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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뮬레이션-365화 (344/379)

365화. 더 높은 가치를 향해 (1)

스으으윽.

기류가 잦아들고, 설휘가 시연을 멈췄다. 그는 온몸에 땀이 흥건한 모습으로 걸어왔다.

찰박.

청허는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설휘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을 때쯤, 허허롭게 말을 건넸다.

“이 늙은이가 이제 정말 죽을 때가 다 됐나 보구나. 말년에 이런 해괴망측한 짓거리를 해대니…….”

표정이 풀어진 그는, 고개를 돌려 설휘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사부가 모질어서,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닙니다. 그저 제자가 미욱한 것을 깨우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설휘는 스승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의 그 모습에는 티끌만 한 거짓도 없었다.

청성에서 지내고 배운다 한들, 그게 모두 청성인이던가? 어릴 때부터 청성의 정신을 배웠던 이들의 눈에 자신의 모습은 매우 이질적인 무인으로 보였으리라.

그저 강한 무공이라는 것에만 사로잡혀, 그 나이 때에는 알아채기 힘들었겠지만.

“사부님. 제자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은 제가 말하지 않았던 과거가…….”

“되었다. 굳이 두 번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

“……?”

말을 끊어 버리는 사부. 설휘는 약간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청허는 한없이 넓게 펼쳐진 호수, 아직까지도 잔잔하게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수면 위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이미 검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간절하게 경지 상승을 원하는 염원, 반드시 올라야만 하야 하는 이유, 수많은 분노, 슬픔의 사연이 있었더구나. 그 대상은 바로 아마도 너를 이렇게 만든 놈이겠지?”

“사부……?!”

설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는 놀라움을 넘어서는 충격이었다.

분명히 일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검수는, 상대의 검격에서 여러 가지를 읽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감정, 마음, 그리고 어떤 태도로 검을 수련해 왔는지 등에 대한 것을.

하지만 지금 사부는, 마치 자신의 전생에 대한 기억까지 읽은 것처럼 보였다. 대체 사부는 자신의 검무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인가.

“예전부터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도 이제는 알겠구나. 네 삶은 감히 범인이 재단할 수 없는 영역까지 가 있어. 그토록 깊은 감정을 죽이고, 청성의 도까지 받아들이다니. 장하다. 사뭇 존경심까지 드는구나.”

“사부님. 저는, 전…….”

“네가 진심으로 청성의 도를 따른 이유를 잠깐이나마 고민해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네가 그저 단순히 청성의 무공만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님을 안다.”

청허는 설휘를 천천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힘들었겠구나. 그간 네가 마음의 벽을 치고 있었던 까닭은 네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줄 사람, 네 복잡한 사연을 따지지 않고 그저 온전히 너를 있는 대로 보아줄 사람들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던고. 그럼에도 먼저 청성의 도를 따르라 했으니, 본파의 잘못 또한 적지가 않다.”

“……!”

설휘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런 것이 노인의 지혜라는 것인가. 숨기고 싶은, 설휘 스스로도 알지 못한 진실을 고스란히 들켜버렸다. 사부의 따스한 말에 그는 감정이 울컥거렸다.

“석휘. 내 제자야.”

“…….”

설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차가운 북풍이 아니라 따듯한 햇살이라던가.

부드럽고 따스한 말은 이제껏 사부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격정, 그간의 외로움과 막막함이 소록소록 녹아나 가슴을 울렸다.

“청성의 무공이 너를 만족시켜주지 못할 수 있다. 네 사부는 물론이고, 그간 본파의 열선조들의 무리 또한 네가 원하는 정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겠지. 허나 그럼에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청성의 무공에는 단순한 강함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도 담겨 있다는 걸.”

청성파.

과거 도문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

수많은 도인들의 깨달음과 공부가 뭉친 그곳은, 당연히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 근본에는 부러지지 않는 정신과 물러서지 않는 투지가 있었다.

어쩌면 지나치리만큼 격식을 추구하는 고리타분한 부분도, 본래는 근본을 잊지 말자는 마음가짐. 그로 인해 파생된 점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청허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무당을 찾아가 보거라.”

“사부님……?!”

설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무당이라니. 다른 이도 아닌 오로지 청성만을 최고로 치던 사부가 갑자기 타 문파를 언급하다니.

놀란 설휘는 다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사부님. 제자가 비록 검에서 열망을 드러내긴 했으나, 그것이 타 문파의 무공을 원하거나 바라는 방향은…….”

“안다. 어찌 모르겠느냐. 나 역시 그런 의미로 한 얘기가 아니다.”

청허는 고요하게 흐르는 월성호에 다시 눈을 두었다.

사르륵. 찰랑.

잘게 흔들리는 호수의 물결. 그에 눈을 두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그는 조용히 입을 뗐다.

“청성이 도가의 성지라곤 하나, 거기에는 옛 영광에만 취해 현실을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과거 전진파의 발호 이후로 수많은 도인들이 자신의 깨달음과 선대의 무예를 집성하여 많은 문파를 만들었고, 그중에는 별처럼 많은 인재가 태어났지. 그중에는 우리 청성파처럼 위에서 아래로 깨달음을 얻는 곳도 있지만, 불가나 무당처럼 아래에서 점진적으로 위를 향하는 무공도 실존했지.”

“사부님…….”

“이건 옳고 그른 문제는 아니다. 그저 다름이다. 안타깝지만 지금 네 수준보다 더 높은 깨달음을 줄 청성의 무학은 없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니라.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고.”

“…….”

설휘의 감정은 복잡했다.

그 자신이야 어쨌건, 사부인 청허는 청성으로 태어나 청성인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 자부심 강한 이가 뱉은 다른 문파에서 새로 배움을 얻으라고 하는 말이, 대체 어떤 심경에서 꺼낸 것인지 차마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스윽.

청허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설휘. 그런 그에게 청허는 사부로서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을 했다.

“비검불인. 검이 없으면 사람도 없다. 하지만 비인부검. 사람이 없으면 검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네가 검을 차고 있는 이상, 청성은 늘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가 세상을 굽어보는 위치에 올라도, 혹은 도전하다 네 검이 부러지던 순간이 오더라도. 슬픈 때도 기쁜 때도 나는 늘, 너와 함께 있을 거다.”

“사부님……?”

갑작스런 사부의 말에 설휘는 당혹감이 들었다.

이제껏 누렇게 떠 있던 사부의 얼굴에, 갑작스레 불그스름한 홍조가 올라 있었다.

‘회광반조!’

설휘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금 전, 자신이 시연해 보였던 청운적하검. 그것은 사방에 청풍이 되어 몰아쳤다. 당연히 사부의 몸속에 있던 청성의 내공도 청풍의 기운에 동화가 일어났을 터.

무인에게 강한 내공이 항상 좋지만은 않다.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운은, 노인의 남은 수명을 앞당길 수 있는 것이다.

“사부님, 사부님! 맙소사. 제가…… 제자가 무슨 짓을……!”

아연실색하는 설휘에게, 청허는 웃으며 손사래쳤다.

“허허. 요란 떨지 말거라. 어차피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없는 법. 네가 펼친 청성의 무예는 오히려 이 사부의 깊은 시름을 덜어 준 것이니라.”

사실이 그랬다. 이미 기력이 쇠한 지 오래되어, 언제고 귀천할 날만을 기다리던 몸.

그 시일이 며칠 당겨졌을 뿐. 오히려 제자인 설휘가 청성의 무의 극한까지 오른 것을 직접 목도했으니, 그는 원도 한도 없이 기쁨만이 가득했다.

“사부님…….”

“포기하지 말거라. 나는 늘 너와 함께할 것이다. 진심으로 널 아끼고 사랑했다. 내 제자…… 석휘야.”

어느새 자애로운 눈빛으로 변한 청허의 표정에는 어떠한 거짓도 없었다.

그 옛날 자신을 가르치던 때의 따스함만 남아 있었다.

“저도…… 많이 사랑했습니다.”

설휘는 머리를 조아리며 오열했다.

이제껏 사부를 만나러 오면서 하고 싶었던, 그럼에도 쉽게 내뱉지 못했던 속내를 드러냈다.

이제껏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전히 사람다운 대접을 해준 사부. 혈육의 정이라도 이토록 진하지 못할진대, 그 따스함을 주던 사람이 사그라진다.

남겨진 채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설휘는, 그 아픔이 너무나 절절했다.

스윽. 스윽.

고개 숙인 설휘의 머리를 매만지던 사부.

그의 손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래로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흑. 으윽…….”

설휘는 한동안 사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힘없이 늘어진 늙고 굳은 손바닥만, 하염없이 얼굴에 가져다 비빌 뿐이었다.

***

그해 청성의 겨울은 참 추웠다.

청성의 큰 기둥이었던 청허 진인. 그의 죽음은 모든 도사의 가슴을 슬프게 만들었다.

청허의 유골은 석휘가 들었다.

그의 바람대로 월성호 아래에 잔잔히 뿌려 주었다.

‘사부님…….’

사부를 떠나보낸 설휘에게도 많은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

자신이 가진 수백의 목숨이 너무도 덧없이 느껴졌다.

결국 중요한 건 목숨의 수가 아니었다. 한 번을 살더라도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사느냐가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설휘의 지난 목숨 중에 가장 가치 있었던 목숨은, 뒷일을 계산하지 않고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모든 걸 던졌을 때였다.

그랬던 경험이 흐려져 가던 도중, 사부로 인해 다시 깨달았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단 한 번이라도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본래 설휘는 구대문파의 모든 곳을 방문할 생각이었다.

점창, 공동, 화산, 그리고 곤륜파 등.

도문과 관계된 모든 곳에서 많은 기예와 깨달음을 배우려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졌다.

단 한 번.

사부가 말하던 무당파를 한 번 들르는 것 외에는,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을 접었다.

청성에서 달성한 것이 화경의 극이라면, 분명 무당의 것을 받아들이면 현경까지 오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

진구(眞求)는 현 무당파 장로 중 하나다.

어릴 적 그는 무당의 모든 무학을 깨친 신동으로 평가받았으며, 열다섯 살이 되기 전 무당의 무공 가운데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 큰 사고가 발생하고 만다.

태극권법의 평가시험 중 무슨 이유인지 동료가 살수를 뻗었고, 그 공격을 막지 못하고 낙상하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당장 반신불수가 되는 큰 부상을 입었고, 그 뒤로 더는 무공 수련을 하지 않고 한동안 무당에서 보기 힘들었다고 전해진다.

몇 년 후, 그는 향화객들이 오고 갈 수 있는 곳이나 무당의 손님에게 객방을 내어주는 허드렛일을 하는 곳에서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는 이제는 어엿한 사당의 주인이 되었다.

“후우.”

어느 날, 향화객들이 오는 계단 사이로 낙엽을 치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설 수도 없지만, 두 팔이 건장하고 몸의 중심을 기가 막히게 통제할 수 있다 보니 이 정도 일은 어렵지 않았다.

대충 자리를 다 치워 놓고, 그는 주변의 정자에 누워 잠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원한 바람에 다시 깨어났을 때에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노인이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고 있었다.

“뉘십니까?”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높였다.

일단 겉으로 보이는 나이도 그렇지만, 허름한 도복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과객입니다. 천주봉 아래의 전경에 넋을 잃고 관람하던 중, 고인의 청정을 깨트린 것 같습니다.”

‘청경의.’

뒤늦게 그의 눈에 들어온 상대의 도복.

산과 고고한 학의 그림이 어깨 어림에 그려진 예스런 도복이다.

그는 곧장 자세를 고쳐 잡았다.

“청성파의 고인이십니까?”

“……고인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그럴 리가요. 어찌 이곳까지 오셨는지.”

진구는 급히 예를 차렸다.

최근 본산에서 연무지회가 있었다고 들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에 오른 인물이라면, 분명 청성에서도 중요한 직급에 있는 사람일 터.

“고인을 모시기엔 자리가 너무 누추한 곳입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이 아래 오룡사에서 정식으로 맞이해도 되겠습니까?”

“허허. 자리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사람이 중요하지요.”

“아…….”

진구는 그 말에 깨달았다.

눈앞의 장년인은, 주변 경치가 아니라 자신을 보기 위해 왔음을.

“괜히 부담 가지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다음 생에 무당 내의 누구를 모실지.”

“……?”

“그리고 지금 정했습니다. 좋은 동료라면 굳이 사부가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것을요.”

“대체 무슨…….”

어이가 없는 듯 바라보는 진구.

하지만 설휘의 눈에는 반가움이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다음 생, 삶의 방향이 될 인물을 찾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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