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화. 절대자의 의도 (1)
설휘가 무당에 온 이유는 명백하다.
저 절대자 운운하는 마신 녀석. 놈과 다시 싸우기 위해서는 현경에 올라야 했다. 아니, 정확히는 현경도 넘어선 이후의 그 너머를 보아야 했다.
극마-탈마-신마로 이어지는 길은 막혔다.
마신의 눈과 귀가 마교 전체에 쫙 깔려 있고, 교주까지 놈의 수하인 이상 능력을 기르기조차 여의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놈의 이목이 닿지 않고, 마공에 상성적 우위를 지니는 정종무공.
정파에서 무공을 수련해서 탈마와 같은 급인 현경에 오르는 것이 순서였다.
그리고 정파에서 현경에 오를 만한 곳이라면 둘.
하나는 소림이고, 또 하나는 무당이다.
그중 정도 무림의 쌍벽을 이루는 무당. 여기서 차분히 힘을 키워나가다 보면 현경에 오른 이들을, 적어도 나중에 오를 이들을 만날 수 있을 터.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당연히.’
과거 절대자란 놈이, 현경이나 탈마로의 경지 상승과 관련된 흔적들은 모두 제거했다고 떠벌렸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서적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상승 무공에서는 아주 싹을 말려놓았을 터.
하지만 현경으로 가는 길이 오로지 서책으로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무당파 같은 유서 깊은 대문파는, 최상승의 무공을 비급 따위로 전수하지 않는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했지.’
사람이 덜된 이에게는 애초에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것이 명문 정파의 고고한 자존심이고, 인성이 덜 되고 무력만 높은 제자가, 강호에서 사달을 벌이는 일을 사전에 방비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비인부전이란 말은, 때로는 성품이 아무리 발라도 무재가 뛰어나지는 않은 이들까지 걸러내는 일이 되기도 했다.
‘뜻은 좋지만, 그 결과가 비기의 실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비인부전의 원칙 때문에, 수십 수백 년이나 고유의 절기를 전수받지 못하고, 그 바람에 문파의 전력이 급감하여 쇠퇴의 길을 걷기도 한다.
당장 설휘가 전에 몸을 담았던 청성파만 하더라도 그렇게 실전된 절기가 꽤 많았다.
하지만 어쨌든.
청성의 절기 복원은 설휘 혼자만 한 것이 아니다. 당장 사부였던 청허 도인. 그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다. 그러니 무당에도 그런 사람은 분명히 있을 터.
전생에서 들었던 바로는, 혜선이라는 진인이 무예에 대단한 성취를 얻었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죽은 이후 무당의 장문인, 혜우 선인이 봉문에 가깝게 폐쇄적으로 문파를 닫았다고.
하지만 청성의 장문인으로 움직일 때 설휘가 얻은 정보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혜선만이 아니다. 신진고수 오십삼 인의 떼죽음. 이건 결코 정상적인 일이 아니야.’
냄새가 났다. 절대자 운운한 마선 그놈이 개입한 흔적이 아닐까? 오십이 넘는 젊은 청년 고수가 떼로 죽는 일은 일개 사건으로 여기기엔 의문투성이였다.
설휘는 나름 알아보고자 했지만, 정작 무당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함부로 파헤칠 수도 없었다. 타 문파의 치부를 건드리는 것은 장문인도 힘든 일이다.
그 때문에 더더욱, 무당에 들어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청년들이 죽은 후, 그들의 사숙조, 사백조들인 혜자배 장로들 또한 은거했으니까.
‘놈은 어떤 식으로든 분명 개입했을 것이다.’
그래서 설휘는 ‘무공 서적’보다 ‘사람’에 집중했다.
그리고 가장 가능성 큰 혜자배 인물 중에서도 오십삼도인과 연관된 이들을 찾아봤다.
모두 열셋.
그중 셋은 화경에 올랐다는 것까지. 최근에 알아낸 기록이다. 여기에 또 두 명이 추가되었다. 그게 바로 이들. 무당의 비고에 숨어있던 두 명의 괴인들이다.
스으윽. 스윽.
‘온다.’
뭐라고 얘기를 더 붙여보라고 했지만,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마도 살인멸구가 그들로서는 편했을 듯했다.
쩡! 쩌정!
희미한 빛이 어른거리는 정도의 어둠 속.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공세에 설휘는 뒤로 급히 물러났다.
불편했다. 상대의 무기는 단검이었고, 팔다리가 길며 날쌨다.
반면 설휘의 장검은 생각보다 제약이 있었다. 결국 몇 번의 막아냄과 함께 또다시 환환미종보. 청성의 경신술을 펼쳤는데,
- 우우우웅.
“윽?”
정신을 흔드는 귀울음에 설휘가 멈칫했다.
뼈다귀만 남은 놈이 좁은 동혈의 장점을 살린 음공(音功)을 쏘아낸 것이다.
솨아아악.
주춤하는 순간, 몸을 회전하며 달려오는 긴 놈.
설휘가 정신을 차리자, 손가락 사이에 암기로 보이는 칼날 다섯이, 퇴로까지 막으며 날아왔다.
펄럭!
그 순간, 설휘는 피하지 않고 한쪽 도복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암기 일부가 도복에 말려 들어갔고.
츠윽.
기다렸다는 듯 팽창하는 바람의 흐름. 설휘는 놈이 피하는 모든 영역에 바람의 결계를 쳤다.
예의 청풍검의 삼 초식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쿠와아아앙!
“컥!”
몇 배나 강력한 기류와 암기가 되돌아오자, 녀석은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거센 기류에 실눈을 뜨며 읊조렸고.
사아아아아--
거짓말처럼 또다시 말라깽이 앞에서 기류가 멈췄다. 그걸 목도한 설휘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량발천근을……?’
무당의 정수이기도 한, 작은 힘으로 천근을 날려버린다는 수법.
그것도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기류의 흐름을 붙잡아 둘 정도로, 무학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한 것으로 보였다.
파아아아앗!
공세는 거기서 멈춰졌다.
상대는 기류를 설휘에게 다시 돌려보내지 않고 허공에서 흩어 버린 후, 오히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꼽추 노인도 조용히 설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거 사파 놈인 줄 알았는데…….”
둘의 기괴한 모습을 본 설휘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무당의 변절자였군.”
“…….”
꿈틀.
놈들의 표정이 약간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반응은 그뿐. 잔잔한 음성으로 꼽추가 답했다.
“멀리 청성에 있어야 할 도인께서, 무당의 금지에는 어쩐 용무시오?”
“흠.”
설휘는 눈썹을 찡그렸다.
상대는 자신이 청성의 무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긴, 방금 쓴 모든 무예는 전부 청성에 몸담고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것들. 지난 세월 청성에 오래 몸담았던 때문인지. 자연스레 묻어나온 것이다.
“그저 방명록이나 들춰보러 왔소. 화경의 고수가 둘이나 지키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방명록을 왜 무당비고에서 찾으시는가?”
이번엔 꼽추가 아닌, 말라깽이 노인이 물어왔다.
“위층에 있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아래층까지 오게 되었소. 그보다…….”
설휘는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저 사파 놈들이었다면 너희 목숨만 취할 생각이었지만, 변절자라면 얘기가 다르지. 너희들은 누구냐. 여기서 뭘 하는 것이고?”
전자는 없어도 무관하나, 후자는 문책이 필요하다.
이들이 변절자인지 아닌지는 아직 무당에서 알 수 없을 거다. 아니, 파악조차 힘들 거다.
보아하니 무당의 비고를 지키는 자들. 그것도 화경의 고수면, 장문인까지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극비리에 준비해 둔 숨겨진 칼날일 수 있다는 것.
“그걸 묻는다고 대답해 줄 이유는 없는데. 오히려 우리가 묻고 싶군. 청성파가 무당의 심처에 반로환동까지 한 고수를 보내다니. 전쟁이라도 할 셈인가?”
설휘의 하대에 즉각 상대도 하대로 나왔다.
반로환동은 약간의 착각이 있겠지만, 어쨌든 실제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거침없이 대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신분이 제법 되는 모양이었다.
“명문정파의 이름이 울겠군. 무당의 고매한 원로급 고수가, 사이한 사파의 무공을 익혔다니 말이야.”
“청성이 관여할 것이 아니다. 도가의 무학이 어찌 세상의 전부이겠나? 방향이 다른 여러 무학을 공부하는 것도 자신만의 도(道)를 실현하는 방식이니까.”
“태상노군께서 가로되, 같은 물을 마셔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젖이 된다 하셨지.”
설휘의 비아냥에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도라……. 흠.”
그들의 대답에서 설휘는 한 가지를 알아냈다.
눈앞에 있는 두 노인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좋게 보면 열린 마음이었고, 나쁘게 보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독랄함과 아집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정상적인 무당의 원로고수라면, 평생 태극권과 태극검만 파도 모자람이 없다는 걸 알 텐데.
그럼에도 굳이 사파의 무공에 손을 댔다라…….
“하긴. 그렇겠지. 맞는 말이다. 어떻게든 도를 완성하기 위해서 누구의 도움이라도 받았을 것이고.”
“…….”
“…….”
슬쩍 운을 떼 봤는데 놈들은 대답이 없다.
그래도 일단 부정이 아니면 대부분 긍정 쪽에 가까운 것이 침묵이 아니던가?
그것이 그들을 더 의심하게 했다. 설휘의 표정이 조금씩 안 좋아질 때. 꼽추 노인이 나섰다.
“네놈이 아무리 뭐라 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너는 무당의 금기인 곳을 침입했고, 우리와 살수를 나눴다. 그에 대한 대가는 분명히 치러야 할 터.”
그 말에 설휘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치러야겠지. 나 역시 너희들이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청천백일 하에 드러낼 것이다.”
“뭐라?”
“잘도 그러겠군.”
피식피식 대놓고 비웃어 보이는 노인들.
그들도 그럴 만했다. 세상 어느 고수가 무당파의 무공을 근본으로, 다른 사파의 무예가 섞여 있는 것을 한눈에 보고 알아차리겠는가?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강호의 무공은 너무나 광범위하다.
단순히 무공. 내공 심법. 그걸 기반으로 펼치는 무공만으로 뿌리,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상대가 본인 입으로 모든 무공을 털어놓지 않은 이상.
더욱이 화경까지 오른 고수가, 특정 무공 하나만 단련했겠는가.
아무리 다른 문파의 것을 배웠다 해도, 기존 무당의 무공에 섞어 녹일 수 있다. 자신만의 깨달음과 성취를 부어 넣어 전혀 별개의 무공으로 만드는 것이다.
화경은 그런 것이 가능한 경지다. 상대가 세상의 무학을 다 안다고 자신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닌가.
‘알 수 있어. 그 방법을 쓴다면.’
하지만 설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정확히는 하나만 확인해 보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경지 변환의 ON/OFF.
그간 시스템에서 벗어난 이후로 써 본 적 없는 기능인데, 오랜만에 쓸모가 생겼다.
화경의 경지를 전환해서 극마의 경지로 바꾼다면,
저들이 어떤 무공에 손을 댔는지, 정확히는 마공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그것만 알면 충분하다.
스으으으.
설휘가 몸에 변화를 주자, 이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파악하는 것이다. 약점인지. 아니면 약점을 보여준 뒤, 오히려 역공을 취하려는지.
하지만 그들로서는 저런 변화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들을 발을 잠깐 묶었고.
‘상단전 내 의상점을 기준으로 바꾸면 된다. 받아들이는 기운을.’
청성파에서 얻은 깨달음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하늘에서 땅으로 뻗는 기의 흐름. 기운을 받아들이는 순간 정파의 내공을 마기로 변형시키고, 흐름을 몸에 맞기며 순간 눈을 뜨자.
솨아아아---
시간이 멎는 듯, 정말 한순간에 모든 게 변했다.
눈앞에 도는 기운의 바람. 그 색이 점점 짙어졌고, 두꺼워졌다.
화르륵!
종국에 그 기운은 먹구름처럼 잿빛을 보이다가 이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 무슨!”
“넌 누구냐!”
설휘의 몸을 감돌던 기류가 바뀐 건, 그들도 느꼈다. 그저 단순히 내공의 발산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변형되었다는 것.
더 놀라운 건, 그 기운이 마기와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휘이이이잉-
한편, 극마에 도달한 설휘 역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묘하게 퍼져나가는 그들의 기운의 근원을 훑고 있었다.
“역시나, 그 개자식이 개입했군. 너희들은 잡아서는 안 될 놈의 손을 잡았어.”
설휘의 눈이 잔뜩 가라앉아 매서운 살기를 풍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