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절대자의 의도 (3)
강호로 나와 청성의 장문인까지 되고 나서, 설휘는 한 가지 느낀 게 있었다.
바로 세상의 삶이, 시스템처럼 편리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
선택지문은 그에게 곤란한 상황을 겪게도 했지만, 정해진 답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줬다.
또한, 환생해서 바른 답을 택할 기회를 다시 만들어주기도 했다.
즉,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줬다.
예상치 못한 지문이 답이 되기도 하지만, 승리와 실패를 명확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허나, 삶에는 답이란 게 없다.
누군가가 내게 필요한 사람인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인지. 처음부터 알지 못한다.
옳고 그름이 눈앞에 보이지 않기에, 결국 자신의 마음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를 매겼다.
눈으로 노력의 결과를 명징하게 확인할 수도 없다.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추측만 할 뿐이다.
이처럼 시스템 내에선 간단하게 수치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일반적인 삶에서는 평생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범인(凡人)의 삶이다.
‘이건…….’
그러나, 설휘는 지금에 이르러선 시스템에서 벗어난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장난질로부터 벗어난 것을 제하고도.
그저 시스템에서는 ON/OFF로 단순하게 대변되던 경지의 변화가, 지금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내비치고 있었다.
화경과 극마.
그 변화의 틈에서 제3의 기운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살랑.
다시 나타났다.
잿빛의 기류. 청풍의 정순한 기운과 마공의 음험한 기운이 한 지점에 태극처럼 맞물리면서 생겨나는 현상.
스륵.
그건 마치 무지개와 같았다. 손을 뻗어 만지려 하자, 예민하게 반응하며 또다시 사라졌다.
‘아…….’
안타까워하던 설휘가 고개를 조금 돌리자, 때마침 적들의 강력한 힘이 쏘아지고 있었다.
솨아아악.
핏빛을 머금은 광채를 향해 설휘는 손을 내저었다.
전력을 다한 사량발천근이었다.
‘뭐야…….’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본래 어떤 기운이라도 손의 움직임을 따라 흘려버리는 수법인데, 설휘가 뻗은 손끝을 따라오지 않는 것이다.
제3의 힘은, 아무래도 정종무공의 역량에는 구애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타앗.
반사적으로 환환미종보를 펼쳤지만,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이미 늦은 상황에서 일부의 공격을 맞은 탓에, 환영은 겨우 셋.
츠즈즈즉.
거기다 진한 녹색의 독기가 허공에서 그물처럼 펼쳐져, 피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조여오자, 설휘는 결국 일격을 맞고야 말았다.
“큭!”
비틀.
본신으로 돌아온 설휘가 몸을 주춤거렸다.
지지지직.
독공이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피부가 타들어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우려하던 대로 몸에 닿자마자 조직을 괴사시키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게 무슨…….”
후욱!
즉각 몸의 기운을 끌어내 호심공으로 보호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는다.
이미 기운 자체가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방법으로는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클클! 거의 다 잡았군.”
설휘가 휘청이며 자리에 주저앉자, 꼽추 노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미 핏빛의 기류가 기혈을 타고 들어가 박살을 내놓았거나, 독공으로 인해 전신에 마비와 괴사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을 터.
더는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자신들의 합격에 이 정도로 오래 버틴 녀석의 정체가 궁금하긴 하나, 그거야 뭐. 곧 알 수 있을 터.
“네놈이 죽으면, 배를 찢어 오장육부를 이 두 눈으로 살펴봐 주마. 인간이 아닐 수도 있으니.”
말라깽이는 섬뜩하고 잔혹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었다. 완전히 승리를 확신하는 그 눈빛을 보고도, 설휘는 신경 쓰지 못했다.
그의 눈은 그저 여전히 ‘그것’을 좇고 있었다.
‘또 보였다. 이번엔 길어…….’
희끗.
멀리서 잠시 나타나던 그 기운은, 한 지점에 머물더니 이번에는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혹시나 하여 힘겹게 손을 내밀어 보았다.
아까처럼 도망가지 않을까란 걱정이 들었지만.
사락.
기운은 이전과 달리 깃털처럼 사뿐하게 그의 손등 위에 내려앉았다.
‘초겨울의 눈…….’
그 아스라함은, 날씨의 변덕으로 갑자기 내린 첫눈과도 같았다.
신기하게 손 위에 내려앉았지만, 언제든지 스르륵 녹아들어 사라질 작은 눈송이처럼.
설휘는 이게 상황을 바꿔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이런 미세하고도 나약한 힘이 어찌 제3의 힘일까, 하는 생각만 할 뿐.
“끝내지.”
“키킥.”
노인들은 이미 처형할 준비를 마쳤다.
이번에는 단단히 작심하고 모든 힘을 발출할 요량으로, 핏빛 강기를 무려 다섯 자로 팽창시켰고.
고오오오-
두 손에 독광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며 천장까지 그 위력을 뽐냈다.
꼽추는 이내 신호를 줬고.
“죽어!”
“캬!”
핏빛과 시퍼런 독광이 멍하니 주저앉은 설휘에게로 쏟아졌다.
‘움직이나?’
설휘도 지금 이 순간이 절체절명의 상황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실오리처럼 흔들거리는 회색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궁금했다.
‘……생물인가?’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잿빛이 꿈틀거리며 손끝 아래로 파고들고 있었다.
대체 이 녀석이 무엇을 하는지, 설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스르륵.
녀석은 몸속으로 들어가더니 기혈을 감싸며 이내 점점 확장했다.
그리고 그 속도는, 눈 깜빡할 시간이면 충분했다.
설휘의 몸의 모든 기혈과 기맥까지 휘저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크읍.”
두둥!
그리고 온몸에 경련이 한 번 왔을 때, 설휘는 녀석이 이미 온몸을 잠식했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노인들의 공격도 함께 확인했다.
설휘가 존재하고 있던 흔적 자체를 지우려는, 절대적이고 어마어마한 힘.
‘반격할 수 없구나. 이번 생은……. 어?’
자연스럽게 모든 걸 내려놓으려던 그때, 설휘는 혼란스러운 감각을 느꼈다.
두웅.
가진 힘은 내공만이 아니었다.
중단전에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미증유의 힘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흡!”
그는 이 중단전의 힘을 통해 반격했다. 사방을 덮치고 있는 저들의 힘을 향해.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잿빛의 기류 하나가 전부였다.
***
궈오오오------
처음에 일어난 현상은 바람 소리였다.
청풍이라는, 청성파의 내공이 바람으로 화하는 현상을 겪었기 때문인가, 설휘가 처음 사용해 본 제3의 힘은 분명 바람을 근본으로 했다.
다만 청풍이 검 끝에서 피어오른 바람이라면, 지금의 바람은 돌개바람.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뻗은 복잡한 지형 환경에서 몰아닥치는 바람이었다.
“이건 뭐…….”
“무슨 소리야?”
그리고 그걸로 끝.
잠시 긴장했던 두 노인은, 곧 두 손을 내밀고 있는 설휘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발버둥으로 제법 재미있는…….”
드드득!
“……뭬야?”
말을 하다 말고 움찔하는 두 노인.
소리에 이어 현상은 뒤늦게 닥쳐왔다.
설휘의 가슴 어림에서 갑자기 연기처럼 피어나는 힘의 반동.
처음에는 다소 초라하게 보였다.
형형한 핏빛의 광채나, 소름 끼치는 녹색의 독기 그물에 비해, 설휘가 일으킨 힘은 그저 거무죽죽한 것이, 종이를 태워 연기라도 피워올린 것 같았으니까.
솨아악.
하지만 그 검은 연기는, 갑자기 이는 바람처럼 퍼져나가, 삽시간에 붉은 광채와 녹색 그물을 집어삼켰다.
부우욱.
가죽 북을 찢는 것 같은 괴이한 소리.
하지만 그다음에 일어난 현상은 어마어마했다.
검은 바람은 두 노인의 기운을 삽시간에 지워버렸다.
“뭣?”
“어엇?”
놀란 것은 두 노인만이 아니라 설휘도 마찬가지.
그는 단 몇 초 전만 해도 이번 생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궈어어어!
하지만 반쯤 튕겨내듯이, 얼결에 사용한 힘은 소름이 돋도록 강력했다.
처음에 살짝 세상에 나온 검은 바람은, 삽시간에 그 덩치를 키워 두 노인의 힘을 잡아먹은 다음. 마치 그림자가 내려앉듯, 폭발적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구우우우우!
“헛!”
“이런!”
세상 만물에서 가장 빠른 것은 빛이다.
혹은 빛이 닿지 못한 그림자다. 그 그림자가 뻗어 오는 속도에 두 노인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후륵. 훅.
반사적으로 경신법을 쓴 꼽추는, 천장 어림에서 두 다리가 잘려 나갔고.
“컥. 으아악!”
그보다 더 늦게 반응한 말라깽이 노인은 얼굴부터 목까지 형체가 사라져 있었다.
“…….”
퍽. 털썩!
검으로 도려낸 듯이, 말끔한 절단면. 창졸간에 머리를 잃은 목이 투쿵투쿵 피 분수를 뿜어낸다.
“이 무슨 힘이…….”
그 모습은 너무 충격적이라, 지켜보던 설휘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전 곤마가 사용했던 절대적인 힘.
아니 그 백분의 일도 안 되는 부족한 힘이었다.
그럼에도 두 화경 고수가 발휘한 제3의 힘을 씹어 먹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다르다. 완전히 달라.’
설휘는 방금 중단전에서 발생한 그 기운을 되새겨 보았다.
보통 검을 든 무사가 절대반열에 이르면, 검에서 빛이 나는 검강을 발휘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각 문파의 오랜 경험을 통해, 최상승 무공은 각 문파의 특성을 통해, 검강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기운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제3의 힘은 이보다 한 단계 더 높은 힘.
자연의 힘이 아닌, 타계의 힘을 사용한다.
당연히 보통의 인간은 사용할 수 없고, 화경이나 극마에 오른 이만 사용이 가능했다. 그런 절대적인 힘.
‘증폭. 폭발. 둘 다 아니다. 그런데…….’
확산이라 해야 할까. 무당파의 두 노인이 쏟아낸 선명한 광채에 비해 설휘의 반격은 볼품이 없었다.
선명한 빛도 아니었고, 정종무공과 마공의 결합이 되다 만 것 같은 어설픈 힘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적 같은 위력을 보였다.
“크으으. 으으으…….”
“…….”
꼽추 노인이 흘리는 신음에, 설휘는 현실로 돌아왔다. 설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현현자시여…….”
“……?”
예상 못 한 반응이었다. 죽는 마지막까지 표독스런 말을 할 것으로 생각했던 꼽추 노인의 시선에는, 경외와 안타까움. 그런 것이 깃들어 있었다.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콧물도 입가에 고여 침으로 뒤엉켜 있었다.
“나를 아나?”
갑자기 무슨 소리냐. 싶었지만, 일단 상대의 착각에 어울려줄 생각으로 물었다.
그러자 꼽추가 콸콸 피를 쏟아내는 다리를 하나로 모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늘 기다렸습니다. 무당을 밝혀 줄 빛을. 그동안 너무, 너무도…… 힘들었기에, 아님을 알고서도 금기에 손을 댔습니다.”
“…….”
설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보았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이 절박한 태도는 왠지 모를 진심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기에.
“저희의 수양이 부족했습니다. 흔들리지 않아야 하거늘, 보이지 않는 어둠에 갇혀 결국 과실을 탐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정말로 잘못했습니다.”
과실이란 건 아마도 제3의 힘을 말하는 것일 터.
놈들의 대화 중, 도(道)의 기준 역시 바뀐 것이 아마 그것일 것이다.
수년, 수십 년간 갇혀 살던 그들에게 제3의 힘은 어찌 보면 생명수 같은 것이리라.
“네가 말했던, 너희를 포함한 네 명이 사도의 길을 걸었느냐?”
설휘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저희가 파악한 것만으로 그렇지만…… 더 많을 겁니다. 마음과 몸을 단련하는 것은 힘든 일이고 고된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양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누구라도 눈을 돌릴 겁니다.”
설휘는 꼽추의 말이 변명이 아님을 알고 있다.
수양이나 참선, 수련 등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몸이 고되고 마음이 고되다.
그걸 오랫동안 하면서 경지 상승을 이루지 못하면, 당연하게도 더 큰 힘을 향한 유혹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더 많다니……. 어느 정도까지 깊이 관여한 것인가.’
걱정스러움에 설휘가 잠깐 침묵할 때.
“그리고 현현자시여…….”
꼽추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마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낀 것을 터.
“아마도 방명록에 그자는 없을 겁니다.”
“……무슨 뜻이냐?”
“스스로를 절대자라고 칭하는 그자, 그는 하늘에서 전음으로 계시를 내렸습니다. 저희에게도 진실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니…… 무당파에 있지 않을 겁니다.”
“…….”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 말은 맞는 듯했다.
무당파는 세속의 다른 문파와는 궤가 다르다. 그들에겐 세상 만물을 설명하는 태극의 도가 있다.
그리고 마선. 그놈의 목적은 현경에 오르는 길 자체의 차단이다.
나름 무공도 높고,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마저 강고한 무당의 도사들을, 영원히 현경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아마도 유혹과 타락.
놈이 직접 와서 기기묘묘한 선술이라도 직접 보이지 않는 이상은, 무당파를 흔들기란 쉽지 않으리라.
“알겠다. 기억하마. 마지막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너희들의 모습을.”
“고맙습니다. 소인은 이제 편히 갈 수…… 갈…….”
회광반조가 짧게 일어나고서 그는 숨을 거뒀다.
마치 설휘가 해줄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젠 여한이 없는 사람처럼.
“현현자라…….”
무당파 시조의 도명을 말함이다. 아마도 싸움 마지막에 보인 초월적인 무위에, 무당의 절대자가 내려와 자신들을 구원하려고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듯했다.
“걱정이구나. 네 명, 그 이상이라니…….”
설휘는 이들을 퇴치하고, 제3의 능력을 얻었음에도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절대자의 마수에 사로잡혀 있는지, 직접 보지 않고선 해결하기 힘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