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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뮬레이션-369화 (348/379)

369화. 주동자 (2)

“사형제들이 모두 힘겨워하고 있지 않느냐. 실력이 있다면 이런 때 보여서 모두를 도와주는 게……. 아하, 세간에 알려진 소문이 전부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구만?”

설휘는 그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세만 취하고 있었다.

꿈틀.

덕분에 명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무시하는 척을 하려다, 오히려 무시당한 꼴이 된 것이다. 심기가 긁힌 그는 조용히 설휘 옆으로 다가가 속삭이듯 말을 뱉었다.

“아니면, 그런 쪽인가? 체력 훈련에는 자신이 있지만, 본 실력은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모양이지. 뭐…… 현명한 생각이야.”

“……?”

“자네 선사께서도 그러셨으니까. 제자가 스승을 따라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나?”

“……!”

정대광명한 무당의 제자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주변에 듣는 이는 없었다.

씨익.

명감은 비웃으며 뒤돌아섰다.

이 정도면 도발임을 알고 있음에도, 나설 수밖에 없으리라. 본인만이 아니라 사부까지 싸잡아서 비아냥댔으니.

또한, 나서지 않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제 사부가 욕을 먹는데도 가만히 있었다면, 그게 나중에 알려지면 좋은 꼴을 보기 힘들 터.

그렇게 그가 몇 걸음 떨어졌을 때. 상대가 기어코 입을 열었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솔직히 설휘에게 이 정도는 도발에도 속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얼마나 많은 곤욕을 치러봤던가.

오른팔을 자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선택지부터, 곤경에 처한 일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이런 상황은 너무나도 편한 축에 속했다.

한 발. 한 발.

끙끙대던 젊은 도사들의 시선은 일제히 설휘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걸어나가는 모습을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휘마저 실패하면, 낙제점을 받을 사람은 수두룩했다.

그렇다고 어설픈 실력으로 괜히 시간을 끄는 생각도 위험하다.

감독관은 바보가 아닐 테니.

“좋아. 시작하지.”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명감.

그런 그에게 설휘가 이상한 행동을 했다.

지익. 지익.

팔목을 감싸고 있는 도사 복을 찢은 다음, 훈육관에게 한 가지 제의를 했다.

“기왕 하는 김에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팔목에 천을 감고 대련해 보는 것 말입니다.”

“……내가 왜?”

“쓰러지는 자가 존재할 테니 사감이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고. 승패가 확실히 나눠지니 모두가 인정할 것입니다.”

뜻밖의 제안.

하지만 앞서 보였던 개인적인 평가에 대한 불만은 없어질 것으로 보였다. 또한, 태극권의 시연이라는 주제에도 이상하지 않은 방식이다.

태극의 추수(推手)는 손과 발을 맞대고 허와 실, 부드러움과 힘을 겨룸과 동시에 검증하는 방식이기에.

다만, 훈육담당관은 응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하기 싫다면?”

“그럼 담당관님의 능력을 우리 도사들이 의심하게 되겠지요.”

빠직.

훈육관의 이마에 핏줄이 맺혔다.

도발이 건방짐을 넘어섰다. 나름 무당파 내에서 내가고수로 위명을 얻은 그로서는 자존심이 긁히는 일이었다.

“……좋아. 네 조건을 받되, 손속에 사정은 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하겠느냐?”

“물론입니다.”

널 해할 수 있다는 경고에도 설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한편,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도사들은 잠깐이나마 고통을 잊은 듯했다. 당당한 설휘의 도발이, 끙끙대던 그들에게는 속이 시원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과욕이라면 철저히 망가질 것이다.

눈앞에 훈육관이 누구인지, 어떤 위명을 가졌는지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꾸욱. 꾸욱.

명감 도장이 각자 손을 잡게 한 뒤 친절히 묶어 주었다. 아래에는 각자 한 발씩 내밀고 있는 입신중정(立身中正)의 자세.

본래 첨연점수(沾连粘随)라 하여 추수가 시작되기 전, 서로 한 점의 접촉으로 가볍게 맞붙은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이건 조금 달랐다.

이미 서로의 한 손이 붙들려 있었고, 마음대로 놓지 않기 위해 천으로 매여 있었다.

이런 식이면 상대의 힘을 흘리는 것도 쉽지 않고, 공격하기도 쉽지 않을 듯했다.

결국 한쪽이 승기를 잡으면 무조건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자, 시작하라.”

그의 외침에 청년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고, 훈육관의 눈빛에도 긴장감이 흘렀다.

스윽.

아주 잠깐. 먼저 훈육관이 손을 잡아당기는 듯 움직였고, 설휘가 저항하며 본인 쪽으로 잡아당기는 그때.

투웅!

누구도 보지 못했던 발경이 한 차례 일어났다.

그로 인한 경직. 한 대 먹인 훈육관이 씨익 미소를 지으려고 한 순간.

후욱. 퍽!

설휘가 천으로 묶여 있는 손으로 일권을 내질렀다.

와당탕!

단숨에 천이 찢어지며, 훈육관은 저 멀리 날아가 버린 것이다.

“어…….”

정권(正拳).

서로 맞잡고 있던 손으로 밀어낸, 태극권의 독특한 진보반란을 변형한 진보반란추였다.

“…….”

“…….”

정적이 흘렸다.

교육생 신분으로 훈육관을 이겨버린 상황.

어린 청년들은 입을 벌린 채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고약한 훈육관과 같은 교육생의 대결. 그래서 응원을 했다고는 하나, 처참히 압도해버린 상황을 그들로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그 침묵은.

“……상태를 살피거라.”

명감 도장의 심기를 건드리기에는 충분했다.

이 상황을 주도했던 그는 온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득한 분노를 머금고 있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우루루루.

그의 말에 훈육관들은 재빨리 쓰러진 이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이놈, 듣던 대로 대단한 실력을 가졌구나.”

명감의 가늘게 뜨인 눈이 진휘-설휘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자격을 갖추어 입관했다곤 하나, 아직 무당의 적에 이름도 올리지 못한 신출내기.

근본도 뭣도 없는 녀석이, 자신을 따르는 훈육관을 때려눕힌 걸 용인할 수 없었다. 당장 그 자신의 이름에 큰 상처가 나기 때문이다.

“그리 대단한 실력은 아닙니다.”

“……호오. 이놈 봐라?”

설휘의 대답을 도발이라 느낀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대체…….’

‘큰일이야.’

지켜보던 수련생 도인들은 걱정했다.

상대를 압도적으로 이긴 것도 그렇지만, 하필 그 뒤에서 지켜보던 게 명감 도장이었기에.

그는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때론 자기 것에 편협하기까지 한 사람. 그와 맞서는 것은 곧 큰 사달이 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와도 추수를 해보겠느냐?”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명감의 제의. 그에 설휘는 아무런 표정 없이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왜? 부족한가? 아니면 이제 와서 실력을 다 펼쳐 보여 도망가고 싶은가?”

그의 도발에 설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너무 뻔한 반응이라고.

“제자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실력이 되지 않습니다.”

“하?”

설휘의 물러섬에 그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리고 뭔가 말을 하려던 그때.

주르륵.

설휘의 입가에서 피가 흐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너…… 설마?”

노기가 등등하던 명감이 아연실색하여 버벅댔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어찌 제가 훈육관님을 쓰러트릴 수 있었겠습니까?”

스르륵. 풀썩.

그 말과 함께 설휘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안색이 창백했다. 하얀 도복에 붉은 피가 스르륵 퍼져가는 걸 보고, 명감은 훈육관들에게 급히 소리쳤다.

“의원을 불러라! 심각한 내상이다!”

‘심각까지는 아닌데.’

슬그머니 기절한 척 눈을 감으며 설휘는 생각했다.

살을 주고 뼈를 치는 것.

상대가 날린 발경을, 호심공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냈다. 그러다 보니 내장육부가 뒤틀리고, 울혈이 치솟아 올랐다.

의도해서 입은 상처이긴 해도, 꽤나 고역이었다. 하지만 귀찮게 들러붙는 훈육관을 떨쳐 내기에는 이것이 최선이었으니.

‘아, 참으로 귀찮다.’

겉으로는 젊은 청년이었지만, 속은 백 살이 넘은 설휘. 그는 이제 혈기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

“서둘러라! 자칫 기혈이 역류하여 단전이 깨어질지 모른다!”

“세상에!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난리가 일어났다. 당황하는 도사들과 훈육관들. 심지어 명감조차 급히 의원실에 데리고 갈 정도로, 설휘의 상태는 위급했다.

“그것이 실은…….”

“허어……! 사람 참! 이게 무슨 사달인가!”

명감이 이실직고하다가 불호령을 맞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설휘는 그에 일부러 신음을 흘렸다.

“으으, 윽…….”

안 그러면 웃음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가혹하게 아랫사람을 다그치는 훈련관. 그에게 징계를 먹이려면 보통 방법으로는 안 된다. 윗선에 직보를 해도 먹히지 않을 테고, 사숙의 깊은 뜻을 모르는 반골로 몰리기 십상.

그래서 일부러 고육계. 두들겨 맞아서 초주검이 될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상대가 발경에 힘을 싣자, 설휘는 죽지 않을 만큼만 호심공을 조절했다.

울컥! 울컥!

‘좀 심했나.’

상황은 그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지만, 호심공을 너무 빼버린 것일까.

단전에 약간의 균열이 갔다. 덕분에 엄청난 양의 각혈을 했고, 누가 보더라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까지 만들어졌다.

“적어도 며칠은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하네.”

의원실이라고 따로 적혀 있지 않았다.

명감의 부축을 받아 허름한 도장에서 진맥 후, 시침과 탕약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자신을 혜공이라고 밝힌 노인. 의원은 뭔가 불만이 많아 보였다.

간단한 침술 이후 돈이 부족하다니, 도사 놈들이 데리고 와서 대우를 안 해줬냐니 하면서 불평을 쏟아낸 것이다.

“끌끌끌……. 무식한 놈……. 네가 혜윤 진인의 제자라서 이리 신경 써주는 것이니, 알고 있거라.”

“……감사합니다.”

사부의 이름을 거론하는 걸 보면, 이번에는 사람을 잘 고른 모양이었다. 혜명처럼 삐뚤어진 인물의 제자였다면 이런 대우는 받지 못했을 터.

“그놈이 참 속이 깊긴 했지. 낯을 너무 가려서 말이 없어 답답하긴 했어도.”

“그랬습니까.”

열심히 수련하다 훈육관에게 처맞고 앓아누운 청년 도사. 실상은 전혀 달랐지만, 겉으로 보이기엔 설휘의 입지가 대단히 좋았다.

선입견. 혹은 선입관.

무의식적으로 평소에 호감을 사게 하는 처세술이다. 이런 작은 인식들을 곳곳에 심어두면, 나중에 무슨 사달이 생겨도 ‘진휘 도인이? 에이, 그럴 리가.’ 하고 편을 들어 두는 이들이 생기게 된다.

‘장문인으로 지내본 세월이 꽤 도움이 된다.’

세간에서 흔히 정치질이라고 부르는 행동. 매사에 항상 다른 사람의 눈길을 신경 써야 했던 삶은, 설휘의 행동에 부드러운 윤활유로 작용했다.

“운 좋은 놈이구나. 다행히 단전이 아예 깨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몇 주는 조심해서 몸을 보해라.”

“예. 알겠습니다.”

운이 좋아? 그럴 리가 있는가. 의원의 진맥은 틀리지 않았지만, 애초에 단전에 일어난 균열은 설휘 스스로 복구해 버렸다.

지금 남은 상세도, 원한다면 반 시진이면 모두 회복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래서야 곤란하다.

며칠간 절대 안정! 몇 주간 주의 요망이라는 진단을 받아놓고, 다음날에 바로 멀쩡해진 모습이 보이면? 괜한 관심이나 의심을 받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지금의 설휘는 환자인 척하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일부러 요란하게 박살 났으니, 예정대로 여기서 정보를 좀 모으는 게 좋겠어.’

억울하게 두들겨 맞은 수련생.

그런 이에게는 동질감과 동정심을 가진 이들이 찾아와서 이런저런 말을 해주기 마련이다.

병상에 누운 환자는 무료하기 마련이고.

또 여차하면 아파서 잠 좀 자겠다는 핑계로, 이불만 뭉쳐놓고 몰래 빠져나가 주변을 살펴보기에도 좋았다.

갑자기 사라져도 속이 아파 측간에 다녀왔다고 둘러대면 그만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해둔 설휘의 계획은 매우 순탄케 흘러갔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을 지나던 중, 설휘는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당에 출입한 외부 사람? 그건 내가 알지. 당연히.”

“……!”

어쩌다가 말을 끌어내자, 무당의 의원으로 있던 혜공 도인. 그가 상당한 마당발임을 알게 된 것이다.

무당이 얽힌 사건을 해결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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