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도문 수행의 첫 문파 (5)
좁은 산길을 내려가면서 설휘와 청허는 서로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굳게 닫힌 침묵이 만들어내는 공기는, 고산 위에서 불어오는 추위보다 더 무거웠다.
추위는 단순히 몸을 얼게 만든다. 하지만 지친 감정 속 추위는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박. 자박. 자박.
그렇게 이 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위태위태한 절벽 사이를 내려오던 설휘와 청허. 두 도사의 눈에 거대하게 펼쳐진 호수가 보였다.
“허어…….”
감탄이 새어 나왔다.
월성호.
산중 호수는 마치 사람이 손을 댄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긴 호수와 좌우의 산기슭은 장관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거대한 자연경관이 가슴속으로 탁 트인 청량감을 맛보게 해주는 광경.
찰박.
설휘는 호수가 발에 닿을 정도까지 내려온 후, 한쪽에 지게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걷지 못하는 사부를 조심히 안아 들었다.
“…….”
가벼웠다.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던 사부다.
설휘가 성장하는 만큼, 청허는 조금씩 늙어가며 야위었다.
한때는 강호를 위시했던 호걸 청허였지만, 세월이 지나며 그의 몸은 근육을 잃고 군살마저 줄어들었다.
어린 소년의 몸처럼 야위고 작아진 사부의 몸.
그 가벼움이 먹먹했다. 이제껏 침묵하며 걸어오던 묵직한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할 정도로.
투욱.
사부는 설휘가 자신을 바닥에 내려놓을 때까지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반평생을 함께 보낸 제자를 앞에 두고, 그의 눈빛은 여전히 복잡했다.
투욱. 툭. 툭.
설휘는 잠깐 사부와 눈을 마주친 뒤, 천천히 호수로 걸어갔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허의 눈빛에는 천천히 파문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파문은 점점 더 커져, 놀람으로 변했다.
부릅떠진 눈이 향한 것은 설휘의 걸음.
물 위를 평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걷는 걸음 때문이다.
툭. 툭. 투투툭.
경신법을 쓰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담담하면서도 우직한 발걸음.
찰박. 찰박.
한 걸음씩 호수 위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물이 찰랑거렸지만, 발은 아래로 빠져들지 않았다.
‘등평도수(登萍渡水)…….’
가끔 민간 설화에 나오는, 도력이 높은 도사들이 물 위를 걸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걸 실제로 석휘가, 자신의 제자가 실현해 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철벅. 철벅. 투욱.
그런데 설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높은 경신술을 선보였다. 한참이나 호수 위를 걷던 설휘가 적당한 지점을 물색하듯 왔다 갔다 하더니, 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춰 서 있었던 것이다.
‘무력답수(無力踏水)……!’
청허는 이제 소름이 돋았다.
물은 흐른다. 지극히 부드럽고 연약하기에, 그 위를 걷거나 달리는 것은 어찌어찌 가능하다 할 수 있다. 반발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잔잔한 물에 서 있으려면, 경신법이 초월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도라면 기를 조절해서, 허공의 바람을 밟으며 날아오른다는 능공허도에 준하는 수준.
“사부님.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
물 위에서 꺼낸 설휘의 말에, 청허는 헛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청성의 무공을 펼치겠다는 의미는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걸 물 위에서?
발 디딤조차 쉽지 않은 수면 위에서 검을 들고 무위를 펼친다는 것은, 범인들의 상궤를 넘어서는 엄청난 수준인 것이다.
등평도수, 무력답수, 그리고 능공허도.
최고 수준의 경신법을 펼치는 와중에 청성의 무공을 사용한다? 이미 두 가지 극에 달한 절예를 동시에 펼친다는 의미.
“가, 가능하겠느냐……?”
화경이라는 지극히 높은 경지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의 경신법 대가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청허의 목소리에는 걱정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마치 지금까지의 어색했던 관계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이. 그만큼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이었기에.
“제자는 사부께 검으로 말하겠습니다.”
“……좋다.”
청허는 가슴속에 남았던 앙금을 지웠다.
노여움도, 분노도, 그리고 안타까움도.
지금 자신의 제자는 검무로서 자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터다.
그러니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들어야 한다. 그것이 청성의 문인으로서, 경지에 오른 무인에게 청성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스윽.
설휘가 검의 방향을 몸으로 가리자마자, 청허는 곧장 한 무공을 떠올렸다.
‘청풍검법이구나.’
시리고 푸른 바람처럼, 차분하게 적의 공격을 기다리는 동작의 일 초식.
설휘의 첫 검식은 청성의 근본인 청풍검법이었다.
스윽. 휘릭.
보폭이 뒤로 움직이며, 슬쩍 검날을 위아래로 흘리고 이 초식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진 삼 초식.
파르륵.
“……!”
낙낙하게 흘러내리는 도복을 왼팔로 감아 들어 올린다. 그 모습에 청허의 눈이 커졌다.
‘이건…….’
청풍검법의 원전. 낡고 부스러진 비급에 나와 있던 자세.
그중에서도 특히 삼 초식은, 자신마저 ‘이럴 필요가 있는가?’ 고민할 정도로 이상한 동작이었다. 그런데 설휘가, 선대의 겉멋 부리는 초식이라며 극히 꺼려 하던 제자가, 고스란히 눈앞에서 시전하고 있었다.
사아아아아- 퉁.
호수 아래, 고요하지만 강한 파문이 일어났다.
파르르르륵.
들어 올린 도복 자락에, 강대한 내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호수에 이는 잔 물살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후우…….”
한 번의 호흡을 뱉은 설휘가, 왼손의 도포 자락을 한 손으로 휘감는 동시에, 오른손의 검을 좌우로 연속해서 찌르자.
우웅!
기류가 설휘의 몸으로 빨려 들어왔다가, 찌르는 검 끝으로 발산되며 앞으로 뻗어 나갔다.
촤아아악!
물이 갈라졌다.
강렬한 예기에 잘려나간 수면이, 몇 초 동안 가만히 속살을 내비친 채로 멎어 있었다.
“아!”
청허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려냈다.
청성 특유의 치렁치렁한 도복. 그것을 마치 무기처럼 휘두르는 동작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동시에 충격적이기도 했다.
‘그게…… 그런 의미가 있었나……!’
옛것이 무수한 세월을 지나 현재까지 내려오는 데는 많은 과정이 얽힌다.
아무리 선대의 창대한 기상을 따른다 해도, 실질적으로 싸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초식은 자연스레 도태되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설휘가 그런 이들의 대표라 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도포 자락을 잡아 올리는 삼 초식의 움직임을 아예 지워버리는 것도 불쾌하지만 인정했다.
그랬다. 불평은 했지만, 청허는 알지 못했다.
선대의 무수한 고수들이 삼 초식에 저런 의미 없는 동작을 넣은 이유를.
그런데 설휘가 그걸 스스로 깨달아 시연해 보이고 있었다.
출렁. 출렁.
위태롭기 짝이 없는 자세. 내기를 밀어 넣은 소매가 펄럭이며 고스란히 허점을 노출시킨다. 하지만 그 노출된 허점은 일부러 의도한 것.
쉬이익! 피잇!
지독히도 예리한 반격. 말 그대로 공방일체다. 만들어낸 허점으로 공격이 들어왔다면 그대로 목, 혹은 가슴에 큰 검상을 입게 만들, 섬광 같은 이 격.
‘석휘야……. 너…….’
청허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 자신의 제자가 펼쳐내는 무예는 청성의 가장 이상적인 검로.
청성의 무예가 천하제일임을, 뼛속까지 믿고 이해하면서 만들어낸 방식이다.
이제껏 그것이 부족했기에 크게 노했지만, 다시 찾아온 제자는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아아아---
연격. 또 연격. 수많은 검극과 검광의 종횡무진.
스팟!
수십의 초식이 화려하게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검면을 아래로 내리자, 호수의 수면은 파도치듯 요란했던 것을 끝으로 조용히 잦아들었다.
“허허어…….”
청허가 진심으로 탄식하는 가운데, 정작 설휘는 조용히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풍의 흐름이…….’
청풍검법을 펼치는 데, 무의식이 조금 관여했던 것일까.
끝나고 보니 푸르스름하게 일어난 바람이, 아직 채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주변을 돌던 기류는 얼마 후 수면에 수많은 물살을 퍼뜨리며 흩어졌다.
파사삭. 좌아아아악.
‘이것이었구나.’
그 순간 설휘는, 머릿속을 찌릿하게 울리는 한 줄기 기억에 몸을 떨었다.
사부가 말했던 청풍검법.
청명심법을 도도한 흐름으로 펼치다 보면, 그 기운이 단번에 날아가지 않고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문다.
일전에 시연회 때는 지금처럼 머물지 않았다.
근본.
당시 왜 사부가 화를 냈는지, 왜 시연회 때 자리를 박차고 나갔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청성의 근본.
자신에게 부족했던 일념. 그것이 채워졌다.
‘사부님…….’
다른 어느 누구보다, 사부가 자신이 느낀 것을 함께 느낀 듯했다. 그간의 냉담했던 표정이 사라지고, 예전의 자신을 보던 따듯한 눈길로 돌아온 것으로 보아.
“그럼 다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음?”
설휘가 다시금 자세를 고쳐 잡자, 사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다음이 딱히 필요한가? 이미 제자에게 부족했던 청성문도로서의 마음가짐, 그것이 채워졌음을 확인한 지금에?
스윽.
하지만 설휘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검을 쥔 우수에 검결지를 맺은 좌수를 살짝 교차하고, 전면으로 검을 반듯하게 누인 자세를 취해 보였다.
“…….”
자세로 보아 청운적하검. 그리고 본래는 없는 기수식이었다. 그에 지켜보던 청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녀석이, 저걸…….’
이건 청허 자신을 따라함이다.
사실 언제인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과거 자신이 자랑삼아 비무 때 보여줬던 딱 한 번의 기수식.
철없던 시절. 일부러 멋을 내기 위해 했던 그 자세를 지금의 설휘가 흉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청운적하검.
고고하고 청수한 자연과 그에 어우러지는 철검의 예기를 동시에 담은, 청성파의 대표 무공이 펼쳐졌다.
우우우웅…….
검명이 울었다. 정중동. 멈춰 있는 듯하지만 내뻗어지는 쾌검보다 더 빠른 움직임.
그것이 파동이 되어 잔물결을 일으켰다. 물결과 물결이 겹치면서 커다란 파도가 되어 일어났다.
촤아아아악!
일렁이던 물살이 설휘를 중심으로 움푹 파였다. 그러고는 재차 치솟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쿠구구구구.
마치 거대한 돌벽이 호수에 떨어졌을 때 생성되는 현상과 흡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청성파 최고의 기예가 펼쳐졌다.
***
우르르릉. 쿠르르릉.
큰 도약과 함께 치솟는 물줄기.
수면에서 십 장 높이에 그려지듯 내려오는 검로.
“허어…….”
청허 진인은 예전의, 그가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청성의 무공으로 구현할 수 있는 신화적인 힘이 대체 어느 정도일까 하는 주제를.
오랜 옛날, 청허의 사부였던 송정 도인이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청성의 무공은 대부분 구조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고, 그걸 이겨내야만 모든 힘을 펼쳐낼 수 있다고.
그로 파생된 힘은 절대적이다.
또한 모든 깨달음은 본인의 신체와 내공, 그리고 깨달음이 동시에 수반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방식은 좀 다르다고.
설휘를 향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고 호통을 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청성의 기록된 선자(仙子)들은 모두 화경에 오른 것에 그친 게 아니라, 그 너머를 바라봤다고.
하지만 청허의 사부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이는 아래에서 출발하여 차츰 위로 깨달아가는 계단식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 이해를 요하는 방식이라 정파의 점진적 성격과 다르다고.
단번에 서너 단계를 넘어버리는, 그렇기에 산의 정상에 올라야만 보이는 넓은 이해를 요한다고.
작금의 청성, 과거의 청성에도 절대고수 한 명이 나오기 어려웠던 것이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석휘야……. 결국 이루었구나.’
단순히 설휘의 청운적하검의 시연 때문이 아니다. 지금의 그에게는, 이전에 없었던 청풍이 몸속을 맴돌고 있었다.
이는 청풍검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순하고 시원한 기운이었다.
자신의 원하던 단계를 넘어선, 경외심이 들게 할 정도의 기운이었다.
‘그럼에도 검로에는 힘에 대한 갈망이 보이는구나. 너는 대체 어떤 삶을 산 것이냐…….’
청허는 보았다.
우직하게 펼쳐지는 검로 속에서도, 끝없이 경지의 상승을 엿보는 염원이.
보통 초식에 변화를 주는 쪽으로 가는 이는 실전적인 대상, 적과 싸움을 고민한다. 당장 눈앞에 있는 적을 이겨야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설휘는 초식의 변화가 아닌, 검로의 우직함을 따르는 방향으로 기류 변화를 계속 시도했다.
이는, 목표를 대상이 아닌 경지 상승으로 하는 것이다.
청운적하검에는 설휘가 그간 느꼈던 감정, 그리고 성장한 과정.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아직 풀지 못한 숙제를 향하는 마음이 나타나고 있었다.
청성은, 검으로 말한다.
지금 검에 담긴 설휘의 마음이 어떤지, 청허는 가슴 깊이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