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만검(慢劍)과 만검(滿劍) (2)
“타핫!”
설휘가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가운데, 진무관주는 전력으로 뇌력참동을 성공시켰다.
방어를 뚫고 파고드는 뇌전을 넘어서, 발출 즉시 원하는 지점에 뇌격을 때려 넣는 궁극의 기예.
제3단계의 뇌력이 설휘의 가슴팍에 그대로 내리꽂히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성공했다!’라는 생각에 척추가 짜릿하게 곤두서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치짓!
“……?!”
그런데 결과가 예상과 달랐다.
분명히 엄청난 고열과 충격을 토해내며 상대의 육신을 완전히 태워버렸어야 할 뇌기가, 힐끗 모습을 보이다 말고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무, 무, 무슨……!”
말조차 더듬거렸다.
뻗어나간 굵은 뇌기는 작디작은 소리 한 조각을 남기고 소멸되었다.
진무관주는 다시 한번 전력을 다해 뇌력참동을 뿌려냈다.
현실을 믿지 않으려는 것이다.
보통 자신의 무예를 성실히 닦은 무인일수록, 벽을 만났을 때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기 마련이다.
스스로가 납득할 때까지.
이제까지의 노력을 알고,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행위의 반복이 바로 훈련이고 고련이다.
그리고 그런 고련을 평생 해온 대표적인 인물이 진무관주다.
“으아아! 아아아아!”
치지직! 꽈드등! 파바박!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다섯 번.
처음엔 뭔가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연거푸 자세를 바로잡으며 계속해서 초식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치직. 칙. 츠츠측. 탕.
하지만 결과는 계속해서 똑같았다.
상대의 앞, 좌우, 머리 위까지. 어디를 노리건 진한 섬광을 뿌리던 벼락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내력이 바닥난 진무관주는, 그제야 격심한 허탈감에 빠져 중얼거렸다.
“어떻게…… 대체 이게…….”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 일어나는 것은 그의 인지를 벗어난 영역의 일.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믿으며 살아온 인생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기 때문입니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설휘가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천지만물의 이치. 딱히 도가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도 아는 뻔한 이야기를, 너무도 쉽게 입에 담는 자.
“한 숨결에 십만 팔천 리를 내달리는 것이 벼락. 하늘 저편에서 다른 편으로 뻗어나가는 극쾌. 허나 빠르면 가벼워지고, 가벼우면 무거운 것을 흔들지 못합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은 태극의 중심. 태풍의 핵을 바람이 침범하지 못하니, 뇌기가 뚫지 못하지요.”
“…….”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도가의 이론적인 이야기는 그 누구와 논쟁을 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허나 그에겐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다.
검기 발출을 입에 담는 것이야 개나 소나 다 가능하지만, 실제로 거리를 두고도 검을 휘둘러 종잇장이나마 베어내는 데는 몇 년은 족히 고련해야 하는 법.
“말이 되는 소릴 하거라…….”
그렇기에 진무관주는 믿지 못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미 수십 년의 세월을.
아니, 애초에 자신의 힘이 무력하게 변한다는 그 전제를 믿지 않았다.
“왜 말이 안 됩니까. 아무리 외문의 힘이라도 결국은 현상인 것. 우리가 숨 쉬는 이곳 자연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영향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이것까지 이용하여 강대한 힘을 발현할 수 있지만, 그는 더욱 상위에서 바라보는, 자연의 조화를 넘어서 다스리는 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지요.”
“하핫! 그래? 그 말인즉슨 네가 그 자연의 조화를 넘어 다스리는 자란 말이렸다?”
광소를 터뜨리며 진무관주가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치이이잉!
노기를 잔뜩 담아, 지척까지 다가와 펼쳐낸 검법.
장내의 무당파에게 익숙한, 태극혜검의 투로였다.
쩡! 쩌어엉! 쩌어어엉!
설휘의 검과 마주친 진무관주의 검에서 뇌전의 불꽃이 튀었다.
그저 분노해서 무작정 덤벼든 행동이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타격이 있었다.
거리를 둔 상태에서 뇌기가 사라진다면, 직접 검을 맞대고 뇌기를 전달해 주면 될 일.
하지만.
잠깐 검을 멈춰 바라본 진무관주의 눈에 떨림이 일었다.
그그그그극! 치이이익!
분명히 닿았다. 검을 타고 흘러들어간 뇌기. 허나 그 충격을 몸으로 받은 상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확실히…… 외문 무공보다 무당의 검법이 더욱 위력적입니다. 순간 쫓아가지 못할 뻔했으니까요.”
“이놈이!!!”
설휘의 말에 그는 마지막 이성이 날아간 듯 동공이 흔들렸다.
지지지지직.
이제 그의 전신이 뇌기에 휩싸여 있었다. 계속해서 불꽃을 튀긴 그의 검에서는 지글지글 볶는 소리까지 울렸다.
진무관주는 모든 것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방금 들은 태극의 깊은 도는 진무관주 역시 머리로는 알 수 있었다.
그저 머리로는.
‘불가하다. 절대로!’
하지만 그걸 몸에 담기에는 최소 백 년. 보통은 수백 년의 고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의 상대는 어떤가.
고작 약관을 좀 넘어선 나이인데.
‘이놈이 어미 뱃속에서부터 검을 수련했다 해도!’
자신보다는 수련에 쏟은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기실 설휘가 수백 차례의 전생을 겪었음을 알지 못하는 이상, 그의 불신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판단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진무관주가 보기에, 진휘-설휘는 자신보다 더한 외문의 힘을 사용하면서 도도한 척 태극을 담는 저열한 위선.
평생을 태극만 좇다가 결국 마음이 꺾여 외문의 힘을 탐하고만 그로서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궁극의 죄악이었다.
“카악!”
분노가 남은 잠력을 끌어올렸다. 기합이 아니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르륵!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휘두른 뇌검기. 폭발하듯 쏘아진 그 벼락은.
스으윽.
설휘의 손에 닿자마자 그대로 사라졌고.
휘르르륵.
태극의 원형에 빨려 들어가며 더는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는, 확실히 태극이었다.
“하…….”
털썩. 풀썩.
다리에 힘이 풀렸다.
덧없이 사라지는 뇌기를 보던 진무관주는 결국 맥없이 땅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자신의 모든 내기를 쥐어짜서 날린 뇌검기.
초근접에서 날린 마지막 한 수마저 사라지자, 그는 그저 허탈 가득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멍하니 설휘를, 그리고 비무대 주변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실성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하하하! 으핫핫핫!”
끝이었다.
아무리 회피하려 해도, 지금 이것이 명백한 현실이었다.
삶이, 이제까지의 모든 것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서른 무렵에 화경이라는 경지에 올라 무당의 미래로 기대받았다.
그 후로 십수 년을 몸부림쳤다. 하지만 자신을 막아선 벽을 결국 넘지 못했다.
사조에게 죄송하고, 사부의 억울한 죽음이 평생 그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올바른 태극의 길을 포기하고, 사도외문의 길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제야 겨우 ‘힘’을 얻었다고 생각했건만.
“크흐흐…… 흐흐흐흐……흐흐흑.”
전능이라 여겼던 외문 무공은 태극의 힘 앞에서 와해되었다.
그럼 이게 무언가. 대체 나는 이제까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자신도 서른 무렵에 화경에 도달한 기재였지만.
‘천재로구나……. 하늘 위에 하늘이란 게 이런 거였구나.’
사실은 아니었다.
눈앞의 상대는 약관을 조금 넘은 나이에, 자신보다 아득히 드높은 경지에 올라섰다.
무당파 최고수인 장문인을 꺾은 지 일각도 되지 않아, 진무관주는 자신의 아래 항렬의 제자에게 꺾여 버렸다.
“어흐흐흐흑!”
이럴 거라면 차라리 말 것을.
그냥 재능 없는 제자 정도로 끝날 수 있었을 것을, 무당파의 수백 년 역사에 위해를 가한 악인이 되고 말았다.
고작 몇 년을 더 참지 못한 자신의 나약한 의지가 후회되었고, 울음은 점점 비통함으로 변하고 있었다.
서럽고 후회되었다. 구슬픔은 결국 자조 섞인 웃음에서 눈물로 변하고 말했다.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무릎 꿇고 앉아 흐느끼는 진무관주. 그의 울음소리는 한동안 장내를 떠나지 않았다.
“후우, 후우.”
털썩.
그러기를 얼마. 어느 순간 울음을 그친 진무관주.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앞으로 숙였다.
“끝을 내거라, 진휘. 아니, 명휘 사제.”
“…….”
“유구한 무당의 제자로서, 감히 외문의 무공에 손을 대었다. 서 푼짜리 작은 힘에 취해 사손과 사제들을 무시했다. 도인이라는 놈이 도리와 이치를 무시하고 역성을 들고 말았으니.”
작게 시작한 뇌까림이 점점 커졌다. 단호하게 자신을 심판하는 말은, 장내 전체를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커졌다.
“이제 그 목을 베어 본보기를 보여라. 무당파의 비틀린 악귀가 여기 있으니. 어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눈을 감고 목을 내민 그의 눈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묵한 입은 더는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돌고 돌아…… 태극이다.”
설휘가 복잡한 얼굴로 서 있을 때,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
무당파 장문인 혜우의 것이었다.
“진무관주 명유, 너는 무당의 바른 정심(正心)을 흩트리고 문파에 큰 위기를 가져왔다. 알고 있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장문인의 말에 진무관주가 머리를 조아렸다.
스륵.
설휘는 그에 잠시 물러섰다.
힘으로 그를 누르는 역할은 이미 다한 상황.
남은 진무관주의 행실에 대한 처분은, 장문인이 내리는 것이 제대로 된 모양이다.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여기서 괜히 자신의 역할을 강조해 보았자 득보다 실이 클 것이었다.
“그래. 그럼 묻겠다. 아직, 너의 가슴속에는 무당의 정신이 있느냐?”
움찔.
진무관주는 장문인의 목소리가 점점 다가옴을 느꼈다. 그럼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이 벌인 짓. 옳다고 믿었고,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 보니 그저 모든 게 허망할 뿐이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무당의 정신이 무언지…….”
그래서일까. 그저 솔직히 말했다.
여기서라도 무당의 정신을 잊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해서는 안 되는 말이리라.
꾸욱.
그는 아직도 기억했다.
사부의 죽음으로 절치부심하던 그때, 그 이후로 치열하게 살아온 세월을. 힘이 필요했고, 고꾸라질 때까지 노력했다.
정당화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목숨을 부지하자고 거짓을 입에 담는 것은 그야말로 무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최악의 선택이 될 터.
“제자가 미욱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장문인. 불측한 몸에게 벌을 내리소서.”
“글쎄. 너에게 벌을 내리려면 나부터 받아야지.”
“……?”
“나도 잘 모르니까. 무당의 정신, 그게 무언지.”
퍼뜩.
진무관주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장문인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극권과 태극검에 심취했던 시절, 무당의 정신은 태극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 태극혜검을 보며 혜검만이 무당의 정신이 아닌가 생각했고, 또 그다음엔 십단금의 정수가 무당의 정신이라 생각했지.”
“…….”
진무관주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보지 않아도 자신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전 너무…… 너무 멀리 온 것 같습니다.”
“명유야. 네가 멀리 갔든, 보이지 않는 곳에 닿았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자박. 자박.
장문인은 진무관주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뚫은 채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익힌 외문의 무공. 제3의 힘이라는 말을 쓰긴 하나, 그것이 잘못된 길은 아닐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동안 그것을 품지 못했던 우리들의 그릇된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릇된 시선…….”
“노부가 생각하기로, 무당의 정신에는 포용이 있지 않을까 한다. 대해가 어찌 오수와 청수를 분별하여 받아들이겠느냐? 제3의 힘이든, 제4의 힘이든. 한 줄기 오탁이 있는 강물이, 어찌 바다를 다 물들이겠느냐?”
장문인 혜우가 고개를 저었다.
비록 대결에서는 패했지만, 지금 진무관주 앞에 서 있는 그는 거대해 보였다. 마치 거대한 산과 같은 무게감이 있었다.
“대지약우라, 큰 지혜는 얼핏 보기에 어리석어 보인다 하였느니. 남들이 보기에 느리고 때론 엉터리처럼 보여도, 때론 넘어지고 때론 비뚤어져도, 마지막에는 결국 큰 바다에서 모이는 것. 나는 이것이 바로 무당의 정신이 아닐까 한다.”
“장문인. 전, 저는…….”
진무관주의 눈이 흔들렸다.
장문인의 말은 명확했다. 외문의 무공이든 아니든, 무당파를 위해 노력한 것은 노력한 것.
불측한 일로 번지지 않았으니 불문에 부치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무당의 정신.
장문인의 말에 따르면, 이미 자신은 그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외문의 무공이든 뭐든, 성취를 보였다는 것. 그것 또한 무당의 정신이란 말이다.
주르륵.
진무관주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말없이 떠는 그의 입술 사이로, 터진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장문인은 그런 그를 보면서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가슴속에 있는 그의 속마음이, 입으로 전해지기까지를.
“말씀하신 게 무당의 정신이라면, 전 한시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로…….”
“되었다.”
투툭.
장문인은 진무관주가 격동하는 것을 다독였다.
“그거면 되었다. 그 마음이면 언제든…… 태극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으윽.”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이 따스했다. 진무관주는 그날, 어린아이처럼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지난날, 철모르던 어린 시절. 사부가 머리를 엉클어 주던 것 같은, 따듯한 손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