도 또 오실 생각이십니까?”

“아니요. 이쯤이면 됐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더는 발길을 할 이유가 없지요.”

“허허. 아쉽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모르는 법. 다음 생에 따로 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 생이라……. 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부처의 깨달음이 담긴 말씀이십니다.”

설휘의 다음 생이라는 말을 종월은 그리 해석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그렇게 보내는 그의 표정을 보며 설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산문 아래까지 내려왔을 때쯤.

설휘는 길게 한숨 쉬었다.

“됐구나. 어휴, 정말.”

파즈즉.

그리고 새파랗게 날선 검 같던 그의 기도가 줄어들었다.

반박귀진.

비범함의 극을 넘어서서, 평범하게 보이는 경지.

종월이 말한 경지에, 그는 이미 올라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러 평시에 맹렬하게 기도를 피워 올린 까닭은, 이번의 침투. 그걸 위해서였다.

“네 개째. 이걸로 다 되었나…….”

강렬한 기도는 어디까지나 시선의 혼란. 모두가 설휘가 처소에 있다고 여기게 만든 후, 그는 은밀히 잠입하여 소림의 대환단을 훔쳐냈다.

이로써 마지막 조각을 겨우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자그마치 이십몇 년을 공을 들인 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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