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뮬레이션-380화 (359/379)

80화. 제안 (1)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글쎄다. 계기라…….”

설휘의 물음에 진무관주의 눈이 세월을 거슬러 올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방향을 알 수 없는 힘, 제3의 힘이라 불리는 정체 모를 힘. 그것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무당에 평생을 바친 충직한 사람이자 제자였다.

아니, 불경스러움이 없지 않음을 알고 있었던 제3의 힘을 몸에 담은 지금 역시, 그는 무당을 위해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 있는 그런 남자였다.

그런 그가 어쩌다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인가?

가장 근원적인 물음에 진무관주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힘에 대한 갈구, 자신의 능력의 부족, 무당이 더 이상 상승으로의 길을 열어 주지 못하는 현실.

그 가장 근원, ‘더 강해지고 싶다.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생각의 뿌리에는, 헤아릴 수도 없는 예전의 깊은 상처가 존재했다.

“마교에…… 살마라는 놈이 있었지.”

그 말에 설휘의 눈이 삭, 하고 좁아 들었다.

생각도 못 했던 인연, 악연이 이어져 있었다. 때는 약 20년 전.

천마의 제자가 된 살마. 그는 세상이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 첫 살행으로 강호 백대고수 한 명을 죽였는데, 그게 바로 무당의 태상장로 혜선 진인이었다.

“내 사부시네. 불초한 제자를 가르치시려다, 다른 곳도 아닌 무당의 산문 앞에서 목이 베이셨지.”

“…….”

설휘는 무어라 말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아버지처럼 따랐던 사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도했던 진무관주. 그가 받았을 충격과 이후로 느꼈을 자괴감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감히 유감이라는 입에 발린 말을 함부로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일은 정도문파에도, 우리 무당파에도 충격을 주었지만……. 모르겠네. 나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지. 그것이 평생을 가더군.”

“…….”

“허허. 그릇이 좁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네.”

“……어찌 그리 말하겠습니까.”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지만.

힘이 없는 정의 또한 무용.

그걸 직접 느낀 것이 바로 진무관주였다.

마교의 주구에게 산문 앞에서 자파 최고의 고수가 살해당한 일을 겪고도.

무당의 장문인은 복수를 천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당파의 대외활동을 극단적으로 축소시켰다.

“물론 장문인도, 나름 복수를 위한 명분을 포기하지는 않으셨지.”

그 후 어느 때부터인가 무림맹은 갑자기 태극선혈, 태극오의 등 무당파 비전의 무예를 배포하며 익히기 시작했다.

강호의 사람들은 혜우 선인이 장문인 권한으로, 무당파의 모든 정예를 모아 은인자중 칼을 갈고 있다고 추정했다. 애초에 무당의 비전절기가 강호에 돌아다니는데, 장문인이 관련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네. 감히 장문인께 이것으로 만족해야 하느냐, 무당의 핏값이 그토록 가벼운 것이냐고 항변하기까지 했지.”

“그렇군요.”

설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리 몸담은 곳이 무당이라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유서 깊은 문파의 사정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 하나.

혈육이나 다름없는 사부의 죽음에, 모든 것을 묻기란 쉽지 않다. 친지의 죽음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 또한 자연의 섭리이고 사람의 당연한 감정이 아니겠는가.

“사정은 알겠습니다. 허나 문제는 이제까지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겠습니까?”

“자네 말이 맞네……. 그래, 뭔가 생각이 있으신가?”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당을 대표하는 고수들 앞에서, 저와 대련을 하는 것입니다.”

“뭐라……. 대련? 너와?”

“예.”

진무관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설휘의 무당파에서의 도명은 진휘.

사부가 혜자배의 사람이니, 배분을 따진다면 명휘. 같은 일대제자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체 무슨 말이냐? 너와 내가 대련을 해서 무슨 결과를 보자고?”

비록 같은 항렬이라 해도, 입문한 시기를 따지면 그는 막내 사제의 처지다. 진무관주에까지 오른 자신과 무위를 비견할 수준이 아니다.

그러니 겨룬다면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왜 굳이 사람들 앞에서 대련을 하라는 말인가?

“관주께서 그리 보신다면, 다른 이들도 당연히 그렇게 보겠지요.”

“음?”

“그 생각을 부술 때, 모두의 생각이 크게 흔들릴 겁니다. 그때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겠지요. 갑자기 등장한 제3의 힘과 순수한 무당의 무공, 어느 쪽이 더 강한지에 대해서요.”

“…….”

진무관주는 이때까지만 해도 설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제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렸던 것이다.

“설마하니 자네……. 나를 상대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예.”

“허……?”

진무관주는 뭔가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예지력이 조금 있지 않습니까? 제 생각엔 진무관주님과 대련을 해도, 제압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제안하는 이유가 고작 그것인가.

애초에 눈앞의 이가 자신을 이길 수도 없는 거겠지만, 제안 자체도 황당하긴 했다.

솔직히 그의 시선으로 지금 무당의 무공은…… 자신의 제3의 힘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쨌든 그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제3의 힘, 그중에서도 최상위에 달하는 진무관주님의 힘과 겨뤄서 이겨야, 무당 전통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릴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제3의 힘. 나쁜 목적을 가지고 무당에 뿌려진 기예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다양한 형식으로 퍼졌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이참에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서열 4위의 진무관주 자신이, 태극이 아닌 제3의 힘을 사용하는 모습을.

그럼 다들 한 가지 위안이 될 것이다. 자신만 그 힘에 정신을 뺏긴 게 아니리라고.

그런 상황에서 제3의 힘을 이기는 무당의 고수가 나온다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참회할 것이다.

“자신 있느냐?”

다만, 그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했다.

제3의 힘을 무찌르는 자의 실력이 뛰어나야 하고, 누구도 무당의 무예임을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진무관주의 눈에 설휘는 그만한 고수로는 보이지 않았다.

“좋은 제안이긴 하나, 너는 절대 날 이길 수 없다. 그나마 믿을 만한 고수를 생각해 보면…… 무당 장문인밖에 없어.”

“뭐, 상관없습니다. 다만 제게도 대련을 하기 전에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

“제게 무당의 정신, 근원이 무엇인지. 진무관주께서 알고 있는 것들을 알려주십시오.”

사실, 누가 봐도 이상했다.

어찌 보면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제3자였던 사내가 무당의 힘으로, 본산의 무학을 배운 노고수가 제3의 힘으로 대결하는 것은.

“그래. 너를 통해 답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전력으로 도우마. 다만, 나 역시 제안을 하마.”

설휘는 생각했다.

진무관주 같은 고수가 제3의 힘에 이끌린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절대자가 무당에 개입한 이유는 확실하다.

‘두려움. 지독한 경계심이 엿보인다.’

어찌 보면 놈은, 무당에서 현경의 고수가 태어나리란 걸 확신한 듯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더러운 개입을 할 이유가 없었을 터였다.

그랬기에 설휘는 진무관주를 통해 무당의 정신을 배우고 싶었다.

확률상 제3의 힘에 의지하는 그보다, 무당파의 무공을 배운다면 자신이 먼저 현경에 도달하기가 가능해 보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무당을 대표하는 고수의 지도가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진무관주의 힘을 빌리고 싶었다.

참 재미있다고 말해야 할까.

구구절절 사연이 엇갈리는 상황이었다.

무당에 평생 몸담은 노고수는 제3의 힘을 찾게 되었고, 평생을 마교에 몸담았던 설휘의 인생은 무당파, 무당의 무공을 증명하는 길로 가게 되었다.

지금 상황에선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었다. 결과로 보여 줘야 했다.

제3의 힘. 자연계 중에서 가장 강한 뇌전.

어찌 보면 탈마에 올라서야 비로소 제대로 사용 가능했던 그 힘을 무당의 무공이 대응이 가능한지.

설휘로서도 커다란 숙제였다.

***

“한 달 뒤 정도. 때마침 태화중정에 장문인의 주제로 열리는 회의가 있다.”

진무관주는 설휘와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웠다.

제3의 힘을 공론화하고, 무당의 무공에서 답을 찾기로.

이는 자신은 물론이고 문파의 안위까지 거는 도박이다. 자칫하면 오히려 무당이 무너질 수 있다.

아직 마교가 득세하는 와중이니, 오히려 자중지란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때문에 그만큼 전력으로, 최대한 세심하게 모든 방향을 다 고려해야만 하는 형국이었다.

“무엇을 배우고 싶으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설휘를 향해 진무관주가 물었다.

처음 대안을 꺼낼 때와는 달리, 며칠을 무리에 대해 논하면서,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눈앞의 젊은이, 명자배의 마지막 사제가 가진 무론은 깊이도 깊었고 범위 또한 넓었다.

이 정도라면, 자신은 풀지 못한 난제를 해결해 줄지도 몰랐다.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자, 그리고 무당에 퍼진 제3의 힘을 아는 자. 무엇보다 그 능력이 자신의 생각을 훨씬 상회한, 화경에 오른 자라는 것.

그것이 약간의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좀 막연하군요. 솔직히 요 며칠 제게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눈 밑에 기미가 검게 낀 설휘가 피로한 얼굴로 마른 세수를 했다.

사흘 가까이 철야하며 고민한 것. 그 끝에 그가 얻은 해답은, 다소 막연한 결론이었다.

“저에게 당장 필요한 것보다, 저에게 무엇이 부족하다는 걸 더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다. 아주 좋은 출발점이다.”

그 말에 진무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것을 배우기는 쉽다.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는 않다.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부족하며, 얼마나 이치를 알지 못하느냐를 아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른다는 막내 사제의 말은, 역설적으로 자신보다 더 깊은 무론과 무리를 향해 있는, 그의 시야가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보다 낫구나.”

화경에 오른 진무관주도 처음에는 무당의 무리는 물론이고, 정파 무공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또다시 가로막는 높은 벽 앞에,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아는 게 제대로 된 것이 없다는 것을.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는 수련보다는,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방법이 더 현명한 처신이었다.

“너는 태극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진무관주는 물었다.

“태극…….”

설휘는 잠시 고민했다.

청성에서 청풍이 그러하듯이, ’무당은 태극이다.‘라는 말은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음과 양의 조합. 태극은 무당의 정신이요, 전신이며, 정수다.

그 가장 기본이 되는 의미를 되묻는 것이다.

“태극이란 우주 만물의 근원이며, 만물을 생성하는 흐름입니다.”

“그렇다. 태극은 만물을 나타내는 근원이다. 어떠한 흐름도 모두 태극 안에 있고, 어떠한 힘도 태극 안에서 움직인다.”

스르륵.

진무관주가 두 손으로 태극을 만들어내며 말했다.

“그 원천은 기(氣)다. 하늘과 땅이 태어날 때 하나의 기가 움직였다. 텅 비어 있는 궁창에 열림과 닫힘이 생기고, 검은 것과 흰 것이 어우러지며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들췄지. 하늘과 땅의 큰 근원이 하나의 기를 통해 쪼개지게 되니, 음과 양으로 갈라졌고 이것이 태극이 되었다.”

태극은 자연의 위대한 흐름 안에서 움직인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 흐름을 보셨습니까.”

설휘가 물었다.

그 말에 진무관주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보았다. 그러나…… 가지지 못했다.”

속이 아릴 것이다.

그는 태극의 위대함을 설파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힘을 버린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터였다.

그 거대한 자연을 두고, 제3의 힘을 가진 것에 대한 죄책감이 그를 엄습했을 테니까.

“해일 같은 압도감에,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담대하고도 드높은 태극은 그저 나에게 무력감만 안겨다 주었다.”

“애초에 태극을 ‘가지려고’ 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저 태극의 하나가 되어, 그 기류에 동참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동참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돌아보면 제자리였다.”

고통스러운 듯, 긴 한숨을 내쉬는 진무관주.

“지독히도 오래 붙들었지만, 결과는 늘 같은 것이었다. 반면에 제3의 힘, 뇌전은 달랐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경이적인 힘을 뿜어냈다.”

“……그렇군요.”

설휘는 그가 어떤 이유로 뇌전의 힘을 선택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극마와 탈마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있는 것처럼.

화경과 현경 역시 엄청난 차이가 있다.

단순히 깨달음을 쫓아서 해결될 수 없는, 태극. 그걸 넘어 자연을 이해해야 되는 수준이지 않은가. 말로 하기는 쉽지만, 몸으로 체화하기에는 난이도가 너무도 높다.

“예전에 한 의인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청성이 위에서 아래로 보는 것이라면, 무당은 아래서 위로 올라간다고.”

설휘는 옛 사부의 조언, 그리고 가르침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저는 그것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청성에 부는 바람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조화로운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흐음…….”

“무당파의 무공, 태극도 그리 말하지 않습니까? 상대보다 늦게 반응하고, 때론 느려 답답하지만…….”

설휘는 진무관주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결국 보다 보면 먼저 가 있더라고.”

“……!”

꾸욱.

진무관주의 주먹이 거세게 쥐어졌다.

설휘는 뭔가 격동하는 듯한 그를 향해 느리게,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태극은 이미 관주님께서 바라던 그곳에 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눈에 느리게 보일 뿐. 그럼에도 무당은 항상 앞서지 않습니까?”

“…….”

“늦지 않았습니다. 아니, 늦어도 상관없습니다. 제3의 길이든 뭐든……. 언제든 돌아오시면 됩니다.”

설휘는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돌고 돌아 태극이라. 무당은 항상 기다릴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일 테니까요.”

“…….”

우드득.

진무관주의 입안에서 강하게 악물리는 소리가 났다. 눈시울도 붉어졌다.

벗어난 길을 후회하는, 통한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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