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처음부터 시작하다 (1)
[마지막 목숨입니다.]
‘…….’
설휘는 눈앞에 떠오른 문구를 보고 있었다.
두명 신니와의 만남 이후, 그는 모든 것을 마음에서 내려놓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곧 눈앞이 환해졌고, 빛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다시금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같은 상황이다.
‘정말로 우화등선한 건가.’
그랬는지 어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실 그런 건 딱히 신경 써야 할 일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
정확히는 지금, 이 순간부터다.
▶ 처음부터 시작한다.
▷ AI로 시작한다.
▷ 계속 이어서 한다.
▷ 저장한 지점을 불러온다.
이걸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선택.
생각해 보면,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던 때에 몇 번 선택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거의 고르지 않았던 선택지이다.
특히나 천미려의 사부를 만난 후, 제약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지금 이 선택지는, 그간 벗어나 있던 시스템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처음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설휘는 친절히 알려주는 창을 보며 주저하지 않고 골랐다.
<처음부터 시작하기를 선택하셨습니다.>
- 사건의 발단.
‘태황각주 독대 전’으로 돌아갑니다.
정말로 기다려온…… 자신의 마지막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솨아아아-----
어둠이 몰려온다. 그러다 곧 희미한 빛이 점점 커지며 주변을 밝혔다.
“…….”
낯익다. 몸의 기억으로는 낯익은 곳이다. 하지만 동시에 낯설기도 했다.
수십, 수백, 어쩌면 천에 달하는 해를 지난 끝에.
마교의 어느 연공실.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처음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후우…….”
설휘는 잠깐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한때는 긴박하고 마음을 졸였던 시기인데, 지금은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아니, 정겹다.
뭔가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 것일까.
‘그때 어떤 일들이 있었지?’
수많은 시간을 통해 풍화되어버린 기억들.
한때는 이를 악물며 고통스러워했던 기억들도, 인제 와서는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희미한 잔재만 느껴질 뿐이다.
“그래, 반 시진……이었지.”
한참이나 감회에 빠져있던 설휘가 시간을 계산했다.
촉박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앞으로 자신을 찾아와서 발길질부터 날리는 적명을 만나기까지, 딱 그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때까지는 이곳에서 아무도 참견하지 않는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 시작하는 이에게 시스템이 나름 마음을 다질 시간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열어볼까?’
[도구함을 여시겠습니까?]
설휘는 먼저 도구함부터 확인했다.
필요한 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준비를 끝냈기에, 바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
[도구함]
<절대영약>
[만년자령초] [공청석유] [인형설삼] [대환단]
“음…….”
설휘는 안전하게 들어 있는 영약들을 확인했다.
수십, 아니 수백 년 만에 도구함 안에 있는 내용물들을 보자, 또 감회가 새로웠다.
도구함 안의 절대영약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설휘는 한때 이것들을 모으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던 시간들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마지막 생이라고 여겨서인지, 이전에 없던 무수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러기를 어느새 일각 가까이를 흘려보내고 난 후.
“그만하자. 더 이상 길게 끌 건 없지.”
몇 번의 심호흡 후.
설휘는 도구함에 있는 네 가지 영약을 모두 눌렀다.
사용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도구함을 사용하는 방법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만년자령초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공청석유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인형설삼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대환단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꽤 오랫동안.
차근차근 준비해 온 작업이다.
마지막 삶에서, 순간적인 경지 상승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고 그는 부단히 연구해 왔다.
그 답은 첫 시작.
마교라는 용담호혈에서, 뒷배도 능력도 없는 보잘것없는 삼류 무사로 출발했던 삶.
그걸 이제야 바꾼다. 절대적인 능력을 갖춘 채로 시작한다.
어쩌면 이것만큼 미래를 바꾸기에 편한 수도 더 없을 테니까.
‘이제 더 이상의 수련은 의미가 없다.’
그릇을 만드는 법도, 한계를 뛰어넘는 법도 무수하게 몸에 익혔다.
앞으로는 시간 싸움이다. 수많은 장애물을 돌파하고, 적들과 싸우며 순식간에 성장하여야 한다.
절대자라고 자칭하는 놈.
그놈의 눈길이 자신에게 미치기 전에 순식간에 솟아올라야 한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자신을 제지할 수 없도록.
이를 위해 수백 번의 삶을 되풀이했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희대의 영약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제, 일제히 몸에 때려 박는 것이 모든 대계의 시작이다.
<영약을 사용했습니다.>
<영약을 사용했습니다.>
<영약을 사용했습니다.>
<영약을 사용했습니다.>
드드드득.
온몸의 기혈이 진동을 일으켰다.
보통 사람의 경우 이 정도로 음기와 양기로 가득한 영약들을 단번에 먹으면, 흡수되기 전에 미치는 것이 당연할 터.
어느 누구도 시도한 적도, 생각할 수도 없는 방식이다.
하지만 설휘는 달랐다.
이제껏 익혀온 마교와 정종내공의 심법은, 강력한 영약의 기운을 모두 수렴하게 만들 것이다.
극마 또는 화경 같은 절대경지가 일차적인 방어막이 되어줄 것이고, 탈마 또는 현경이 이차적인 방어막이 되어줄 것이다.
시간은 단 일각.
길어도 이각 안에, 현경 또는 그 이상의 경지로 탈바꿈하는 것이 목표다.
쿵. 쿵. 쿵. 쿵.
“후우……. 어디, 과연…….”
설휘는 몸에서 들끓기 시작하는 약기를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나같이 희대의 영약. 극에 달한 음기와 양기를 수백, 수천 년이나 붙들고 있었던 것들.
제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고 한들, 하나도 아닌 네 개나 되는 기운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설휘 역시 실제로 사용해 본 경험은 없다. 그저 여러 가지 상황을 강구하여 이론으로만 정립해 보았을 뿐.
‘도박이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설휘는 마음에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 수백 번의 삶을 지내며 참오한 결과.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첫 삶에서 희대의 영약으로 한계를 돌파하여 최고의 고수가 되는 것.이는 단순히 시간을 단축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내부로 들어와서 시스템과 녀석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쾅!
‘와, 왔다…….’
반각도 되기 전에 기다렸다는 듯 폭발하는 단전.
쿵. 쿵! 쿠웅!!!
그 충격은 하단전뿐만 아니라 중단전, 상단전까지 자극하고 있었다.
설휘는 급히 가부좌를 틀고 본격적으로 기운을 다스리기에 들어갔다. 이미 수많은 경지 상승을 경험해 보았기에, 기혈을 때리는 격심한 충격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꽈앙!
‘……!’
융화되지 못한 기운들로 몸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쾅! 쾅! 쾅!
가부좌를 틀고 앉은 몸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도.
그는 이를 악물며 견뎌냈다.
그간 현경의 경지를 넘을 때, 기운의 충돌로 인해 죽음을 맛본 것이 대체 몇십 번이던가.
그때에 비하면 탈마, 아니 극마조차 되지 못한 몸이 만들어내는 기운의 격랑은 가소로울 지경이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조금…… 예상왼데?’
폭발하는 기운을 심법으로 다스리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가 상정하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영약이 이끌어내는 진기의 폭발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번이 아니라 계속 일어난다.
많아 봐야 네다섯 번 정도로 짐작했는데, 폭발이 어째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섯 번, 일곱 번. 터진 진기의 잠재에서 계속해서 폭발이 일어났다.
쾅! 쾅!
폭발이 열 번을 넘었을 때, 설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열한 번째 폭발이 일었을 때.
콰아아아앙!
‘이게 무슨…….’
설휘는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폭발이 잦아들지 않는다. 단전에서 일어나는 진기의 충돌은 상상 이상으로 커지고 있었다.
‘벌써 초절정이…….’
이미 눈 깜짝할 사이에 예상했던 단계를 넘었다. 그럼에도 기운은 사그라들 기색이 없이,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는 듯 단전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으극!’
잠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
설휘의 온몸은 이미 열기로 가득했다. 입고 있던 옷이 모두 불타올랐는데, 이 정도면 마공으로는 극마, 정종내공으로는 화경에 올랐을 터다.
하지만 기운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살짝 정신이 아찔아찔해지는 것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설휘는, 또 한 번의 폭발을 경험했고.
콰아아아!
“……!”
그릇에 금이 갔다.
반사적으로 심공, 아니 그간의 깨달음을 모두 떠올리며 질주하는 진기를 깨진 그릇 안으로 꾹꾹 눌러서 회오리치게 하자.
휘르르르…….
“큽!”
설휘는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도달했다.
탈마, 혹은 현경이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멈춰주세요. 플레이어의 능력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멈춰주세요! 플레이어의 능력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멈춰---오류---오류---오류.]
‘실패인가? 아님 성공인가?’
시스템조차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강한 기운이 몰아치며 자기 몸을 휘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설휘는 한 번 더 심오의 경지에 도달했다. 바로 균형.
상단전의 소우주를 이룬 것도 그때쯤이었다.
***
사아아아--
공기가 가볍다가 무거워진다.
마지막까지 미친 듯 질주하던 기운을 붙들은 설휘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후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슬쩍 고개를 들어본 설휘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눈앞, 상단에 떠 있던 도구함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상한 일이다. 이런 건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이게 무슨 상황일까를 생각하는 사이, 또 한 번 문자열이 주르륵 펼쳐졌다.
[플레이어의 강제적 이탈. 당신은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오류---- 시스템 안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
[@D@#!#$E!!]
[버그를 감지했습니다! 당신을 6천만분의 1 확률에서 나온 NPC로 등록합니다.]
“이게 뭔…….”
이건 처음 보는 문구다.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것도 그렇고, 시스템 안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라니.
또한, 그 뒤에 내용을 본 설휘는 의아했다.
‘버그? 그리고 저 단어는 무슨 뜻이지?’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이게 대체 뭘까, 하고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설휘는 곧 몇 가지 가정을 할 수 있었다.
“……탈마나 현경 이상의 경지는 시스템으로 파악할 수 없는 건가.”
가능성 있는 얘기다. 사실 이 시스템이란 것도 그 절대자란 놈이 만든 것이니까.
즉, 플레이어의 능력이 절대자에 준하는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라면, 놈이 만든 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할 터.
“첫 등장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거지.”
나름 흡족한 결과였다.
시스템 안으로 들어왔지만, 시스템이 반응하지 못하는 거다. 상정할 수 있었던 것 중 가장 좋은 상황.
툭. 투둑.
벌거숭이가 된 채로, 설휘는 몸 상태를 점검했다.
예상외의 상황이 있었지만, 덕분에 목표로 했던 것이 다 갖추어졌다. 단시간 내에 탈마와 현경의 균형을 이루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과거와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그나저나 민망하군…….”
누구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설휘는 발가벗은 모습이 괜히 불편해졌다.
그는 주변에 박살 난 관물함에서, 주섬주섬 옷가지를 꺼내 주워 입고는 빠르게 연공실을 나갔다.
괜히 사람들의 눈에 띄기 전에.
“그럼 태황각주 상판대기나 보러 갈까…….”
물론 중요한 인물은 놓치지 않았다.
전생에서 죽인 적도 있긴 했지만.
너무나도 켜켜이 쌓인 악감의 근원.
처음부터 시작하기의 시스템 안에서 가장 자신을 괴롭힌 놈.
이제는 너무나 기다려 왔던 녀석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녀석의 입장은 좀 다를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