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더 높은 가치를 향해 (2)
설휘가 청성의 장문인이 되고 삼 년 차에 연무지회가 열렸다.
당시는 마교가 자중지란으로 무너지고, 화산의 이름도 다시 저물 시기라 오랜만에 이뤄진 구파의 만남의 장이었다.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이름을 얻은 이들이 모이는 가운데, 거기서 설휘는 당대의 무당파 장문인 현우 진인을 만날 수 있었다.
공식적인 연회가 끝나고, 이틀 뒤. 별도로 마련된 자리가 있었다. 거기서 그와 대화를 한 후.
‘이 어찌…….’
설휘는 큰 실망을 했다.
무당파. 세간에서 보기로는 천하제일문에 가장 가까운 이들.
하지만 직접 만난 무당파의 장문인에겐, 호연지기의 기상과 의기가 느껴지기는커녕, 뭔가 떳떳하지 못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무당파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설휘는 한참을 숙고해야 했다.
돌아가신 사부, 청허 진인이 꼭 들러서 참조해 보라고 한 곳이 다름 아닌 무당이다.
그런데 직접 만나서 심금을 털어놓은 바, 무당은 세간의 평과 달리 편협하고 불안정했다.
과거 살마가 그들을 침범하려 했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자기 것을 지키는 것에 급급할 뿐만 아니라, 외부로 나서길 꺼렸다.
‘아무래도 무당파로 들어가서, 직접 무슨 일이 있는지 살펴보아야겠다.’
그 길로 설휘는 다시 청성으로 돌아갔다.
무당파의 사정은 다음 삶에서 지켜보면 된다. 지금은, 이번의 삶은, 오로지 청성만을 위해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단순히 사부와의, 청성파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 문파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아 두려 한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무당에서도 도움이 될 테지.’
그렇게 진지하게, 청성의 장문인으로 살았다.
검에 매진하며, 사람들을 모으고, 인근의 우환이 되는 이들을 추방시키며, 적어도 청성산 인근에는 태평성대를 유지하며.
그런 시간이 14년.
설휘는 청성의 별이 되었다.
청성만이 아니라 강호의 모든 의협지사는, 석휘 진인의 덕을 흠모하며 곳곳에서 그의 귀천을 안타까이 여겼다.
그렇게, 설휘는 청성에서 나쁘지 않은 삶을 마무리했다.
***
무당산.
자박. 자박.
아직 젊은 티를 벗지 못한 도사들 사이로, 자못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을 한 도관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명숙(明淑). 직책은 진원각주(眞源閣主)로, 일대제자 중에서도 뛰어난 인재를 선별하여 태극권을 교육하는 역할이었다.
그의 아래로 사제들을 훈육 담당관으로 총 다섯을 두었고, 자리에 모인 제자들은 수는 총 오십삼 명.
이들은 무당파를 대표하는 신진고수. 오십삼도인(五十三道人)이라 불리는데, 그 수업은 매우 철저한 과정에 맞춰 진행된다.
수업 시간과 내용은 이렇다.
진 · 사 · 미 · 신 · 유시를 기준으로.
일 · 이 · 삼 · 사 · 오식으로 명명하여.
일식(오전 7~9)에서는 글공부.
이식(오전 9~11)에서는 체력단련.
삼식(오후 13~15시)에서는 논검의 기초.
사식(오후 15~17시)에서는 명상의 심화.
오식(오후 17~19시)으로 대련이었다.
하나하나 빠듯하게 짜둔 시간표임에도, 오십삼도인들은 불평할 틈이 없었다. 애초에 기본 신분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저 강호의 중소문파에서만 해도 ‘신진고수 낙점’ 이란 말을 들으면 어깨가 으쓱해지고, 반드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한데 다른 곳도 아닌 구파일방. 그중에서 첫손가락에 반드시 꼽히는 무당파. 그곳의 일원인 이상.
게으름이나 나태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들 잠을 줄여가며, 머리를 싸매고 공부에 몰두하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오늘 주제는 분별이다. 태극권으로 활용하는 기(氣)와 선도의 기공에 쓰이는 기(氣)는 무엇이 다른가? 또한 어떻게 다른가.”
술렁.
진원각주의 물음에 도관의 공기가 조금 변했다.
반가부좌에 가까운 좌식으로 앉은 오십여 명의 도사들. 그들은 내심 골똘히 답을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서로서로 눈길을 피했다.
“흐음.”
명숙이 손에 든 서책을 슬쩍 내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도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아는 이가 없는가?”
핑글핑글.
젊은 도사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도라는 것은 하염없이 모호하고 뜬구름 잡는 어법인 법.
진원각주가 두 번이나 질문을 했음에도 대다수의 도사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괜히 어설프게 답했다가 괜히 불호령을 맞을까 두려운 것이다.
“진가. 네가 말해보거라. 무엇이 다른가.”
결국, 명숙이 가장 앞에 있는 이에게 물었다.
데구루루.
지목받은 젊은 도사는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당연하게도 모르는 눈치였다.
“어, 음…….”
그는 뭐라 입을 열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였고, 이내 기다란 봉이 머리를 가격했다.
딱.
“아아!”
불시에 한 대 맞은 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무당의 목검. 속을 파내어서 적당히 무게를 덜어냈지만, 애초에 소리만 요란하게 울리는 소림의 죽비와는 충격의 차원이 달랐다.
“그 뒤에 진곤. 네가 말해봐라.”
다음 도사에게 자연히 추궁이 날아들었다. 진곤이라 불린 도사는 다급해졌다.
그는 뭔가를 깊게 고민하듯 눈을 꾸욱- 감더니 이내 말했다.
“선도의 기학이라 하면 존재의 그 본질은 우주의 근원에 두고 있습니다. 즉,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으로 선도와 관련된 일체의 여러 사상이…….”
“사상이?”
“사상이…… 천, 지, 인…….”
따악!
“악!”
진곤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명숙은 이제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끌끌 찼다.
“어디서 배운 건 조금 있는데…… 제대로 익히지 못하니 머릿속에 정리조차 되어 있지 않구나. 그럴 땐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게 맞다.”
“아아…….”
잘못 대답했다가 더 세게 맞은 진곤의 표정엔 억울함이 가득했다.
한편, 두 번이나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하자, 명숙의 얼굴에는 약간의 노기가 더 생겨났다.
“그대들은 앞으로 무당의 백년대계를 이끌어갈 인재들. 무당에서도 매우 어려운 시험과 자격을 뚫고 이 자리에 왔다. 그럼에도 태극권과 선도 수련에 대한 이해가 되어 있지 않단 말인가!”
“…….”
“…….”
유구무언.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깊은 사색을 해야 조금이나마 진체에 다가갈 수 있는 수준 높은 질문.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도사들은 젊었다.
젊음에도 이런 자리에 뽑혔다는 것은 달리 말해, 배워서 머리에 쌓은 것은 많으나, 그것을 숙고하여 더욱 깊이 매진할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다.
‘하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나…….’
명숙의 얼굴에 실망이 잔뜩 서렸다.
젊기에 부족하고, 부족하기에 나서야 한다. 당장 말은 ‘모르면 모른다고 하라.’라고 했지만, 그 뜻을 진정 살피지 못하는 것인가?
‘이토록 많은 이들이 있음에도…….’
질문에 맞는 답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직 이들은 배우는 이들이고, 채워진 부분보다 부족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더 많이 시도하고, 더 많이 실패해야 하거늘.
실패라는 말은, 적어도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 보았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고 틀려도 좋으니 무조건 말해보라고도 할 수 없고…….’
그 말은 금언이다. 중요한 화두다.
스스로 얻어내지 못하는 이에게 알려주는 것은, 가르치는 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실책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그저 말에 붙잡혀서 뜻을 곡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기에 더더욱 성실히 정진하며, ‘그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솔직히 물어보아야 하거늘.
어찌 실패의 비난이 두려워 나서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는 말인가? 진정 이것이 오늘의 무당의 모습이란 말인가.
호연지기도, 대장부의 기상도 없다.
아무도 입 한번 뻥긋하지 못하는 못난 모습에, 명숙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무렵.
“아직 배움이 짧은 몸이지만, 제가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오.’
앉은 채로 손을 들어 올리는 도사가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명숙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종합평가 2위라는 진숙 도인.’
장문인의 증손자이며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다고 알려진, 진짜 무당의 새싹을 본 것이다.
“해 보시게.”
“예. 간단히 말해, 기를 운용하는 법이 다릅니다. 태극의 요결에는 기를 의식하지 않고 수련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뜻을 정신에 두는 것이지, 기에 두지 않는다는 비결을 모두 다 알 것입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였고, 좌중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반면 선도(仙道)의 수련법은 빠른 성취를 위해 삼보(三寶)를 수련해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정, 기, 신입니다. 즉, 우주의 근원이 도와 계합하는 일입니다.”
“오오!”
“야아!”
말이 끝나자마자 도사들의 놀라는 반응을 보여 왔다. 그 말에 명숙도 조금은 표정이 풀려 있었다.
과연 진숙이라 할 수 있었다.
“좋은 답변이었지만, 내가 원한 답은 아니다. 혹여 더 보충해 주거나 다른 시각을 가진 이가 있는가?”
“…….”
그의 말에 잠깐의 침묵이 일었다. 그런데 이번엔 침묵이 생각보다 짧았다.
“제가 답해보겠습니다.”
일순, 도사들의 시선이 손을 든 자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신분을 곧장 알아챘다.
진구.
진숙 도사에 비견할 만한 무당 신진고수의 쌍벽.
종합평가 1위에 달하는 이가 바로 그였다.
“그래, 말해보거라. 과연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하구나.”
명숙의 말에 진구는 자리에서 일어선 뒤 잠깐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슬쩍 진숙을 흘겨보고선 말을 이었다.
“태극권으로 얻은 기(氣), 선도의 수련으로 얻은 기(氣). 좁게는 다르지만, 넓게는 같은 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음. 근거는?”
명숙은 취조하듯 곧장 물었고, 진숙은 가뿐하게 대답했다.
“선도의 수행은 정(精)을 연마하여 기(氣)를 완성하고, 그 기를 연마하며 신(神)을 완성한 다음 신을 연마하여 다시 허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연정화기(鍊精化氣), 연기화신(鍊氣化神), 연신환허(鍊神還虛)가 그것입니다. 선도의 기본인 연정화기에 들기 위해서는 결국 단전의 중심이 되고, 그것이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허나 태극권의 중심이 되는 태극은 어떻습니까?”
그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태극은 천지만물의 본원이며, 만물의 근원입니다. 식자들의 말로는 결국 대우주와 소우주로 분류된다고 해도, 그 또한 단전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다르지만, 결국 같다. 이것이 제자의 생각입니다.”
“흐음.”
말이 끝나자, 명숙은 잠깐 침묵했다.
도사들도 침묵한 채 진원각주를 보고 있었다.
“해석의 차이까지……. 상당하게 근접한 발언이었다. 훌륭하다.”
“오오오!”
“역시 진구!”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도사들이 다들 흥분한 듯 응원을 보냈다. 물론 진숙 주변에 있는 이들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당장 진숙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새끼…….’
무당의 도인답지 않게, 날카롭고 사나운 눈빛을 한 진숙.
그에게 진구는 손 밑의 가시처럼 계속 달라붙어, 매 순간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장문인의 친손자인 자신과 달리, 그 출신이 이름 모를 원로의 제자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 진골이 있고 뼈대가 있거늘. 어딜?
“조용히들 해라.”
명숙은 젊은 도사들을 자제시키고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내 생각을 말할 것 같으면…….”
똑똑.
그런데, 그의 생각을 들을 기회가 잠깐 늦춰졌다.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교육시간에 누군가 인기척을 냈고.
“누구십니까?”
훈육 감독 하나가 다가가 문을 여니, 그곳엔 놀랍게도 진무관주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내가 있었다.
무당에 드디어 입문하게 된 이십구 세의 설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