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뮬레이션-390화 (369/379)

390화. 만검(慢劍)과 만검(滿劍) (3)

“이로써…… 먹구름이 일었던 하늘이 다시 밝아지게 되었소이다.”

몇 명만 남겨두고 일대제자와 이대제자를 모두 해산시켰다.

지나치게 사람이 많으면, 없던 혼란도 생겨나는 법.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장문인께서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당의 정신이란 건 감히 누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이지요. 선조들의 노력과 그 속에 있었던 수없는 실패들을 어찌 잘못되었다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혜자배 장로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맞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람이지. 동도가 잘못된 길을 간 것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어찌 도인이고 어찌 무당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한 배분 전의 옥자배 도인이 그에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태극은 우리들 것이 아닌, 모두의 것입니다.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있는 것이지요. 돌고 돌아도 결국 태극으로 돌아오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렇게 저마다의 얘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원로원들, 그리고 그 말을 받은 노인들은 그간의 삶을 기탄없이 풀어놓았다. 그 솔직한 말에는 성공만이 삶의 목표라 여기던 명자배 도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게끔 하는 힘이 있었다.

다들 그렇게 한마디씩 하는 분위기가 걷히고, 대의전의 싸움이 수습되는 가운데.

“외람되오나 제자가 한마디 간청 드릴 것이 있습니다. 진무관주와 저의 대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설휘가 손을 들고 청하였다.

좌중의 시선은 그에게로 쏠렸다가, 다시 지목을 받은 진무관주를 향했다.

“큼, 흠. 내게…… 더 가르침을 내릴 게 있느냐?”

불편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는 진무관주.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비록 외문이라 하나, 그는 무당의 장문인 혜우 선인조차 무예로 압도한 몸이다.

그런 만큼 진휘의 무위가 감히 올려다보기조차 어려운 경지에 도달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련이 끝나지 않았다니. 핑계를 잡아 후드려 패려는 게 아닌가 하는 해괴한 상상이 들 정도였다.

“제 얘기는 충분히 전해드렸습니다. 그러니 이젠, 진무관주님의 얘기를 들을 차례지 않겠습니까?”

“내 얘기라니……. 내게 무엇이 쓸모 있는 것이 있다고?”

“이제껏 진무관주님께서 갈고닦으신 만검, 그것을 보고 싶습니다.”

설휘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비록 방향이 잘못된 쪽으로 향했다 해도, 그간의 노력은 무시할 수 없다. 진무관주는 가로막힌 벽을 뚫으려고 수많은 칼질을 해댄 사람이다.

‘나에게는 없는 경험.’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기 마련이다.

설휘는 여러 가지 기연과 깨달음을 통해 급속도로 현경의 경지에 올랐다. 그 경지가 거짓은 아니지만, 충분한 숙성을 거쳐 오래 묵은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정반대의 사례다.

고련을 했으나 깨달음이 없었던 진무관주.

고련은 없었으나 깨달음으로 단번에 상승한 자신.

서로서로 가진 바를 나누면, 양측 모두에게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진무관주가 겪었던 수많은 실패의 경험. 그걸 나눠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의 경지는 굳건하게 안정되리라.

“만검이라니?”

“그건 아까 보여주지 않았소? 느림으로 빠름을 제압하는.”

“아니,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아직 뭔가 남은 게 아니겠소?”

무당을 대표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커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화경을 뛰어넘은 진휘. 무당의 최고 고수라고 불러도 모두가 부정하지 않을 이였기에.

그의 말에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내 만검은……. 하…….”

진무관주는 몸을 떨며, 말끝을 흐렸다.

설휘는 그의 마음을 대충 알 것 같았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별 볼 일 없을 검이라는 걸, 혹은 이미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검이라는 걸. 아마도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검이라는 걸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왜,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래도 설휘는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물었다.

진무관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속내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정말로 오랜 시간을 수련했지만…… 자네가 펼쳐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서 말일세.”

“그래서 보고 싶은 겁니다. 진무관주님.”

“……?”

진무관주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말을 잘못 들었나 의심하는 듯한 얼굴.

하지만 설휘는 오히려 그에게 확신을 담아주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관주님께서 마지막에 펼치셨던 태극혜검에서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검결이 전혀 다르다는 걸. 빠르면서도 느리고, 화려하면서도 절제되어 있었습니다. 해서 생각했습니다. 제자가 얻은 만검 외에도, 이 또한 엄연히 태극의 만검이 아닐까 하고요.”

“……내 만검이? 내 검에 태극이 담겨 있다고?”

당황하는 진무관주에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 따지고 보면 저는 무당의 적전제자로 들어온 지 채 몇 개월도 되지 못합니다. 반면 진무관주님께서는 평생을 마당에서 사셨지요.”

“…….”

“무당이 그윽한 포용을 지니고 있다고 하나, 그렇기에 저와 관주님의 무는 전혀 다른 방향일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척박한 땅에서 자란 잡초, 반면 관주님은 영산에서 자란 귀한 난초지요.”

“흐음…….”

“운이 좋아 열선조께서 내리신 깨달음 중 일부를 얻었으나, 제게는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무당산에서 수많은 시간을 단련해온,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무당에 닿았을 검. 저는 그걸 보고 싶습니다.”

탁. 타닥!

설휘의 말에 누군가가 무릎을 치며 찬탄성을 흘렸다.

“옳도다! 실로 옳은 말이야!”

“저 천재가…… 확실히 진무관주의 무언가를 본 것이야. 사실 노력이라면, 진무관주만 한 이가 없었지.”

“그래, 그래. 만검이란 건 하나로 정의되지 않지. 마치 태극이 그런 것처럼.”

“무당의 것이라…….”

왁자지껄.

당사자인 진무관주는 왠지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가운데, 원로들과 장로들만 잔뜩 흥이 올랐다.

그리고 그런 흥한 분위기 속에서 설휘는 생각했다.

‘아슬아슬한 한 겹의 벽. 거기 머물러 있다.’

지금 진무관주의 무위는 화경의 극. 아니, 현경에 거의 도달한 상태라는 걸.

하지만 마지막 벽이라는 깨달음, 그것이 발목을 잡고 있다.

그게 바로 만검.

모르고 있는 게 아니라, 몇 가지가 너무 과하다 보니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게 보였다.

‘마신, 네놈의 비열한 짓거리는 여기서 없어질 것이다.’

현경에 오르게 된 설휘는, 절대자가 진무관주에게 어떤 족쇄를 채웠는지 알 것 같았다.

진무관주의 노력이 너무 과하다 보니, 모든 검에 힘이 들어가 균형을 이루지 못한 현상이 일어났다.

본래라면 여기서 이것을 스스로 깨닫고, 조용히 조율하는 시간을 거쳐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터.

하지만 놈은 여기에 개입하여, 외문의 무공을 전달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진무관주 입장에서는 가장 좌절하고도,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현경의 경지를 그렇게 놓친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곧 만나게 될 것이다.’

설휘는 무당의 중심에 서 있는 이 상황에서, 다시 한번 그의 존재를 상기했다.

척. 척.

좀 전까지만 해도 위풍당당하게 비무대에 올랐던 진무관주. 그가 긴장한 얼굴로 설휘에게 물었다.

“정말로…… 내 부족한 검을 펼쳐 봐도 되겠는가?”

“부족하다니요. 제게는 영광입니다.”

“어. 음……. 후…….”

잔뜩 주눅 든 몸짓으로 쭈뼛쭈뼛 검을 드는 진무관주.

피식.

설휘는 그 모습에 작게 웃었다.

아마도 이게 무당파에서 할 마지막 일일지도 몰랐다.

스스로를 가둬버린 진무관주를 저 괴로움 속에서 꺼내, 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는 것.

무당의 역사를 통틀어 고작 한두 명 정도밖에 오르지 못한 경지, 현경을 체험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지금 싸움의 이유였다.

“오십시오. 저 역시 대충 하지 않겠습니다.”

조화.

큰 노력은 필요 없었다.

검을 몇 번 섞다 보면 스스로 느낄 것이다.

자신의 만검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의 만(滿)검은 이미 가득 차서 넘쳐흐를 정도니까.

“시작하시게!”

자청해서 심판을 맡은 무당파 장문인, 혜우 선인의 외침과 함께 진무관주가 뛰어들었다.

“타아!”

기합을 토해내는 그의 얼굴은, 이제껏 그 어떤 때보다도 밝았다.

***

깡!

“……!”

검과 검이 마주치자마자 설휘는 느꼈다.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확실히 빠르다. 뛰쳐나갈 것 같다.’

검로 자체가 그동안 맞상대했던 그 어떤 이들보다 담대하고 또 유려했다.

아쉬운 부분이라면, 너무 극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하앗!”

쿠웅!

하지만, 그 아쉬운 점은 다음의 검초에서 싹 사라졌다.

이번에는 중검이다.

겉보기로는 가볍게 날아온 검에, 천 근을 넘어서는 엄청난 힘이 실려 있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보완하고 있는 건가.’

“으라앗.”

휘잉! 파바밧!

그리고 이어진 태극혜검의 상위 초식.

번쩍이는 찌르기와 엄청난 속도로 이어지는 베기. 연계되는 초식을 보며 설휘는 뒤로 물러서기에 바빴다.

‘기회!’

그리고 그 물러서는 모습에 상대가 휘청거린다고 생각했는지, 진무관주가 온 힘을 다해 상단과 하단을 연속으로 공격했다.

깡! 카앙!

“컥?!”

그 결과, 검이 거칠게 하늘로 튕겨 올랐다.

상단 공격을 피한 상대가 하단 공격 때 곧장 받아쳤다. 두 팔이 번쩍 들려 낭패한 얼굴이 된 그에게.

“다시 오십시오. 똑같은 초식으로.”

“…….”

설휘가 말했다. 진무관주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익! 치잉!

이어진 검식은 조금 전과 똑같이, 설휘가 말하는 대로 이어졌다.

카앙!

“다시.”

캉!

“다시!”

챙!

“다시!”

마치 수련하는 제자를 가르치는 사부처럼.

설휘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반면 장내의 다른 이들은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는 보기와는 달리 단순한 약속 대련이 아닌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이들은 저도 모르게 표정에 변화가 일 정도였다.

“흐름이……?”

“예, 계속 달라지고 있습니다.”

검초가 남긴 기의 흐름.

그게 설휘의 인도에 따라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강한 흐름을 잘라버리고, 얕은 흐름을 다시 꺼낸다.

때론 강한 힘과 부드러운 검을 섞고, 또 변화무쌍한 검법처럼 만든다.

“조화라. 그래, 변하는 과정이구나.”

누군가가 탄식과 찬탄을 흘려냈다. 그렇게 계속 수련이 반복되던 어느 순간.

쨍.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놀라운 점이라면, 검을 떨어트린 것이 진무관주가 아닌, 이미 현경에 이른 진휘라는 사내라는 부분이었다.

“아……?”

진무관주는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떨고 있었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설휘를 바라봤다.

분명 승세를 잡은 것은 그인데, 오히려 한 차원 높은 기예에 크게 패한 사람처럼 보였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태극은 느리지만 항상 먼저 가 있다고.”

피식.

설휘가 웃으며 검을 잡았던 손목을 탈탈 털어 보였다.

“하지만 난…… 전 말입니다…….”

“예. 이미 거기에 가 계셨던 겁니다. 다만 너무 과해서, 조화를 이루지 못했지요.”

“…….”

“지금 느끼는 심득을 갈무리하십시오. 깨달음이라는 건 참으로 요상해서, 그 순간 얻지 못하면 바람처럼 날아가기 마련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와락. 털썩!

진무관주는 눈앞에 있는 상대가 사질-정확히는 사제라는 것도 잊은 채 존대하며 가부좌를 틀었다.

그만큼 다급했고, 그만큼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 깨달음은 그가 그토록 절실하게 바라던 것이었기에.

우우우웅.

“아!”

“저건!”

가부좌를 한 진무관주의 정수리에서 열꽃이 피어오르자, 장내에 있던 자들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 찼다.

특히 멀찍이서 지켜보던 장문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랬다.

본산에서 나고 자란 자의 깨달음.

누구보다 총애를 받던 자의 엇나간 일탈.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돌아온 탕아가 화경을 넘어서서 현경에 오르는 과정이다.

주르륵.

‘혜선 사형, 보고 계시오…….’

눈물이 절로 흘렀다.

누구보다 존경했던 강한 사형, 그의 억울했던 죽음과 사질인 명유의 인생.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눈앞을 지나갔다.

스르륵.

이제껏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씻은 듯이 사라져 갔다.

후우웅. 우우웅.

연신화허. 삼화취정.

가부좌를 튼 진무관주의 정수리 부근에서 흰 증기가 무럭무럭 피어났다. 세 무리의 기운은, 마치 세 송이의 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옛 서적에서나 내려오던, 절대적인 경지의 상승에 들어서며 일어나는 현상.

‘그놈도 이제 깨닫게 되겠지.’

그런 모습을 보며, 설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절대자.

그 녀석은 이번 일로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정한 미래가 바뀌고 있다는 걸.

본래는 정파에서 현경의 고수가 나올 수 없었다. 놈이 여러 가지 수작질을 해서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설휘가 그런 제어와 족쇄를 풀고, 다른 곳도 아닌 무당파에서 현경의 고수를 배출시켰다.

‘기다리고 있어라. 네가 만든 시스템에, 이 몸이 직접 들어가게 될 테니까.’

현경과 탈마라는 양쪽의 봉우리에 모두 오른 지금.

설휘는 이제야 그를 상대할 조건이 갖춰졌다.

거기에 덤으로, 외문의 힘이라 일컬어지던 절대적인 힘 역시도 사용할 수 있게 됐으니까.

바로 태극의 핵.

무극이었다.

“저.”

“어어?”

덜커덕!

때마침 문이 열리자, 장내의 시선이 한쪽으로 움직였다. 도사 한 명이 급한 걸음으로 장내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장문인이 급히 다가가 연유를 물었다. 안색이 창백한 것이,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것을 예상하면서.

“본산 아래에 침입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오는 길입니다.”

“침입자들? 소속은 어디냐?”

“화산…… 그리고.”

도사는 급히 호흡을 가다듬고서, 말을 이었다.

“마교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