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뮬레이션-381화 (360/379)

381화. 제안 (2)

“어찌 됐든, 우리 둘의 대결에는 명분이 필요하네.”

진무관주는 설휘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도, 단서를 하나 달았다.

무당파의 정수를 배워, 자신을 패배시킨다. 제3의 힘보다 무당의 오의가 더 우월함을 만천하에 보인다.

나름 나쁘지 않은 계획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이름값. 설휘의 무명(武名)이 너무도 부족한 것이다.

초원무사니 뭐니 하는 강호의 활동이 있긴 했지만, 그게 곧 무당파에서의 입지로 이어지진 않는다. 더군다나 설휘의 사부는 다름 아닌 혜윤 진인.

무당의 적전을 잇기는 했으되, 살아생전에 대단한 무위를 누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의 제자가, 자그마치 무당의 진무관주를 꺾는다?

의심하고 불신할 것이다. 승패를 미리 정하고 벌인, 계획된 대련이 아닌가 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을 터였다.

“그게 또 사실이기도 하니까.”

“제 입지의 문제로군요.”

설휘가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면, 그리고 무당파 내에서 점차 그의 무위를 보여준다면, 어찌 보면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을 문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 시간이 문제였다.

얼마 후에 많은 도인들이 하루아침에 몰살당하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불명. 막으려면 지금 당장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그 명분은 내가 줄 것이네. 장문인을 제압한 뒤에, 자네를 지목할 테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설휘는 바로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장문인은 무당을 대표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초고수다. 그런 장문인을 내가 쓰러트리면, 본파에서는 도전자가 더 없을 터. 모두가 나서지 않는 그때야말로, 자네가 나설 명분이 주어지지.”

“아!”

설휘는 그제야 어떤 의도인지를 이해했다.

그리고 진무관주가 자신의 실력에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도 깨달았다.

공식적으로 무당파 최고 고수가 혜우 선인, 장문인이다. 그런 그를 제압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투. 저건 절대적인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어렵고도 걱정되는 문제는 그때부터네. 자네가 날 쓰러트려야 한다는 것, 그것도 본파의 무공으로. 그렇지 않으면…… 무당은 그날로 산산조각이 날 걸세.”

제3의 힘.

모두가 쉬쉬하고 있지만, 이미 무당파의 뿌리까지 스며든 이능의 존재.

여기서 진무관주가 그 힘을 공론화하며 나선다. 무당을 잠식하고 있는 절대자의 독니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즉시, 무당의 힘으로 제3의 힘을 무찌른다. 압도적으로 눌러 버린다. 이게 성공하지 못한다면 무당은 그날로…….

봉문, 혹은 폐문이 될지도 몰랐다. 무당의 정신도, 태극의 위대함도. 공개적으로 더럽혀지고 추락할 테니.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해야 했다. 이미 위험한 조짐은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무당파는, 내부에 독이 흐르고 있었다.

강해지기 위한 약간의 타협.

그게 얼마나 많은 무당의 제자들에게 깃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당장 오늘 일을 벌여도 늦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당장 추락할 명예나 문파의 안위 때문에 지금 상황을 외면한다면…… 앞으로 무당에서 순수하게 태극의 도리를 찾는 이가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한 달만 제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한 달, 그 정도면 되겠나? 그 시간이면 무당의 힘으로 날 제압할 수 있다고?”

“더 많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한 달이면 제가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니.”

“흠.”

진무관주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마도 눈앞의 사내가 본인을 이기지 못할 거라 보는 듯했다. 그게 당연했다.

“예언자라, 그래…….”

그럼에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지는 건, 미래를 엿본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제3의 힘이 어떤지를 이해하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원로원 중에 가장 친화력이 높고 나이가 많으신 분을 소개해 주십시오.”

설휘 역시 한 가지 당부를 했다.

“원로원?”

“예. 최소 혜자배여야 합니다. 혹여나 더 위 항렬의 분이 계시면, 그분을 꼭 불러 주십시오.”

“무슨 이유가 있는가?”

갑작스런 제안에 진무관주는 되물었다.

“제게 아직 부족한 무당의 정신과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제가 쓰는 무공이 무당의 것임을 검증해 줄 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대련이 끝나고도 잡음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도움과 증인이라.”

진무관주는 끄덕였다.

이 역시 설휘의 입지가 약함에서 비롯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자신도 나름 준비를 하지만, 설휘의 말대로도 해둘 필요가 있었다.

문파의 정통성과 우월성을 증명하는 자리에서, 안전장치는 두 겹 세 겹 두꺼울수록 좋았다.

진무관주가 장문인을 쓰러뜨리고 난 직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

“몇 분이 머릿속에 떠오르긴 하는데……. 그래, 한번 찾아보마. 모두가 인정할 만한 분으로.”

현장에서 자칫 무당의 무공에 대한 것을 부정당하는 불상사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럴 때 원로분들이 나서준다면, 더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물론, 눈앞의 사내가 무당의 무공으로 자신을 제압하는 상황이 와야겠지만.

“시작하지.”

무당파의 전무후무한 대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제3의 힘과 무당 무공의 싸움이.

“중상을 입었지만, 빠른 조치 덕에 한 달쯤 요양하면 문제없을 거래.”

“다행이네, 그거.”

이전의 삶에서 진구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랬던 것이 이번 생에서는 치료가 가능해졌다.

진무관주의 빠른 개입이 효과를 본 것이었다. 일단은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그리고 진강도 요양에 들어갔어. 참회동이야.”

“음.”

명목상으로는 요양. 하지만 실제로는 동문에게 주저 없이 살수를 쓴 일에 대한 처벌이었다.

듣기로는 진강이, 자기가 뭔가에 홀렸던 거라고 눈물을 흘리며 반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안이 엄중한 데다, 이런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문파 자체의 기강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진숙이 소식을 전해주고 난 후, 설휘 역시 며칠간 홀로 수련을 했다.

무당의 무공으로 경지 상승을 이룬다. 뚜렷한 목표가 있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청풍의 기운으로 화경의 극에 다다랐음에도, 현경으로 넘어가는 벽은 한없이 높고 멀기만 했다.

보통의 경지 상승은 임독양맥을 타통하며 신체를 통한 깨달음을 얻거나, 아니면 무공 성질을 찾아 물아일체를 이룸으로써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화경의 극에 다다른 구간에서는 어떠한 실마리나 단서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천마의 대단함이 느껴졌다.

마교에 있을 때, 극마에서 탈마로 이어지는 미지의 영역을 절대극마공이란 무학으로 완성해낸 장본인이 아닌가.

‘무당에도 있었다지만…….’

현현자. 태극을 만들어낸 창시자라 불리는 그는 분명히 현경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컸다.

화경에 올라보면 자연의 거대한 힘이 보인다. 그 힘과 조화가 되는 것은 정말이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현현자는 조화를 뛰어넘어 지배까지 했다고 한다. 태극으로써.

대체 세상의 이치라 할, 그 신비의 힘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 것일까?

‘막막하군.’

아마도 이러니 무당의 명예를 목숨처럼 여겼던 이들이, 사도라 할 수 있는 제3의 힘을 택했을 것이다.

진무관주만 해도 젊은 날에는 무당파에서는 천고의 기재로 불렸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화경에 오른 후 십수 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해야 했다.

한 해, 그리고 또 한 해.

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고서를 읽어도, 도리를 따라도, 도무지 닿을 수 없는 무지개 같은 신기루.

화경까지는 어찌어찌 선인들의 기록이나 자료를 통해 방향을 유추할 수 있다. 재능이 있고, 노력이 받침 된다면, 평생을 정진하면 결국 닿을 수 있다.

허나 현경은 아니다.

재능과 노력은 기본이고, 기연이나 천운이 따르는, 한없이 희박한 확률에 맡겨야 했다.

이미 인생을 걸었는데, 자신이 바른 길로 가는지 잘못된 길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무리 명문의 후예라 해도, 아니 오히려 명문의 후예이기에 압박감과 초조함에 몰렸을 것이다.

허나, 그것이 현경을 향한 자세였다.

실패를 당연하게 여기고,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며 묵묵히 태극의 원리를 참오하는 것.

몇 안 되는 기록에 따르면, 현경에 가까이 간 선인들의 말은 서로서로 달랐다고 한다.

오히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괜히 입으로 도를 말했다가, 후인들이 왜곡된 시야를 가질까 봐 적극 말을 아꼈다던가.

‘그나마 가까이 간 이들이 그 정도였으니…….’

태극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는가에 있어서 답은 없다는 말이었다. 무당에 있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 이 아해가 그 맹랑한 놈이라고?”

설휘가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진무관주가 노인 하나를 데려왔다. 원로원을 대표하는 이라고 소개한 노인은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백 살은 되어 보이는데.’

본인을 옥진이라고 소개한 노인은, 내일모레면 세상을 떠날 것 같은 깡마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빛은 현현한 것이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진무관주에게 들었다. 우리 무당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다고……?”

“예, 그렇습니다.”

“허어. 집 떠난 무당의 제자가 무당을 배우고 싶다니. 거참, 묘한 상황인걸?”

그는 괄괄하게 웃어 보였다.

긴 백발에 긴 수염. 옛 그림에 나오는 신선의 행색을 한 이가 무당의 경관을 눈에 담고는 말했다.

“허어, 놀랍구만. 수준이 이미 하늘에 닿았으니.”

“과찬이십니다.”

“무당에겐 참으로 복이 아닐 수 없다. 무위가 구름에 닿은 고수가, 이젠 하늘이 되고 싶어 하니. 다만.”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 말코가 뭘 제대로 가르칠지는 모르겠구나. 그저 듣고 아는 것만 주저리 떠들어놓을 것에 불과할 테니. 그래도 괜찮으냐?”

“경청하며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대저 무공의 경지가 높다 한들, 그것이 무학이 높다고 할 수는 없는 법. 제 사부께서는 늘 말씀하시길. 자연을 닮고 싶으면 자연으로 가야 하고, 생각이 깊어지려면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설휘가 공손하게 답했다.

이는 가짜 사부인 혜윤이 아닌, 청성의 사부에게서 배웠던 것이었다. 무학과 무공은 다르며, 그걸 이해하고 생각하는 수련 또한 다른 것이라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익히려면, 홀로 높고 멀리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여러 시선과 다양한 생각을 바라봐야 한다고.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옥진은 꽤 놀란 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예.”

“사부가 혜윤이라 했지. 참으로 잘 가르쳤구나. 그 말을 들어, 나도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졌으니.”

스윽.

그는 흐물흐물 이 빠진 입으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어보거라. 노부의 시선에서, 모든 걸 말해주마.”

***

옥진 도인이 펼쳐놓은 얘기는 길어야 두 시진 정도. 대부분 자신의 어릴 적 얘기였다.

설휘는 그런 얘길 듣는 게 편했다.

옥진은 말주변이 있었고, 때론 재미도 있었다. 왜 친화력이 있고 말솜씨가 좋은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노인과 만난 지 4일째 되던 날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웃고 떠들고 놀았지. 우화등선하는 게 열반에 드는 것보다 더 멋지다고 생각했거든.”

노인의 얘기는 그러했다.

도인은 선인이 되는 것이고, 불가에 있는 이들은 열반에 드는 것. 둘 다 초인이 되는 것인데, 무엇이 더 낫냐는 질문에 그런 식으로 대답한 것이다.

“하루는 어떤 도사가 춘화도를 가지고 왔네. 아이들끼리 돌려보다가, 아이고. 사숙이 나타난 거야? 급히 숨기기 위해 장경각에 넣어놓았는데, 누군가 그걸 보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네. 그 녀석이 어쨌는지 아나? 은폐하겠답시고 장경각에 불을 냈지.”

“……장경각에 불을요?”

듣고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래. 나중에 진상이 밝혀지고 나서 엄청나게 고생했지. 다행히 불이 커지지 않아서, 비급이 남았기에 망정이지…….”

가외로, 무당에 장경각이 왜 없어졌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 때.

“이대제자 정도 됐을 땐가……. 친우들끼리 내기를 했던 것 같네. 태극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선배들에게 보여주기로.”

태극을 눈으로 본다? 그것이 설휘의 구미를 당겼다.

“그게 가능합니까?”

“당연하지.”

옥진이 천천히 일어갔다.

“한 아이는 태극을 그려 가지고 왔네. 즉시 탈락했고, 다른 아이는 태극권을 시연했지. 그 역시 탈락했네.”

“그리고요?”

“또 한 아이가 말했지. 음양이 갈라지고 나눠져서 태극이라고.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다나 뭐라나? 바로 또 탈락했어.”

“그렇군요.”

설휘는 피식 웃었다.

태극을 볼 수 있는 방법이라니. 재밌는 발상이지만, 그다지 특별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노인의 다음 말을 듣고는, 간단하게 치부하지 못했다.

“그런데 탈락하던 중, 마지막 남은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군. 눈을 감으면 볼 수 있다고.”

“눈을 감으면요? 그 말은…….”

“그래. 명상을 말하는 거야.”

“명상…….”

신선한 접근이었다.

태극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물었는데, 눈을 감으면 볼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니.

“그놈이 설명을 이어갔어. 명상을 하면 수많은 상념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잠시만 정신을 놓으면 외부에서 오는 부정적인 것들에 싸 먹히게 된다고.”

“…….”

“허나 그걸 밀어내다 보면 가운데 중심으로 좌우 균형이 맞춰진다, 그것을 계속 중심을 잡고 원형으로 돌다 보면…….”

“태극이 된다.”

설휘는 진심 놀랐다.

허나, 노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태극을 이룸이 끝이 아니야. 점점 더 거센 외부의 힘이 몰아치게 되며, 그걸 계속 막아야 하네. 외부의 힘이 도저히 닿을 수 없을 만큼 맑아지면…….”

“맑아지면 어찌 되는 겁니까?”

설휘는 진지하게 물었다.

그는 직감했다. 지금 옥진이 말하는 것이 바로 중심. 자신의 무의 근본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무극(無極).”

“…….”

“세상을 초월하는 거지. 그것이 바로 태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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