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뮬레이션-363화 (342/379)

363화. 도문 수행의 첫 문파 (4)

청성산의 우섬봉(宇陝峰).

풍경은 그저 그렇지만, 산문 입구로부터 청성의 상청궁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한눈에 담기는 곳이었다.

평소에 마음이 복잡할 때 자주 찾던 곳에서 설휘는 몇 시진이고 혼자 앉아 있었다.

“그래, 스스로 기준을 세워 본 것이 맞다. 그중 정말 떼어 내서 걸러야 할 것들도 있었겠지만…….”

청성의 무예에 맹목적이지 못했던 것.

그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설휘는 이미 전생에 높은 경지에 다다랐던 적이 있었기에 웬만한 무공들은 한 번만 훑어봐도 부족한 점을 알 수 있었다.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하며 때론 억척스러운 고집들이 깃든 초식들을.

“처음부터 청성의 무공을 낮게 재단한 거야. 전생이란 특별한 경험이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발목을 잡은 형국이고.”

조금 과하게 표현하면 이는 종교 같은 것이다.

불가에 이르기를, 길을 가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한다.

이는 맹목적인 믿음이 스스로를 망가지게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이미 산을 중턱 이상 넘어선 다음에 비로소 할 수 있는 말이다.

청성 또한 그 뿌리는 도교의 일파.

청성을 알기 위해선 그들의 행동과 습관을 따라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화(同化)가 첫 번째였다.

맹목적인 믿음은 분명 비틀림을 낳으나, 그런 맹목적인 믿음을 한반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로서는, 머리로 지식적으로 알되, 가슴이 뜨거워지는 법열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스륵.

순간, 설휘의 모습이 우섬봉에서 사라졌다.

차악.

검을 들어 가볍게 파지한다.

픽.

가벼운 찌르기. 다음으로 유려하게 펼쳐지는 베기.

스윽. 스으윽 스윽.

설휘는 청풍검범의 원초를 다시 복기했다.

본래 이것은 십이 초식으로 이루어진 검법이다.

설휘는 여기서 비효율적이라 판단했던 네 초식을 빼고, 사부의 조언과 본인이 개량한 두 초식을 넣어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경전에 수록되어 있던 원본.

초기의 청풍검법의 동작을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스윽.

“정신을…….”

원전의 청풍검법을 펼치기 전, 설휘는 다시 한번 집중했다.

초식에 사감을 넣지 않기로.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서 뭔가를 접하는 마음.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처럼, 초식이 일러주는 방향을 백지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로 노력하기로.

스윽. 쉬이익. 휘릭!

그렇게 검무가 시작되었다.

검의 방향을 몸으로 가리며, 차분하게 적의 공격을 기다리는 동작.

그리고 상대의 검을 예상해 보폭을 안전하게 뒤쪽으로 움직이며 검을 내리치거나, 빈틈이 보이는 찌르는 동작까지.

치익.

그리고 세 번째부터 나타나는 검식까지.

설휘는 과거 이 부분을 문제로 여겼다.

청성파의 무인들은 품이 낙낙한 도복을 입는다. 때문에 격하고 빠른 동작을 취할 때면, 도복의 자락이 몸에 달라붙어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이다.

청풍검의 원래 동작은, 여기서 긴 도포자락을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잡는다.

상대의 검을 바라보면서, 검을 쥔 쪽의 시야. 가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베거나 찌르기를 준비하는 자세가 되는 것이다.

예전에 설휘는, 이 초식에서 도포 자락을 집어 드는 동작을 빼버렸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이른바 정파 특유의 ‘겉멋’을 강조하는 동작이라고 여겼기에.

스으윽.

하지만 지금은 일부러 예전의 원전을 바탕으로 몸을 움직였다.

선입견 없이, 내 사부의 사부가 그러했듯이 아무런 비판을 가지지 않고 철저히 수긍하는 마음으로.

그러면서 최대한 진지하게 펼쳤다.

도포자락이 몸에 엉겨 붙어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계속, 다시 한번, 마음에 들 때까지 수십 번의 반복.

‘가만…….’

그렇게 사 초식으로 연계하기 전, 설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묘한 기분.

하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 그리고 무학에 도움이 되는지는 제대로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삼 초식에서 사 초식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다시 한번 시도했다.

스윽. 휙!

또다시 한번.

스윽. 휙!

그렇게 몇 번, 아니, 몇백 번의 동작을 취했을까.

어느새 이마에 땀이 흥건한 설휘가 짧게 신음했다.

이렇게 불편한 동작 안에 숨겨진 있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알아챈 것이다.

“아.”

도복을 잡고 위로 드는 행위.

이건 단순히 격식을 차린 동작이 아니라는 것을.

예전의 설휘는 이 무공을 보자마자, 완전히 불필요한 동작이라고 판단했다. 그 근거는 너무나도 많았다.

그저 멋스럽게 펄럭이는 도복 아래로 엉키는 손.이건 실전에서라면, 적에게 살초를 허용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는 한순간에 수십 번의 칼질이 오간다.

거추장스러운 도포에 한 손이 감기고, 그 상태로 몇 번의 휘적일 시간이면…….

‘최소 세 번의 찌르기를 맞고 넘어지기 일쑤다.’

설휘의 상식선에서는 필요 없는 정도를 지나, 적의 칼에 급소를 무방비하게 드러내는, 터무니없는 동작.

하지만, 무조건,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야 했다.

초식의 가능성을 찾으려 계속 시도해 본 끝에, 설휘는 얼핏 뭔가 의미하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셀 수 없이 많은 숙련을 통해 설휘는 예전에 보지 못한 전혀 다른 방향을 볼 수 있었다.

‘그냥 멋을 위해 도복으로 팔을 휘감는 게 아니다.’

청풍검법을 펼치기 위해 사용한 청명심법의 흐름은 도도하지만, 때론 강렬하기도 했다.

즉, 몰아붙이기 전. 내기를 모으는 준비과정이 있다.

이것으로 연계했을 때, 도복을 드는 동작은 단순히 멋 부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과정의 한 부분이라고 봐야 했다.

‘들어 올린 도복의 자락에 내력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되면 잠깐이나마, 도포자락으로 왼쪽 가슴을 방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는 설휘가 처음 보았던 것처럼, 굉장히 무방비한 자세.

역으로 적의 공격을 유도해 빨아들이고, 일검을 도포자락으로 방어한 뒤.

쉬쉬쉬쉭!

짧은 호흡 안에, 검을 쥔 쪽의 시야를 우측이나 좌측, 한쪽의 가용 범위를 넘어서 좌우 두 쪽으로 더 넓게 찔러내고 벨 수 있었다.

‘이걸 왜…… 하아. 하긴 실전되었던 부분이지.’

원전에서 몇 마디만 더 기술되어 있었더라면, 설휘도 이 초식의 유용함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백 년을 내려온 비급은 많은 부분이 삭아 있었고, 그중에서 일부의 원형만 내려오는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설휘는 거기서 조금 더 생각을 이끌었다.

과연, 다른 초식들은 다 완전하게 전해졌을까? 그러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설마…… 초식의 방향에도 의미가 있는 걸까.”

그는 사고를 확장했다.

별것 아니라 여긴, 아니 명백히 쓸모없는 동작에도 의미가 담겨 있는 걸 느낀 설휘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공이 있었다.

바로 청성을 대표하는, 청운적하검.

이제까지 비효율적이라 여겨 그 검로를 개량했던 부분. 그걸 다시 원전에서 출발해서 살피는 것이다.

‘칠 초식과 팔 초식 연계 부분.’

설휘는 자세를 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초적인 청풍검법과 달리 청운적하검은 청성의 최상승 무공이다.

펼쳐내는 것만으로도 다량의 내기가 필요한, 화경에 올랐을 때 비로소 제대로 위력이 나올 수 있는,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는 무공이다.

후웁. 훕.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설휘는 일부러 숨을 가쁘게 쉬며, 긴장을 최대한 뻗은 상태에서 초식을 펼칠 수 있기 몸을 준비했다.

“해보자.”

말을 뱉음과 동시에 설휘의 검이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이이이익!

동시에 청풍의 기운이 설휘의 검신에 담겨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그해 청성의 겨울은 많이 추웠다.

청성의 도사들도 해가 뜬 시간 외에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참배객들도 줄어 명승지는 한산했다.

“끄응.”

추운 날이 계속되자, 거동이 불편하던 청허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관절이 뻣뻣하게 굳어, 이제는 스스로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어찌 보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

석휘의 이름을 버거워해, 다들 안부는 물어 왔지만, 실제로 그의 옆에는 젊은 도사 한 명만 마지막 시종을 들고 있었다.

“혁문아. 오늘은 참으로 날이 밝구나.”

모처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

대청마루에 앉아있던 이대제자는 말을 건네는 사백조, 청허에게 급히 예의를 차렸다.

“예. 어제 눈이 많이 내려서 바람도 크게 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추위를 견디고 나면, 청성산도 따스한 봄이 올 것입니다.”

“그래……. 앞으로 너희들이 만들어갈 세상이겠지. 지지 않는 청성의 녹음(綠陰)처럼, 너도 지금보다 더 큰 사람이 될 것이고.”

“예……. 제가 지금보다 큰 사람이 될 때에도 사백조께서는 지금처럼 강건하셔야 합니다.”

“물론 그래야지.”

청허는 허허롭게 웃었다.

허나, 그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는 혁문 역시 알았다.

석 달 전, 이곳을 떠난 대청성검수 석휘.

20년을 가르친 피붙이 같은 제자.

분명히 그의 소식을 누구보다 궁금해하시고 계실 터인데……. 어떤 상황에서도 입에 올리지도, 누구에게 발설하지도 말라는 청허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혁문은 답답했지만, 묻지 않았다.

이제 곧 귀천하실 분이 대체 무슨 연유이기에 제자를 쫓아냈는지.

착잡하고 안타깝지만, 그저 마지막 부탁이기에 성심성의껏 모실 뿐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어……?”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을 나온 그는, 잠깐 자신이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깜빡였다.

청허 진인을 보러 온 인사들은 이미 다 위문을 마친 상황. 남은 장로나 원로가 있을 리 없는데, 한 사람이 고택의 정문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대……청성검수님 아니십니까.”

약간 초췌한 안색의 남자.

바로 석휘 도장이었다.

무슨 사연인지 사부가 크게 호통친 이후 다시는 들리지 말라는 명을 내렸거늘. 혁진 역시 기억하고 있었는데도…… 오늘 이렇게 방문한 것이다.

“쿨럭, 쿨럭. 크흠……?”

찬바람에 기침을 하던 청허 진인. 석휘와 그의 사부는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

청허 진인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탁하게 흐려진 눈은,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반가움과 노기. 그중 어떤 것이 튀어나올지 스스로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음…….”

고개를 조금 늦게 돌린 것도, 그런 감정이 불쑥 치솟아서가 아니었을까.

털썩.

혁문이 조마조마해하는 가운데, 석휘 도장은 청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부님. 제자 왔습니다.”

“…….”

잠깐의 정적.

불편한 침묵 속에서 혁문은 조심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대체 어떤 일로 부자 같던 사제 간에 싸움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나, 어쨌든 간에.

‘이렇게 와줬다는 게 어디야.’

그는 그저 감사했다. 이 일로 흔들렸던 두 사람의 사이가 다시 굳건해지길 기원하며.

사박사박.

혁문이 자리를 떠나자, 고개를 돌린 청허 진인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우리 사이에 또 볼 것이 있소?”

“…….”

담담한 말투였지만, 설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 한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사부님…….”

청허의 말투 끝에는 작은 떨림이 있었다.

그 떨림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설휘가 잘 알았다.

“예전에 몹시 추운 겨울이 올 때, 저와 약조 하나 하시지 않았습니까.”

“약조? 무슨…….”

“산정호수인 월성호를 바라보며 낚시하기. 그리고 밤에는 거대한 바위 절벽에서 담소를 나누기로요.”

“…….”

“그 약조. 지키기 위해 왔습니다.”

설휘의 말에 사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응당 화를 내고 내쫓아야 했을 그가, 입술을 쭈뼛쭈뼛하며 힘들게 앉아 있었다.

“사부님…….”

주르륵.

그 모습에 설휘는 결국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부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본인을 제자가 아니라고 내쳤던 그가, 앞으로 다시 보지 않겠다고 호통쳤지만.

그럼에도 어릴 적부터 가르쳤던 제자를 보는 순간, 참으로 벅찬 감정이 생겼다는 걸.

분명히 연을 끊자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지만.그럼에도 지금 이렇게 아끼던 제자를 앞에 두고는, 나가라는 말 한마디를 하기 어려워하는 것이다.

분명히 거짓된 시간도 있었지만.

그저 거짓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따듯하고 안온했던 시간도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래. 가보자꾸나.”

한참을 불편하게 앉아 있던 사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설휘를 보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가서, 검으로 말하자꾸나. 우린 청성이 아니냐.”

“예.”

설휘는 예의를 차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게를 들고 와 사부를 메었다.

저벅. 저벅.

예전보다 한결 깊어진 눈빛으로, 대청성검수는 그의 사부를 둘러메고, 천천히 월성호로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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