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뮬레이션-388화 (367/379)

388화. 만검(慢劍)과 만검(滿劍) (1)

“크헉!”

잠시 상념에 빠졌던 설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호심공을 펼쳤지만, 뇌기는 기어코 방어막을 뚫고 와 그의 몸을 지져버렸다.

경련하듯 몸을 떨고 있는 설휘에게, 진무관주는 흡족해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하는 듯 물었다.

“이런,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힘을 썼나?”

싸움이 싱겁게 끝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일까.

그런데 잠시 뒤, 설휘는 담담히 반응했다.

“후우……. 시작치고는, 적당한 것 같습니다만?”

으득.

뇌전에 감전된 설휘가, 천천히 경련하는 몸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다.

“방금 너…… 뇌전을 정통으로 맞지 않았나?”

그걸 본 진무관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랬지요.”

“그런데?”

“……보다시피. 움직일 만은 합니다.”

뿌드득. 파직!

아직 몸에서 약간의 전격을 피워 올리는 설휘.

하지만 담담했다.

분명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이 진무관주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뇌전의 힘은 설휘가 쳐놓은 호심공, 태청심법(太淸心法)을 뚫고 단전까지 침투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가로막혀버렸다.

‘태극이 청풍심법까지 품었어…….’

설휘가 익히고 있던 청풍심법. 그것이 태극의 영향을 받아 태청심법 안에서도 운용되고 있었다.

덕분에 몸에 파고든 뇌기는 그것에 막혀 증발하듯 사라지고 만 것이다.

“너 혹시…… 뇌전공과 비슷한 무공을 익히고 있나?”

“글쎄요……. 들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진무관주가 물어오자 설휘는 담담히 대답했다.

품는다. 그리고 조화롭게 만든다.

그것이 태극이었다.

태극의 이치가 청풍에 녹아있는 내기를 사장시키지 않고, 조화롭게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한없이 넓은 포용력. 이는 오직 무당만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기도 했다.

“삼라만상이 모두 태극인데, 뇌전인들 어찌 음양의 이치에서 벗어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스읍, 그럼 이번엔 이쪽에서 먼저 가겠습니다.”

설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정신을 집중했다.

툭. 툭. 툭.

뇌기에 맞아 놀란 몸에는 아직 산발적인 경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혈맥이나 근골을 다친 것도 아니니, 진기를 유통시키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스르릉.

검신 끝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백강(白罡)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배, 백강?!”

“맙소사. 태극헤검의 극치라는!”

“정말? 오오오!”

설휘의 검 끝에 백강이 피어나자, 좌중은 이제껏 보였던 반응보다 몇 배는 더 난리가 났다.

특히 혜자배 노인들이 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였다.

백강은 태극혜검의 정수. 무당파 사람이라면 한 번쯤 도달하고 싶은 경지다.

그런 것을 고작 서른 줄에 들어선 도인이 펼쳐내고 있음에, 여러 감정이 치솟는 것이다.

“태극혜검의 정수라……. 와라. 스스로 무력감을 가지고 돌아갈 테니.”

스윽. 치치치칙.

설휘의 무공을 알아본 진무관주가 검신을 바닥에 내리자, 둥글게 방전(放電)이 일어나며 불꽃이 튀었다.

설휘는 그를 응시하다가.

훅!

이내 그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속도가 빨라졌어!”

“유운신법(流雲身法)이다!”

하늘로 치솟는 듯하다가 이내 땅에 가라앉은 듯한 환영이 일자, 장내에서 신법에 대한 찬사가 터졌다.

신법은 보통 몸을 가벼이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발전할수록 천근추처럼 몸을 무겁게 하다가, 제운종처럼 허공을 밟고 다시 날아오르거나 한다.

퍼르르르릉.

그렇기에 보는 이들이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었다.

지금 만들어지는 환영은, 그냥 허상이 아니라 모든 것이 실체이기도 하다는 것.

차악-!

눈이 휙휙 돌아가도록 빠르게 이동한 설휘는 천장과 그 중간, 그리고 지면이라는 세 방향에서 동시에 백강을 쏘아냈다.

“흥!”

세 방향에서 동시에 떨어지는 백강에, 진무관주는 무심하게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다시 한번 전류가 퍼져나가며 백강과 부딪쳤다.

쩌어엉!

장내가 완전히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그중 혜자배의 몇은 눈을 감아버렸다.

“아아…….”

“크으…….”

조화롭게 밀어내며 공방을 흘려버리는 태극신루.

태극이 우위를 점했다면 둥근 무지개가 일어나며 여력이 흩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뇌기가 백강을 짓누르며 설휘를 향해 밀고 들어간 것이다.

“음.”

파지직! 파직!

설휘 역시 얼굴이 굳어졌다. 생각 외로 태극천루가 상대의 뇌기를 파훼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못 짚었나? 어째서…….’

그는 서둘러 검에 백강을 띄워 올리며 파고드는 뇌기를 막아냈다.

촤아아악.

“큭!”

허나, 이번에도 늦었다.

전력을 다한 백강이었음에도 뇌기를 파훼하지 못했다.

애초에 뇌전은 천지 간에 가장 빠른 기운. 인간의 움직임으로 반응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초월한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었다.

“크악!”

그럼에도 일격을 맞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앞전보다 고통이 몇 배는 심했다.

치치직! 파지지직!

살이 익고 옷이 타들어간다.

청풍심법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양과 파괴력을 지닌 뇌기. 감전에 치를 떠는 설휘에게, 진무관주는 냉랭하게 말했다.

“이것도 한 줌이다. 위력은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다. 세상의 어떤 무공도, 감히 이 힘에는 대응할 수 없다는 걸 느끼게 될 거야.”

“크으…….”

설휘는 비척거렸다. 그는 혼란에 빠진 얼굴로 다시금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대체 뭐였지?’

그저 착각이었을까.

진무관주가 뇌전을 쏘아낼 때, 설휘는 그걸 ‘상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어렵지 않게, 가볍게 떨쳐낼 수 있다고.

그런 느낌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지척까지 진무관주의 뇌전이 파고들었다.

그걸 막아내기 위해 백강을 쓴 순간, 갑자기 뭔가 잘못 대응했다는 느낌이 확! 하고 왔다.

‘내가 뭘 실수한 거지? 그저 착각하고 있는 건가?’

“이번 뇌기는 제대로 막지 못하면 죽을 것이다.”

설휘가 자신의 감각과 실제 현상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동안, 추상같은 음성이 울렸다.

츠츠츠츳. 추아아아악!

진무관주가 검을 들자, 무려 열 방향 이상에서 뇌기가 그의 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공포감이 엄습해 올 정도의 힘이다.

그에 부지불식간에 떠오르는 생각.

‘뇌기도 바람을 통한다. 그 경로에 벽을 쳐서 늦추면 되는 게 아닌가?’

다시금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다.

무인으로서는 아득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야 한다. 미친 듯이 존재감을 뿜어내는 열 줄기의 뇌기. 하지만 설휘의 감각은 그와 달랐다.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아…….’

눈에 보이는 것과 뇌리를 속삭이는 무언가는 달랐다. 바람의 흐름을 경직시키는 격공섭류와 공기를 수축-팽창시키는 빙공 계열의 힘.

이 두 가지의 절세무공을 사용하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그런 직감에 가까운 것이 그의 뇌리를 자극했다.

분명, 이는 화경에서 이를 수 없는 경지인데도.

촤아아악! 우르르릉!

“……!”

진무관주의 검이 그어졌다. 굵은 뇌전의 줄기가 뿌려지는 가운데, 설휘는 반사적으로 한 손을 내밀며 검을 휘둘렀다.

우우웅!

바람이 굉음을 일으키며 몇 줄기의 돌풍을 만든다.

지지직. 우우웅!

뇌전이 불꽃을 튀기며 설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

우웅!

설휘의 손이 막으려는 듯 허공을 거머쥐었고, 대기에 새하얀 한랭의 기운이 한데 엉켰다. 그리고.

치직! 파지직!

강맹하던 벼락의 줄기가, 거짓말처럼 땅에 내리꽂히며 소실되었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진무관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무슨!”

꽈드드등!

놀란 그가 다시금 검을 휘둘러 뇌전을 생성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매섭게 뻗어나간 열 개의 벼락은.

땅! 땅! 땅!

하나같이 설휘가 내민 방향으로, 허무하게 빨려 들어가 땅바닥을 때릴 뿐이었다.

그 와중에 얼핏, 차가운 한랭의 기류가 허공에서 엉키는 것을 보았을 뿐.

우우웅!

“익!”

오히려 설휘가 내지른 백강이 진무관주를 향해 쏟아졌다.

반응은 불가능. 이전의 검강보다 몇 배는 더 빠르고 강하게 쏘아진 것이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날아와 그대로 진무관주의 어깨를 직격했다.

쩌엉!

“컥!”

피가 튀었다. 진무관주의 몸이 부웅 뜨다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터억.

다시금 몸을 일으킨 진무관주. 그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어깨를 부여잡고 말했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냐?”

목소리가 떨렸다. 그만큼 충격이었다.

이미 뇌전의 흐름을 손발 움직이듯 자유롭게 사용하던 그다.

하지만 방금 설휘의 손짓 한 번에, 강대한 전류가 거짓말처럼 땅으로 내리꽂혔다.

그리고 이어진 백강에 자칫 목이 날아갈 뻔했고.

“……태극입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방금 네가 쓴 것도 외문의 힘이 아니냐!”

진무관주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어렴풋이긴 했지만, 그는 분명히 목도했다.

설휘의 손앞에서 피어오른 차가운 기류. 허공에 응집되던 투명한 얼음의 기둥을.

태극권과 태극검에 무슨 저런 공능이 있단 말인가. 외문의 힘을 손에 넣기 전, 수십 년을 수련했던 태극이다.

그랬기에 진무관주는 이게 평범한 태극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할 수 있었다.

“……저도 잘 설명은 못 하겠군요. 하지만 분명 태극입니다. 태극이 외문의 힘을 이끌어 따르게 한 모양입니다.”

“하! 태극이 무슨 전능의 힘이냐! 네가 방금 사용한 것은 분명히 외문의 내공이었다! 냉기! 그리고 바람! 무당파의 가르침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

진무관주의 반박에 설휘가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실제로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

방금 설휘가 사용한 것은 청성의 힘. 청풍이다. 그리고 뇌기를 땅에 꽂아 버린 것은 사대극마공의 수. 얼음의 힘이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도 잘 설명은 못 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는 분명 태극입니다.”

어렴풋이, 그저 그런 직감이었다.

설휘가 펼친 것은 진무관주와 다르지 않은 이능.

외문의 힘.

하지만 그 발현 방법은 엄연히 태극 고유의 방식이었다.

자신이야 청풍과 사대극마공을 사용했지만, 지금 자신의 경지에 이른 이라면.

무언가 다른 현상을 일으켜서, 조금 전 진무관주가 일으킨 벼락을 휘어 버리라는 확신.

‘외문이든 뭐든, 현상에 나타난 것은 힘. 뇌전이 상이하다고는 하나, 결국은 자연에 속하는 힘이다.’

반사적으로 몸과 정신에 깃든 내공, 그리고 깨달음이 움직였다.

그게 어떻게 움직였는지 설명하는 것은 설휘에게도 난해한 일이었다.

마치 손발을 움직일 때,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를, 어떻게 발을 움직이고 어떻게 허리에 체중을 싣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아마도, 만검의 효능인 것 같습니다.”

“푸하하하! 크하하하!”

설휘의 말에 진무관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가가대소하던 그는, 눈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를 담았다.

“아주 웃기는구만. 지금 그걸 내게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납득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어설픈 변명. 어떻게 생각해도 거짓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때문에 말투도 달라져 있었다. 설휘로서는 억울할지 몰라도, 지금 진무관주의 마음은.

“죽여버리겠다. 이 사특한 놈!”

“…….”

일방적으로 ‘배신당했다!’는 그런 감정이 역력했다.

설휘는 그걸 알았기에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상대적이다. 내가 느리게 움직이기에, 상대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진다.’태

극은 음과 양, 가벼움과 무거움, 빠름과 느림, 모든 삼라만상의 이치를 수렴한다.

만검이 뇌검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느릿느릿한 검초이기에 상대의 검이 더욱 빨라지기 때문이다.

대저 빠른 것은 가벼워지는 법.

느려져서 상대를 바람처럼 가볍게 만들고, 느려져서 자신을 바위처럼 무겁게 한다. 무게 없는 벼락이, 무게 있는 바위를 어찌 밀어내겠는가.

단순한 이치는 무겁고, 복잡한 이치는 가볍다.

진무관주가 내공의 극한을 담았지만, 조금 전 설휘가 사용한 것은 그보다 상위의 힘.

천지만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깨달음의 힘이었다. 이를 무슨 수로 이해시킬까.

“흥! 그리 자신만만해 하지 마라. 당장 박살 내주지!”

왠지 모르게 안타까운 느낌으로 바라보자, 진무관주가 살기 어린 얼굴로 검을 들었다.

“지금까지 보인 것은 뇌기의 이 단계의 힘이다. 이제부터는 삼 단계. 바로 최근에 얻게 된 뇌력참동(雷力慘動)이다. 이것도 한번 받아보거라.”

“……?”

이 단계란 말에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는 설휘.

뭔가 기억이 떠올랐다. 제3의 힘을 단계적으로 표현했던 인물이.

츠츠츠츠.

다시금 진무관주는 뇌기를 생성해냈다.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전방위에서 뇌기를 끌어모으는 게 아닌, 검 끝에 맺힌 정도의 힘.

그리고 그 순간.

곧 그가 펼칠 극점에 오른 뇌기의 힘이 정확히 앞으로 어찌 될지를, 설휘는 자신도 모르게 알아차렸다.

스륵.

설휘의 검이 바닥을 향했다. 그제야 그는, 참으로 뜬금없이 알게 되었다.

‘그래. 난 이미…… 현경에 올랐구나.’

세상의 이치가, 상대의 힘이. 그 모든 것이 명백하게 눈에 들어왔다.

세상의 모든 조화가 한눈에 들어오고,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