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문제점 해결 (1)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억지로 균형을 맞추려 들지 말고, 우선 조화를 추구하라. 그러면 자연스레 맞춰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두명 사태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에는 왜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았을까?
‘……확실히 나와는 다르다.’
무인이 오른 현경과, 그저 불도에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어서 오른 현경의 차이인 것일까. 다른 이들과 달리 이 여인의 시야는 자신과 다른 뭔가가 있었다.
거기에 문득, 한 가지가 더 눈에 들어왔다.
잔주름. 지난 생에서 만났던 때는 지금보다 좀 더 나이가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사태…….”
“네.”
“……아닙니다. 조금 잘못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물으려다가 설휘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여인에게 나이를 묻는 것도 실례이지만, 속세의 연을 끊은 출가인에게 ‘이전에는 좀 더 나이 드셨지 않소?’라고 묻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그가 얻으려고 한 것은 그녀의 식견. 자신과 다른 시각을 지닌 이의 지혜다. 얼굴에 잔주름이 더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일까.
“음……. 빈니의 말이 이해하기 힘든가요?”
두명 사태의 말에 설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해했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이라 잠시 숙고했을 뿐. 천금 같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스윽. 탁.
설휘는 일어서며 두 손을 말아 쥐어 예를 표했다.
“또 모르거나, 답답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실로 감사합니다.”
따듯하게 미소 짓는 두명 사태.
어쩌면 불가의 관세음보살. 속세의 모든 이의 근심과 우환을 조용히 위로해 준다는 미소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얼굴이지 않을까.
‘구도자란…… 참으로 대단한 존재구나.’
스스로 정진하여 이토록 높은 경지에 오른 그녀에게 설휘는 다소 경외감을 느꼈다.
자신도 따져보면 현경이기는 하나, 수백 번의 삶을 되풀이해서 오답을 일일이 겪었기에 정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다.
또한 시스템이라는 전대미문의 기이한 현상이 작용했기에, 다른 이라면 진즉에 머물러 있을 경지를 몇 번이나 뛰어올라 여기까지 왔다.
반면 이 여인은?
그저 온전히 자신의 노력.
스스로의 부족함과, 불가의 한없는 난제들을 돌아보며 오로지 자신만의 답을 내고 경지를 이루었다.
심지어 무인조차 아님에도 현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
‘나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길.’
설휘는 다시금 예를 표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석굴을 나가려던 발을 잠시 멈칫거렸다.
“또 무슨 궁금한 게 남았나요?”
“아, 그게…….”
우물쭈물하는 그의 모습에 두명 사태가 묻자, 설휘는 겸연쩍은 얼굴로 턱 밑을 긁었다.
그녀가 아는 자신에 대한 기억이 어느 정도가 남아 있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괜히 그녀의 기억을 들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가?
애초에 출가인이란, 속세와 연을 끊고 구도에만 매달리는 이들. 자신과의 기억이란 곧 인연이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은 실례이거나 괜히 오해를 살 수도 있음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설휘는 예전에 현경에 오를 때 조언을 해 주었던 그녀와 헤어졌다. 그리고 그날부터 설휘의 수련 방식은 이전과 다른 식으로 진행되었다.
***
“으음…….”
소우주.
상단전 개안을 먼저 시도한다.
그렇게 방향을 잡은 설휘는, 한동안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모든 단전의 소우주를 이루는 게 가능한가.”
설휘 자신이 시도한 방식은 몇 번이고 실패에 맞부딪혔다.
여기서 두명 사태가 제시한 또 다른 해법. 정종 내공과 마공을, 굳이 균형을 맞추어 정반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한없는 조화를 통해 스스로 녹아들게 한다…….
어찌 보면 뜬구름 잡는 개념이지만, 그간 여러 불가와 도가의 서적을 보며 참오한 것이 있어 그럭저럭 실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었다.
“한 그릇에 불과 물이 담기니 폭발(정반합)이 일어남은 당연. 그렇다면 그릇을 한없이 크고 단단하게 하면 이 또한 버텨낸다는 것인데…….”
그 끝이 바로 신체의 단전을 소우주로 전환한다는 것. 작은 시야의 차이가 큰 방향을 바꾼다.
작게 보면 심법의 문제이지만, 넓게 보면 깨달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모든 무인의 목표 중 하나는 저 소우주를 이뤄 대우주와 합일을 이루는 것이니까.
설휘는 먼저 그 부분부터 짚었다.
‘애초에 단전이 왜 구분이 되는가.’
본래 우리의 신체는 하나의 소우주라 불리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으로 구분되어 있다. 정, 기, 신의 삼위일체로 볼 수도 있고, 천지인의 셋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구분은 쉬운 학습을 위한 것.
절정에 이른 고수는 초식에 연연하지 않는다.
움직임(行)은 결국 기교이며, 그 기교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의념과 생각인 터. 간단히 말해 생각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정기신을 합일시키기 위해서는 정기신의 구분부터 없애야 한다.’
마치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를 묻는 것과 같은, 끝없는 문답.
이를 충족하기 위한 답 중의 하나가 바로 순환.
음과 양이 서로 어우러지며 태극을 이루듯.
정기신이 구분되지 않고 둥글게 서로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는 경지.
운기 행공에서 이를 시행하는 것이 바로 주천이다.
대주천은 기경팔맥(奇經八脈)의 운행으로서 온몸을 한 바퀴 돈다고 말한다. 이렇게 대주천이 통한 후에는 일종의 공능을 가져온다.
당장 오장육부의 각 부위의 기를 서로 바꿀 수 있어, 심장의 기가 위에 가고, 위(胃)의 기가 창자로 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대주천은 상단전. 백회의 문이 열려 천지의 기를 받아들인다.’
자연의 기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것.
여기서 짚어보면 두명 사태의 말은, 신체에서 소우주를 이루는 것에서 나아가, 자연의 대우주와 합일시키라는 의미로 이어진다.
“으음…….”
이는 어찌 보면 정종 기운과 마공을 정반합 시키는 과정보다 더 어려운 숙제였다.
‘일단은 해봐야 알겠지.’
첫 시작은 바로 기의 순환이었다.
이는 이제껏 해온 명상과 비슷했지만, 어느 면에서는 달랐다.
마음의 평온함에서 오는, 평정심의 동요와 불측한 기운들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정중동의 정신이라면.새로 시도하는 방식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만큼 즉각적인 반응이 오기 때문이다.
‘여러 번 해보긴 했지만…….’
사실, 이건 설휘가 현경에 오르기까지 늘 하던 방식 중 하나였다.
내기의 순환은 이전의 깨달음과 합쳐 경지 상승을 이끌어내기 때문.
다만, 현경에 올랐을 때는 굳이 기의 순환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깨달음이 따라오지 않는 이상 경지 상승은 어렵기 때문이다.
허나 두명 사태의 말에 따르면, 일단은 대우주와 교감을 우선시하라고 했다.
“해보자.”
설휘는 그렇게 반년 뒤. 현경에 경지에 올랐고, 그녀의 말대로 따랐다.
그리고 시도했던 그날.
“컥!”
그냥 그대로 주화입마에 걸려버렸다.
-설휘 님은 사망하셨습니다.
‘…….’
***
한 번의 실패.
또 한 번의 실패.
그리고 계속된 실패.
“제기랄…….”
설휘는 진땀을 줄줄 흘리며 신음을 흘렸다.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상, 중, 하단전의 소우주를 완전히 하나로 일통시키는 것까진 성공했다.
하지만 대우주와 합일은 계속 실패했다.
그저 단순히 자연의 조화를 넘어, 그들을 지배하는 수준.
쉽게 말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검강으로 변하고, 바람이 겹겹이 강막처럼 변하게 만들며, 스스로 구름을 불러일으켜 호풍환우가 가능한 수준이다.
이쯤 되면 생사경, 신이 되는 길로 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대우주의 합일은 열 번을 넘게 시도해 보았지만 매번 실패했다.
“후우…….”
이는 음양, 자연의 기운을 넘어 태초의 기운까지 흡수해야 하는데, 사실상 그 단계에 도달하기도 전에 주화입마에 걸리거나 온몸이 풍선처럼 팽창하다가 폭발해버리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도저히 안 되겠군.”
열 번의 시도와 실패 끝에 설휘는 다시 한번 두명 사태를 찾아갔다.
그녀는 여전히 복호사에 있었고, 마치 자신이 온다는 걸 알기라도 하듯 담담히 설명해 주었다.
“글쎄요. 빈니도 거기까지는 장담할 수 없군요. 제가 겪은 길과 귀하께서 걸은 길은 다르기에.”
“그렇습니까…….”
“다만, 제가 겪은 길을 그대가 걸어보심이 어떠한지요. 무공이 아닌, 법전을 읽고 부처를 섬기면 열반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
“흔히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르다고 말하기도 하지요. 어떻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수련을 해보시겠습니까?”
역시나 이번에도 다른 답을 내놓았다.
마치 과거에 만난 여인이 맞나 의심될 정도로.
혹시나 하여 다음 생에 찾아갔을 때도 그랬다.
“현경. 그 너머의 경지라면, 인간의 생과 사를 초월하고 우주 만물의 법칙을 한눈에 꿰뚫어보는 무예의 경지라 할 수 있지요. 이는 수천 년 무림사에 단 한 명도 없었던 전인미답의 경지이기도 하니.”
“…….”
“허나, 귀하께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스스로 현경에 올랐고, 마기를 다룰 수도 있을 만큼 다양한 경험을 했고요. 그러니…….”
서론은 좀 길었지만, 곧 그녀는 본인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당신의 경지 그다음 단계는, 생사경이 아닌 현경과 마공을 합일시키는 겁니다. 그렇기 위해선 조화가 우선입니다. 조화를 시키려면, 두 기운을 공존할 수 있는 심법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가져가십시오.”
그러고는 놀랍게도 그녀가 심법을 내놓았다.
유환공이라고 적혀있는 비급이었다.
‘어떻게 매번 다를 수 있는 거지?’
설휘는 그녀가 만날 때마다 다른 접근법을 알려주고 말하는 게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믿어보기로 했다.
아직 목숨은 많았고.
도전할 기회도 충분했으니까.
***
두명 사태는 긴 꿈을 꾸었다.
아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 속에서 두 가지 기억되는 것이 있었다.
죽음과 아주 가까이 닿아 있다는 것.
또한, 그 죽음에 어떤 공포심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두려움 중 가장 큰 두려움이라는 죽음을 극복했을 때, 그녀는 부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잠깐 스쳐 가는, 낯선 인간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연의 조화를 부렸다.
어떻게 했는지 바람을 만들어내고, 구름을 몰고 오기도 했다.
때론 원하는 기류를 제 맘대로 바꾸기도 했다.
다만, 거기까지였다.
그가 도달한 곳보다 더 높은 곳에 부처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해 주었다.
또 한 번은 자신에게 직접 찾아왔다. 해결 방식이 어렵다고, 그녀는 또 그에게 한 번 더 나름의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또 한 번, 또 한 번.
백 번이 넘어간 나중에는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그를 만났다.
그는 물었고, 자신은 대답해 주었다. 그가 부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길을 정성껏 알려주었다.
그럴수록. 환하게 비추고 있던 부처의 얼굴이 점점 사라졌다.
‘색즉시공이며 공즉시색…….’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홀로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보다, 고통받는 중생을 꺼내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앞이 점점 밝아지며, 작은 불상 하나가 보였다.
“사태! 괘, 괜찮으십니까?”
“…….”
한 여인이 자신을 향해 물어왔다.
낯이 익은 여인이다. 자신의 제자인 진여 사태임을 모를 리 없다.
“……빈니가 어떻게 된 거냐?”
“면벽수행을 계속하신 지 1년째입니다. 곡기도 취하지 않으시고 물조차 드시지 않아, 제자는 스승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줄 알았습니다.”
울먹이는 진여의 말에, 두명 사태는 상황을 짐작했다.
여기서 수련하다 자신도 모르게 열반에 들려고 했다는 것.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청정이 깨져 버린 것.
“……모두 내가 선택한 것이리라.”
“예?”
두명의 말에 진여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두명은 따로 설명해 주지 않고 조용히 몸을 틀었다.
뿌드득.
정말로 1년이 지난 것일까. 다리 관절이 붙어 버렸는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무릎을 만지고 있을 때.
“잠깐, 나가 있거라.”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예? 스승님…….”
“손님이 오셨느니라.”
그 말에 여인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감지하기로는 사방 10리에 누구도 없었기에.
스으윽.
하지만 곧 그녀의 기감에도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서.”
“네…….”
진여는 두명 사태의 말대로 문을 나갔고, 잠시 뒤 낯익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를 본 두명 사태가 말했다.
“……꿈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런가 봅니다.”
“앉으시지요.”
그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의 간섭 없이도 자신을 만날 실력자니까.
남자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질문이 있으십니까?”
꿈에서 들어온 수만 가지의 질문과 그에 대한 해답.
이제는 더 그에게 내밀 만한 것이 없었다. 두명은 열반에 들지 못했고, 다시 그저 그런 사람으로 돌아왔으니까.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그럼……?”
수백 번이나 이어지던 물음이 갑자기 나오지 않자, 두명 사태가 오히려 당황했다.
“이번에는 그저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대화.”
그녀는 다시금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짐짓 놀랐고, 이내 경악하듯 눈이 커졌다.
“혹시 그대는…….”
그 물음에 남자, 설휘가 대답했다.
이제껏 보았던 어떤 표정보다도 평온하고 맑은 얼굴을 하고.
“닿았습니다. 신니께서 해주신 귀한 조언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