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뮬레이션-392화 (371/379)

392화. 신비의 여인 (2)

“…….”

설휘는 쉽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초면부터 한눈에 자신의 경지를 알아보는 여인.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더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선택은 침묵이었다.

“…….”

“……?”

찌르륵. 찌르륵.

물가에서 물벌레가 나지막이 우짖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아미파의 여인이 두 손을 모으며 다시 예를 표했다.

“빈니의 무례를 용서하세요. 초면에 일방적으로 남을 평가하는 말투였습니다. 귀하의 입장을 난처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답니다.”

“…….”

정중하게 사과하는 태도. 하지만 설휘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 모습에 여인이 다시금 말했다.

“귀하께 저는 그저 낯선 사람이겠지요. 허나 빈니에게 귀하는 오랫동안 보아온 처지라……. 실은 지난 1년 동안 그대를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무슨 이유로?”

설휘가 되묻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자연의 흐름이…… 여기서부터 달라지더군요. 어떤 때는 조용한 강물처럼 흘러가다가, 어떤 때는 사나운 폭풍처럼 몰아치기도 해서요. 당연히 제 눈을 사로잡지 않겠습니까?”

‘눈이라.’

설휘는 그 말을 듣고 직감했다.

이 여인, 자연의 흐름을 볼 줄 아는 자라고.

근 1년 동안 수련 중에 의식적으로 불어넣었던 기류들.

설휘는 자신의 의지로 그 흐름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조용하게 다스리기도 했다. 그건 분명 의도된 흐름이었으나, 범인이라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터.

하지만 현경의 고수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설휘는 그제야 두 손을 모아 답하는 예를 취하며 물었다.

“사태(비구니를 높여 부름)께서는 아미파의 어떤 무공을 익히셨습니까?”

“어머.”

설휘의 물음에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오해하셨군요. 저는 아미산에 몸을 담고 있기는 하나, 무인이 아니랍니다. 그저 인근의 호랑이 정도나 혼쭐내어 쫓아버릴 정도지요.”

아미산은 예로부터 호랑이가 득시글거리는 곳이다.

당장 중요 사찰인 복호사는 물론이고, 아미파의 무공이 복호권, 복호창 등으로 이름에 호랑이를 꿇린다는 의미가 들어가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라면, 범을 때려서 쫓아내는 것 정도는 아주 기본. 이건 납득이 갔다.

하지만 그 정도의 기본적인 호신술로, 자신의 경지를 어떻게 첫눈에 파악한 것일까.

“무인이 아니시라면, 어찌 자연의 흐름을 보고 느끼시는 것입니까? 그건 무인들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 높은 경지인 것인데?”

“음, 이걸 무어라고 설명할지…….”

여인은 잠깐 침묵했다.

그녀는 잠시 주변에 눈길을 보낸 채, 하려는 말을 정리했다.

“시주께서는 황제내경을 아시는지요.”

“알지요. 천자를 진료하던 고대의 명의(名醫)들이 최초로 편찬한 의술서의 근본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그 의원들이 다 무인이었을까요?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경락과 혈위(穴位)를 그토록 정확히 짚어냈을까요?”

“음.”

설휘는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혈자리, 그리고 경락. 또한 인체에 대한 수많은 지식. 그건 무인들만 아는 지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가가 수많은 의술서, 기혈과 경락에 대한 개념과 지식을 퍼뜨려, 무가가 그것을 받아들이며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그들은 먼저 눈으로 병을 보았고, 혈관을 짚어 맥을 느끼고, 근육과 뼈의 위치를 참오하여 혈자리와 기경팔맥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알렸지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예. 반드시 무인이 아니라도, 지난한 공부 끝에 큰 깨달음을 얻으면 자연의 흐름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게 됩니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설휘를 바라보며 차분히 일렀다.

“불교의 수련법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저희 아미에서는 계(戒), 정(定), 혜(慧)를 중시합니다. 계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 윤리와 도덕적인 규범, 정은 마음을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 혜는 수련을 통하여 얻는 지혜를 말하지요. 이를 통하면 마음을 직관(直觀)하고 정신을 통일할 수 있습니다.”

“…….”

말인즉, 무공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평생을 불도를 닦아 마음공부를 한 끝에 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설휘는 그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천 소저의 사부가 그런 인물이었지.’

경계심이 조금 풀렸다.

눈앞의 비구니는 분명 대단한 인물이긴 하지만, 무공을 수련해서 현경에 오른 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무예가 아니라 그저 깨달음으로 현경, 혹은 그에 준하는 간파를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애초에 무인들이 생각하는 현경과, 구도자들이 도달하는 경지는 다른 것인가?

오히려 무예를 익히는 이들이 말하는 현경이, 뭔가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경에서 현경으로 넘어가는 벽은 지난하고 높다.’

그리고 마공이든 정종내공이든, 수십 년에 이르는 마음공부를 해야 한다.

어쩌면, 애초에 현경의 경지는 꾸준한 마음공부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이고, 무인들이 멋대로 화경 다음의 상위 단계로 착각했던 것 아닐까?

몸을 수련하고 기를 발출하는 무공을 극한으로 익힌 것이 바로 화경.

그저 마음을 수련하여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걸 조정할 수 있는 단계가 현경.

두 경지는 상하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평등한 다른 경지일 수도 있었다. 당장 눈앞에 나타난 아미의 비구니가 그 명백한 증거였다.

“저는 무당파에서 기연을 얻어 태극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설휘는 자신의 밑천을 꺼냈다.

아쉬운 것이 그다.

일단 자신이 아는 것을 먼저 보여주고, 혹여나 그녀를 통해서, 도움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현경은…… 무인들에게는 지고의 경지 중의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헌데도 마음에 평안을 부수고 싸움을 대비하시는 것은, 아직 뭔가가 부족하기 때문인가요?”

설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여인을 보며 순간 느꼈다.

‘눈이구나.’

보통 무인들은 상대의 정체를 기운으로 느끼는 데 반해, 그녀는 자신의 눈을 보고 느끼는 듯했다.

아마도 앞서 예시로 들었던 명의들처럼. 깨달음의 공능이 이런 쪽으로 발휘된 것 같았다.

“예, 여전히 불완전합니다. 도무지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를, 더 높은 경지가 있기에요.”

“……정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군요. 빈니가 보건대, 시주께서는 이미 세상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이토록 격한 감정을 가지신 것은…… 싸울 대상이 신(神)인 까닭인가요?”

“…….”

설휘는 잠깐 대답을 물렀다.

계속해서 핵심이 찔린다.

아미파의 고승은 작게 보여주려고 내민 것마다, 죄다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는 듯 기가 막힌 유추를 해 냈다.

자꾸만 주도권을 빼앗기는 기분이라, 설휘는 우선 이 여인의 한계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그렇게 앞을 잘 보시는 분이니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과거에 헤어졌던 여인은…… 어찌하면 만날 수 있겠습니까?”

천 소저, 혹은 소령.

말을 돌리기 위해서 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설휘 자신의 지난한 안타까움이 엮여있는 일이다.

“인연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불법에서는 결국 돌고 돌아 언젠가는 마주치는 법이라고 말합니다만.”

“본래라면 그렇지요. 헌데 환생이 꼭 인간이 아닐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어떤 신이 만든 세계의 공간 안에서 죽었는데, 어찌 정상적인 내생을 바라겠습니까?”

설휘는 묵직하게 직구를 던졌다.

사실, 제대로 대답은 애초에 기도하지 않았다. 알려주면 좋고, 아니라면 그저 자신의 내면을 자꾸 뚫어보는 그녀의 화법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났을 겁니다.”

“……?”

“본래 업이 쌓여 죽은 이라면 지옥에 가겠지만, 어떤 신(神)이 만든 세계라 하면 그 업은 그 신(神)이 감당해야 하는 것. 그러니 그녀는 언제고 다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세상에 돌아올 것입니다.”

“……!”

설휘는 당황했다.

슬그머니 흘린 신의 존재. 거기에 대해서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대답 아닌가.

“다만 인간이라 해도, 태어날 시점은 알 수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그 세계를 만든 신(神)이 결정하겠지요.”

“결국, 그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군요.”

“……!”

그러자 이번엔 여인이 놀랐다.

신을 죽인다는 말.

다른 사람으로서는 허황되어 웃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녀 앞의 설휘는, 그것이 진심이고 언제고 거기에 다다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무모합니다. 신에 닿을 정도로 높은 경지이긴 하나, 그래도 신을 대적하기엔 부족할 텐데요?”

“그래서 달라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요? 지금 당신이 걷고 있는 길은 그다음 단계가 아닌, 전혀 다른 길인데.”

“솔직히, 어느 길이든 쉬운 건 없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갈 뿐.”

설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길이 다르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선인의 경지를 꾸준히 닦는 왕도.

하지만 그가 나아가려 하는 길은 정반합을 통해 무예를 닦는 길이다.

설휘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정말로 자칭 절대자, 마신의 경지에 오른 자를 무예를 닦는 걸로 이길 수 있을까?

이미 현경의 경지에 오르는 것만 해도 적지 않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당장은 수백의 목숨이 남아 있기에 계속해서 시도하고 성취할 수 있지만.

마신의 경지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할까.

“아미타불. 진인사대천명이라 하였지요. 알겠습니다. 남아가 뜻을 정하셨으니, 무모하다 해도 그 길에 건승을 기원하지요.”

“…….”

설휘의 마음이 또 한 번 흔들렸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가급적 중요 내용을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답하는 그녀가 경외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였을까.

“사태께서는 정반합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설휘는 이제 자신의 상황을 터놓기 시작했다.

정종내공과 마공. 서로 상극인 두 무공을 하나로 합치는 시도에 대해.

“불가능하다고는 알고 있지요.”

“그걸 해볼까 합니다.”

“…….”

여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설휘는 이어서 말했다.

“신이 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아무리 오래 살아도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무기가 용이 되는 시간도 무려 천년이 필요하니까.”

“…….”

“그래서 조화를 이룰까 합니다. 불가능하지만, 아래 단계의 경지에서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적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태초의 힘을 얻기도 했고.”

“태초라면…… 힘의 근원을 말입니까?”

설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인이 대단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

부르르르.

입술을 떨어댔다. 그리고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힘들다고,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헌데.

“안 돼요. 그러다간 죽을 겁니다.”

“……?!”

설휘의 고개가 훽 돌아갔다.

그냥 누군가의 말이었다며 모르되, 이미 자신의 속을 말 몇 마디로 다 파악하는 그녀의 장담.

그저 죽는다는 말에 가슴이 섬뜩할 수밖에.

“화경에서 이루어진 조화야 그럴 수 있습니다. 그 힘은 오직 자연 안에 국한된 것이니까요.”

“허면?”

“마공과 정종무공의 정반합? 그건 융합에 해당됩니다. 가벼우면서 무거울 수는 없는 법. 이는 자연의 이치이자 세상이 돌아가는 섭리에 해당합니다.”

“…….”

“그걸 성취하려면 자연을 넘어서는 힘이 필요해요. 자연이 다스리는 걸 넘은, 우주의 기운을 다룰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이는 신만이 가능합니다.”

“흐음.”

신만이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설휘를 신경이 쓰이게 만들었다.

어느새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그녀가, 설휘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차라리 음과 양처럼, 태극에 섞이게 하여 균형을 이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녀의 제안에 설휘는 곧장 답했다.

“균형은 맞춰지겠지만 그 정도로는 신을 죽이지 못할 겁니다.”

“글쎄요. 무극의 힘, 태초의 힘을 사용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가 태초의 신보다 강하지 않다면…….”

그 말에 설휘는 동의했다.

그는 신과 같은 힘을 가졌을 뿐. 진짜 신이 아니다. 더구나 태초의 힘을 막아설 정도의 신 역시 아닐 터.

“허면, 그 균형을 맞추는 건 가능하다는 겁니까?”

“쉽지 않을 테지만…… 당신이라면 가능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죽어도 다시 태어날 테니.”

“……?!”

설휘는 이제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존재인 것까지 아는 것인가. 과연 이 여인의 경지는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당신이란 사람에 대해.”

“그럼 더 물어보시지요…….”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요?”

“……?”

“어차피 당신은 저와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이번 생이 아니라…….”

“…….”

“다음 생, 그리고 그다음 생에서도 말이지요.”

그녀는 웃었고, 설휘는 마음이 복잡했다. 도무지 이해가 닿지 않는 그녀에게, 설휘는 언뜻 두려움까지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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