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조작 (2)
진구의 부상으로 도관의 분위기는 썰렁했다.
일부는 의원실로, 또 일부는 다친 진성의 상태를 보기 위해. 그리고 진강은 진무관주와 함께 사라졌다.
“잠깐, 대화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직 안 갔나?”
그 가운데, 옷매무새와 서류를 대충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명철을 설휘가 붙잡았다.
“예. 말씀 좀 나누기 위해 남았습니다.”
“얘기는 무슨 얘길……. 가만? 네가 이번에 들어온 걔로구나.”
명철은 잠깐 설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말고, 뭔가 기억을 해낸 듯 보였다.
이번에 입관하여, 수업에 참관한 진휘.
당장은 진자배 항렬을 달고 있지만, 원래라면 명자배 항렬을 달았어야 할, 혜자배 도인의 제자.
“그렇습니다.”
“헌데…… 무슨 얘길 나누고 싶은 게냐?”
“들어보시면 압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흐음.”
잠시 주변을 바라보던 명철. 그러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한번 들어보자꾸나. 따라오너라.”
‘흐음…….’
그 모습이 약간 의외였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다. 꿍꿍이가 있다면 바로 바쁘다며 피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박자박.
도관 왼편에 탁자와 앉을 자리가 있었다. 명철이 그곳에 두툼한 서류를 내려놓은 후 말했다.
“그래, 무엇이 궁금하느냐.”
“배움을 얻으러 온 도인들에게 어떤 기억을 심어둔 겁니까?”
“……?”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한 반응이었다.
“앞서 마룻대에 오른 진강. 그의 머릿속에 무엇을 심어놓았냐고 묻는 겁니다.”
“심어놓았다고?”
그는 오히려 되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번 수업의 방향이 아이들의 호승심을 자극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태극권의 방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방식 또한 예전에는 없었던 것이지. 헌데, 갑자기 뭐? 기억을 심어두었다고?”
“나름 이대제자 중 뛰어난 이들을 뽑아 만든 오십삼도인입니다. 그들 중 하나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도, 제지하지 않는 것도.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만드셨던 거 아닙니까?”
“하아. 물론 이번 수업에서 내가 과했던 점은 따로 지적받을 것이다. 내 불찰이니 그건 인정하마.”
미간을 좁히며 명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담담하여, 설휘는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허나 그렇다고 근거 없는 의심은 하지 말거라. 나는 무당을 위해 모든 걸 바쳐온 사람이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방식을 행하는 것도 좀 더 나은 방향을 찾기 위한 방편이지.”
“…….”
“하지만 매번 그런 시도를 할 때마다 이런 의심을 받는다면, 누가 의욕을 가지고 가르침을 제대로 펼 수 있겠는가? 그저 똑같은 일상에, 똑같은 말의 반복이지. 그건 오히려 잘못이 되네.”
아무리 유서 깊고 전통을 중시하는 옛 문파라고 해도, 십 년이 지나고 백 년이 지나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길을 후인들이 세우게 된다.
혹은, 문물이 발달하거나 해서 옛 선인들의 기준과 오늘을 사는 후인들의 기준이 크게 바뀌는 경우 또한 있다.
당장 남아수독오거서. 남자가 배움을 하려거든, 수레 다섯에 실린 책을 모두 읽어야 한다는 옛 고사성어가 있다.
하지만 말이 수레 다섯에 실린 책이지, 그 책의 단위가 당시에는 대나무 안쪽에 글을 새긴 죽간이라는 걸 생각해 보아야 한다.
크고 두꺼운 대나무에는, 글자 수가 많이 적히지 않는다. 제지법이 개선된 지금 시대에, 수레 다섯 분량의 대나무에 적힌 글자량을 책으로 모아 보면?
수레 하나도 제대로 채우지도 못할 정도다.
이처럼 옛것이라고 해서 항상 뛰어난 것이 아니다.
‘이거…… 내가 잘못 짚었던 건가?’
이것저것 생각해 보던 설휘는 순간 머뭇거렸다. 듣고 보니 이 또한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명철의 눈빛에는 진심이 가득해 보였다. 아니, 그것이 넘쳐 보였다.
그러니 지금은 갑자기 과도하게 날뛴 진강, 그에게 명철이 무엇을 했다고 따질 만한 근거도 없었기에 더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나가도 되겠는가?”
“……예.”
그의 말에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고, 명철은 태연하게 설휘의 옆을 지나쳤다.
“잠깐.”
그러다가 다시 뒤돌아선 명철.
그는 갑자기 설휘를 빤히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너에게도 선경(仙境)이 보이는구나?”
“……예?”
선경(仙境).
신선들이 산다는 도가의 이상향을 부르는 말.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명철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다.
“그래. 너도 가능할 수 있어. 애초에 뿌리부터 다르긴 했지.”
스으윽.
천천히 다가오는 명철.
잔뜩 충혈된 눈빛에, 번들거리는 광기. 이건 뭔가 이상했다. 진강에게서 받은 그런 불길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와 시선이 맞은 어느 시점에.
“……!”
머릿속이 뒤흔들리는 착각과 함께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빛의 형태는 투과였다.
과거에 있던 자신의 무력감, 고통. 그리고 분노로 이어지는 거대한 감정의 줄기가 선명하게 그어진 것이다.
‘……읍.’
허나, 거기까지였다.
몇 번에 걸친 회귀의 기억들은 거대한 감정 줄기를 잘라내 버렸고, 또 억눌렀다.
또한 시스템과 분리되는 과정에서 완전히 그 힘을 무력화시켜버렸다.
이후, 자연스럽게 현재의 상황으로 돌아온 설휘는.
“너…… 누구냐.”
충격으로 몸을 떨고 있는 명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어떻게 이걸 파훼한 것인지…….”
“정신계의 제3의 능력이라, 정말 이런 것도 존재하는구나.”
설휘가 말하자, 그는 더욱 당황하며 눈깔을 굴렸다.
데굴데굴.
마치 인간의 눈이 아닌, 동물의 뭔가를 덧씌운 것 같았다.
겁 없이 사람을 건드렸다가 호되게 한 대 맞은 후, 도망갈 방향을 찾는 동물.
“그 힘, 누가 주었나.”
“으으…….”
설휘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허나, 그는 대답하지 않고 연신 눈을 굴리기만 했다.
“할 수 없군. 힘으로 불게 할 수밖에.”
츠으으으으---
설휘가 집중하자, 기류의 파동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명철 진인이 빠르게 기수식 자세를 취했지만, 이미 늦었다.
퍼억!
기습적인 정권 한 방을 막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고, 휘청거렸다.
설휘의 신법이 빠르기도 했지만, 상대의 대처도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았다.
파앗.
정신을 차릴 기회를 주지 않고 이번엔 근접전으로 붙었다.
“윽!”
명철이 자연스럽게 태극권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소용없었다.
하단 차기에 이은, 상단 발차기.
어깨 밀기와 한 손을 잡고 밀어 당기기.
주먹질 몇 번을 연계하자, 제대로 된 방어 없이 얻어터지기만 했다.
펑. 펑. 퍼벅!
상대의 무공이 태극권이 아니라서 그럴까.
아니면, 너무 당황해서 그대로 허용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쿠웩.”
코뼈가 부러진 그는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걸 본 설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이 정도 실력인가?’
싸우는 순간 깨달았다. 상대는 이제껏 봤던 명자배 고수들보다 한참이나 떨어졌다.
물론 이미 화경에 오른 설휘라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3의 능력이…….’
정신을 비틀어, 감정을 치솟게 하는 방식.
설휘는 왠지 이것이 관음증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신의 실력을 높이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며 감정을 조절하여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그런 능력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스윽.
설휘는 이제 확실히 때려눕힐 마음으로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번엔 그의 앞을 막아선 이가 있었다.
“이쯤 하지. 진휘.”
“……언제 오셨습니까.”
진무관주. 그가 자신을 앞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저 녀석은 자네 상대가 되지 않아. 자네가 궁금해하는 건, 내가 말해주겠네.”
그의 눈빛은 평소와 달리 매우 가라앉아 있었다.
어쩐지 측은해 보인 건, 아마도 안타까움보다 부끄러움이 큰 것으로 보였다.
지금은 무당파의 치부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으니까.
***
저벅. 저벅. 사사삭.
바람이 불어왔다. 설휘와 진무관주는 무당파 주변을 한참을 걸었다.
사방으로 빼어난 경관, 그리고 상쾌한 바람. 당연히 마음이 가벼워져야 하거늘, 외려 걸을 때마다 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건 진무관주도 마찬가지였다.
자박. 자박. 자박.
어두운 표정으로 걷기를 이각.
한적한 공간에 걷기까지 그의 감정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렇게 주변에 인기척이 없을 만한, 숲속의 어느 공터 안으로 들어왔을 때쯤.
“네 말이 맞았다. 진휘.”
그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솔직히 인정했다.
작금에 벌어진 사태를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몰랐던 것도 있었구나. 명철 사제까지 저 형편없는 능력을 받아들일 줄이야…….”
‘형편없는’이란 말에 힘을 주는 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노기가 담겨 있었다.
절대적인 힘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라, 감정을 흔들어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을 부추기는, 어찌 보면 술법에 가까운 능력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사도(邪道).
“제자의 짧은 생각으로 볼 때, 저 제3의 힘이 퍼뜨려진 목적은 뚜렷합니다. 당장은 강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실제로는 무당의 정신을 뒤흔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 같군.”
설휘의 말에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희로애락과 번뇌에서 벗어나 차분히 마음공부를 하는 곳이 도가이거늘.
다른 곳도 아닌 무당파의 무인이 이런 사마외도의 능력에 손을 대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사멸조. 전통과 역사를 똥통에 처박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무당에 이러한 기운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무엇보다 어떤 이가 익히고 있는지, 얼마나 퍼져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준다고 했지?”
시선을 돌려 경관을 바라보던 진무관주가 말했다.
설휘는 그가 편히 말하기를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그래, 맞다. 네가 본 게 무당의 현실에 매우 가깝다. 제3의 힘, 우리 명자배 고수들이 익히고 있을 것이다.”
“…….”
“아니, 더 정확히 말하지. 그 힘, 나도 익히고 있다.”
“……!”
설휘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듣긴 했었다. 하지만 직접 스스로 말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는 그만큼 무인으로서 치욕스런 발언인 것이다.
“화경을 얻은 날, 세상을 가진 듯했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더 높은 성취를 이루고자 했다. 그리고 벽에 부딪칠 때마다 필사적이었지. 어쩌면 중독되었단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진무관주는 잠깐 과거에 취한 듯한 눈빛을 보였고, 이내 말했다.
“세상을 뒤흔드는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만족하지 못했다. 거의 십 년간 정체 현상을 겪으니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마음의 수양도, 경지 상승을 바라보는 내게는 치유가 되지 않았다.”
“…….”
그는 천천히 설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쯤, 그 힘을 만났다. 또 다른 경지 앞에서 좌절하던 그때, 나에게 제안을 하더군. 하늘의 힘을 주겠다고.”
그는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번쩍하며 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뇌기입니까?”
그걸 본 설휘가 놀라며 물었다.
“그래. 어쩌면, 천하제일고수가 되는 힘. 누구와 싸워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도…….’
솔직히 긴장했다.
뇌전이라면 제3의 힘 중에서도 화경에 오른 이에게 부여된 가장 강한 힘이다.
다른 말로 무당에서 제일 강한 힘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을 진무관주가 가지고 있었다니.
“어찌하면 되는가……. 예언자여. 이 사태를 어찌하면…… 좋은가.”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전부 바쳤던 태극의 힘.
그보다 더 강한 힘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의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