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문제점 해결 (2)
아미산은 기암괴석이 많기로 유명하다.
산 전체가 풍경이 기가 막혀서, 작은 봉우리만 올라도 절경이라 할 수 있는 곳이 즐비한 명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감탄하여 시 한 수를 써 남긴 곳이 수백이나 된다.
그래서 설휘와 두명 사태는 멀리 가지 않아도, 가슴이 탁 트이는 명당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니(神尼).”
“……?”
사내, 설휘라는 이름의 무인은 잔뜩 들뜬 모습이었다. 신니(神尼)라는 과도한 존칭을 할 만큼의 예우에 두명 사태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따지고 보면, 우린 초면이 아니었던가요?”
“아, 그도 그렇군요. 그러고 보면 이번 생에서는 처음 보는군요. 헌데…….”
멈칫하는 사내. 하지만 그는 오히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사실, 초면이라기엔 서로 너무 낯이 익은 사이 같습니다만. 아닙니까?”
“…….”
두명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초면이 틀림없다. 하지만 사내의 말대로 너무 낯이 익은 사이이기도 했다.
기나긴 꿈속에서 계속 등장했던 사내를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혹, 괜찮다면 먼저 묻고 싶습니다. 신니께서는 저를, 아니 불초를 어찌 아시게 되었는지요?”
“꿈을 꾸었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기 힘들 정도로…….”
두명은 이 사내에게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그간 꾸었던 수많은 꿈, 수백 번에 달하는 많은 만남. 하루아침에 꾼 백일몽 같기도 하고, 수십수백 번 층층이 이어진 꿈속의 꿈같은 꿈.
그 안에서 사내와 자신은 수많은 논쟁을, 혹은 가르침을 구하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와중에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도 보았다. 때로는 대오각성하여 환희에 어린 모습도 보았다.
그 때문에 초면임에도 자신의 오랜 꿈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사내가 어떤 성정의 사람인지, 또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르나, 이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기에.
“놀랍습니다. 당신과의 만남이, 수많은 삶과 죽음의 반복이 신니께는 하나의 꿈이었다는 것이…….”
“신니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과연 빈니만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
남자, 설휘가 살짝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아미타불 가볍게 불호를 외며 두명 사태는 고개를 저었다.
“현경이라는 경지는 범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불가해한, 초월적인 경지입니다. 본인은 현실이라 여겼지만, 실상은 구천에서 만났을 수도 있지요.”
“구천(九天)이라……. 불도에 몸을 담은 분의 말씀답습니다. 신니의 말씀은 현생과는 다른 세상, 다른 삶에서의 조우를 뜻하는 것입니까?”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주께서는 빈니와의 만남이 이미 있었다고 확신하시는 듯하나, 그 또한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빈니가 수많은 꿈을 꾸었듯이, 시주께서도 그저 묘하고 이상한 꿈을 꾼 것일 수도 있습니다.”
“…….”
사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두명의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같고, 불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침묵 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는지 설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장자지몽이라……. 도가든 불가든 극에 달하면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 듯싶습니다.”
호접몽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의 장자가 이르길, 어느 날 그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너무 생생하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했다.
-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나비가 나의 꿈을 꾼 것인가. 세상만사가 모두 이와 같아 무엇이 허이고 무엇이 실인지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으니.
“그간 많은 공부를 하신 듯합니다. 진전이 적지 않으신 듯하여 빈니 또한 마음이 기쁩니다.”
“이제는 또 꿈이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꿈이든 현실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한없이 현실에 가까운 꿈이라면 그걸 그저 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한없이 덧없이 여겨지는 현실이라면, 그것이 꿈과도 다를 것이 없을 테고요.”
“……요는 집착이다, 이 말씀이십니까?”
사내는 뭔가 느낀 바 있는 눈으로 물었다.
“그 말씀에는 답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두명은 또 한 번 고개를 내저었다.
집착을 집착이라 말하면, 그 또한 또 다른 굴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불법에 이르길, 인생에는 모두 108가지 번뇌가 있으며 그에서 오롯이 벗어나는 것이 열반이라.
허나 그 108번뇌를 벗어나는 것에 집착하여 또 하나의 번뇌, 이를테면 109번째 번뇌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원하시던 바는 찾으셨는지요?”
사내가 고민에 빠지는 걸 보고, 두명 사태가 가볍게 말을 돌렸다.
지난 꿈속의 꿈에서, 그는 자신에게 조언을 얻기 위해 수없이 찾아왔다.
그것이 한 번 같기도 하고, 수백 번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만남 중에서 자신은 체득한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다.
심지어 아직 체득하지 못한, 그저 지식으로 알 뿐인 상황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자신 혼자서가 아닌 둘이서, 정답이 아닌 해답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었기에 머리를 맞댈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길고 길었던 꿈이 끝났다.
그건 눈앞의 낯익으면서도 초면인 사내가, 드디어 현경을 넘어서는 경지에 올랐다는 것.
“자칫하면 우화등선할 뻔했습니다.”
피식.
사내가 웃으며 가볍게 너스레를 떨었다.
“다행스럽게도 두 기운의 균형으로 인해 경지를 조절할 수 있었고. 결국은 신니께서 해주신 조언의 덕입니다.”
“허나 수많은 실패가 있으셨지요. 부족한 빈니의 말 때문에 고통받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겸손이 과하십니다. 그게 어찌 신니의 부족함이겠습니까? 당장 제 아는 바가 체득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탓이 더 컸습니다.”
설휘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긴 시간을 수행한 끝에, 상단전의 소우주를 완성하는 순간 기운을 조율하고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불법의 무상무위를 근본에 두었던 덕입니다.”
“과연…… 그러시면 육욕칠정을 모두 다스리실 수 있게 되신 건가요?”
“아니, 그건 조금 다릅니다. 감정이 평소보다 더 가라앉기야 했지만, 아직 불초에게는 많은 감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저 그에 휘둘리지 않을 뿐…….”
설휘는 겸허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우뚝,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회한이 느껴지는 탄식과 함께.
“혹시 신니는 아십니까? 이번 생이 불초의 마지막, 그 직전의 삶이라는 걸…….”
“……?”
두명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지막 삶? 그리고 그 직전의 삶?
이 무슨 수수께끼 같은 소리인가.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거늘, 사내는 마치 자신에게 여러 개의 생명이 있기라도 한 듯이 말하고 있었다.
‘……아.’
일순, 두명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사내의 말은 농담도 흰소리도 아닌, 진실이라는 걸.
설휘라는 사내는 실제로 수십, 어쩌면 수백 번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방증이 바로 두명 자신의 꿈.
한 번인 듯, 수백 번인 듯 계속해서 반복된 것 같으며, 단 하룻밤에 꾼 길고도 긴 이상한 꿈.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과 연관되어 있으면서 수백 번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목숨이 한 백 개 정도 남았을 때쯤인가……. 수백 번의 실패가 연이어진 가운데, 슬슬 모든 것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이대로 사라질까, 다 그만두고 그냥 포기하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
두명은 뜬금없는 설휘의 말에, 묻지도 답하지도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대답을 바라지 않는 말. 사내 그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수도 없이 많은, 반복된 삶이 저를 미치게 만들더군요. 답은 보이지 않고,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 계속해서 끝없는 정진, 정진, 정진. 사는 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고, 삶의 의미를 알 수도 없고.”
“아미타불.”
두명은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까마득하고 아득하기 짝이 없는 무형의 벽.
그건 수행자든 무도를 수련하는 자든, 가없는 세월을 보내며 맞이해야만 하는 무겁의 형벌이다.
불도로서 지극한 경지에 오른 그녀였기에, 설휘가 겪었을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본인은 계속해서 신니를 찾았습니다. 혹 이유가 뭐였는지 아십니까?”
“무엇이었습니까?”
“똑같은 질문에 똑같지 않은 대답. 그것이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
두명은 멈칫했다. 이번에 나온 설휘의 말은, 그녀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던 그런 종류의 것이었기에.
“순서가 정해진 경극처럼, 누구나 다 순서대로 정해진 대사를 반복적으로 내뱉는 삶과는 다르게, 신니께서는 매번 다르게 살고 계시더군요. 생각도, 반응도, 마음도. 늘 달랐습니다.”
“……빈니가 그랬던가요.”
“예, 그래서 시간이 흘러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쳐버리지 않고도.”
설휘는 다소 힘이 빠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애달픈 웃음이었다.
한 생에 최소 십 년, 많게는 수십 년.
목숨이 많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었다. 설휘는 말 그대로 ‘무한하게’ 반복된 수련에, 거의 미치는 상황까지 갔다.
아니, 몇 번의 생은 정말로 미쳐있기도 했다.
주화입마는 부지기수고, 불균형의 끝에 굳어버린 기운으로 인해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를 찾았다.
시스템이 잡아먹은 이 삶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여인이 아닌가.
“그럼…… 마지막 전 삶이라는 ‘이번 생’은 어떻게 보내려 하십니까.”
두명은 물었다.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을 터였다.
그가 평생 바라왔던 싸움, 그 끝을 앞두고 어중간하게 딱 하나 여벌로 남아버린 삶.
이를 어찌 사용할지가 궁금하였기에.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 여기서 끝을 맺을까 싶기도 하고.”
“……예?”
두명마저 놀라게 한 설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 때문에 이렇게 버티고 버틴 것입니다.”
“…….”
“허나, 그건 마지막 삶에서 해야 하기에. 그래서 이 삶은 그저 매듭지으려고 합니다.”
“너무 급한 결론이 아니신지요. 대저 의미 없는 삶이란 없는 법. 달성하셔야 하는 목표가 있다면, 굳이 꼭 마지막 삶에서 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두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설휘라는 남자는 허투루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말로 삶에 아무 집착도, 의미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리고 싶었다. 이는 마치…… 스스로 자결하려는 사람 같지 않은가.
아무리 불가에서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집착과 아픔을 벗어던지고 열반에 들라고 가르치지만.
이는 인생에 본디 곡절이 많으니, 그에 과하게 얽매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삶을 그냥 포기하고 목숨을 내던지라는 자살 권유와는 엄연히 달랐다.
거기서 긁적, 설휘는 턱을 긁으며 말했다.
“음……. 그게 신니, 그대께서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예?”
눈을 부릅뜬 두명 사태. 설휘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허허 웃으며 말했다.
“반복되는 삶이 저를 나약하게 만든 거라고. 제일 뜨겁고 치열했던, 그리고 반격했던 삶은 목숨이 하나였을 때지 않았냐고. 그리 일갈하셨습니다.”
“빈니가…… 말입니까?”
두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떠올리려 해도 쉽지 않았다. 수백수십의 꿈이 겹쳐진 몽환적인 꿈. 느낌이 계속 떠오를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저도 동의했습니다. 마지막 목숨 하나에, 모든 걸 태워보기로. 결국 사유강이 했던 말이 맞았던 게지.”
“……사유강?”
뜬금없는 이름이었다. 두명 사태는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에게 말을 건넸던 누군가의 이름이리라. 모두에게 목숨이 하나인 이유, 그래서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지만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것만큼, 후회하는 것만큼 미련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과연 그러합니다.”
“그리고…… 정말 고마웠습니다.”
설휘는 조금 전부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슬며시 흐릿해지는 것 같아, 눈을 깜박이자.
“…….”
휘이잉.
설휘는 그곳에 없었다.
그저 날카로운 산봉우리 곁을 스치는 바람만이 요란했다.
“……아미타불.”
두명 사태는 그에 조용히 불호를 읊조렸다.
도깨비처럼 다가와서 뜬금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남자.
설휘.
지금 겪은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꿈을 꾼 건 나였을까. 아님, 그였을까.”
데구륵.
손 안에서 염주가 한 알 굴렀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얼굴에는 짓는 듯 마는 듯 미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자. 가자, 가자. 저 높은 곳으로…….”
자박자박.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수련과 인연의 이어짐으로 여기며, 자신을 다독이며 산을 내려갔다.
그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도인이 눈앞에서 완벽히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으니.
아마도 그의 이번 생은 우화등선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