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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뮬레이션-398화 (377/379)

398화. 처음부터 시작하다 (2)

태황각.

예전에 들어섰을 때는 칙칙한 색조의 건물부터가 위압감을 잔뜩 주었던 기억이 들었다.

마교의 굵직굵직한 인사들이 대거 포진한, 윗사람 말 한마디에 수하들의 목이 날아가던 살벌한 곳.

하지만 마교주와 교주 직속 제자단들을 만나고, 세상에 또 없는 아수라장을 거치고 와서 지금 다시 본 감상은.

“그다지 볼품이 없군.”

별로 대단할 것도, 두려운 것 역시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외려 설휘의 발걸음은 활기찼다.

스윽. 찌릿.

태황각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치는 경비 무사들. 그들의 살기 가득 품은 눈을 보면 피식 웃음만 나왔다.

“이젠 정겨운 얼굴이지. 나에게는…….”

나이 어린 코흘리개 때는, 동네 어귀에 묶인 똥개만 보아도 겁을 먹는다.

하지만 몸이 크고 어른이 되면, 그냥 발에 걷어채는 게 그런 놈들이다.

성장. 강해진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눈조차 바꿔버린다.

이 때문에 다들 바락바락 악을 쓰며 강해지려고 하고, 여차하면 남을 짓밟으려고 하는 것일까.

“음…….”

태황각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설휘는 조금 머뭇거렸다.

태황각주를 만나면 예전처럼 태황각주 앞에서 무릎을 꿇는 예의를 갖춰야 할까, 아니면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들이받아버릴까.

지금 이 힘이라면 태황각 전체가 달려들어도 한 손으로 죄다 박살 낼 수 있을 정도다.

‘무위가 변했으니 선택지문의 내용도 바뀔까? 전과는 다른 숨겨진 선택 같은 건 없을까?’

갑작스럽게 뜬 버그란 문구, 그리고 플레이어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글귀.

기존의 설정대로라면, 태황각주와 조우했을 때 선택지문이 떠야 한다.

허나 만약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터.

‘지금 내 경지는 어떤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탈마이면서 현경,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이 감각이 공존하고 있는.

어찌 보면 자연에서는 조화가 불가능한 것이 몸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상단전의 소우주였고, 대우주와 합일되는 과정 때문이었다.

하단전은 더 이상 내기를 쌓을 필요가 없어졌고, 또 그것이 불가능했다.

애초에 몸속에 담아둘 수 없는 자연계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이 경지에 오르자 몸의 상태나 무게, 보통의 감각 같은 것도 그다지 의미가 없어졌다. 언제든 원하면 느낄 수 있고, 구분할 수 있으며,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신니가 말했던 장자지몽 같이,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건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지도 헷갈리게 되는 상황이 너무도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일단은…… 맞춰주도록 할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마음을 정했다. 어떤 경우든, 시스템의 반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와라.”

태황각 문 앞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던 녀석 하나가 안내해 줬다.

늘 보던 복장과 인상 그대로다. 여기까지는 과거의 그때와 같았다.

과거에 그러했던 대로 설휘는 태황각주 집무실 앞에 섰고, 이전과 똑같은 자세와 말투로 말했다.

“비객조 분대장 설휘가 뵙기를 청합니다.”

얼마 후 허락이 떨어졌다.

드디어 이번 생에서 태황각주와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마자, 설휘는 왠지 모를 웃음이 나왔다.

낯익은 상황.

역시나 뱀 눈깔 뜬 사마귀와 사팔뜨기 당초인이 앉아 있었다.

‘너무 약해서 한숨부터 나오는군.’

녀석들 뒤에 사군자 병풍이 놓여 있는 것이, 과거에 봤던 그대로였다.

문제는 본인이 너무 강해진 탓에, 이들의 무위가 너무나 한심해 보인다는 것.

“비객조 분대장. 태황각주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래도 어찌 됐든, 구색은 갖춰서 대답했다.

“…….”

“…….”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적막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팔뜨기가 한마디 한다.

“허, 말씀대로 아주 대단한 실력자인가 봅니다. 고개만 대충 까닥이는 모습을 보면요.”

“…….”

설휘는 여기서 잠깐 고민했다.

‘그냥 죽일까?’

한 고비는 넘자라고 생각했는데, 하는 짓거리가 상상 이상으로 역겨웠다.

우물 안 개구리.

한 줌 권력과 대단치도 않은 무예를 가지고 만만한 약자들만 찍어 누르는 게 삶의 낙인, 늙고 비루한 돼지 같은 놈.

이런 놈들에게 그토록 발발 떨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니, 저도 모르게 불쾌해지는 것이다.

‘일단은 확인해 볼 것이 있으니…….’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 판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저들보다 절차적으로 확인해 볼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도 한 여인으로 인해 곧 잊을 수 있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말도 안 되게 발달된 기감이 천장에서 흑비, 태황각주의 호위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만! 괜찮다.”

스륵.

태황각주의 말에 바로 위 천장이 잠잠해졌다.

멈춘 모양이다. 곧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면, 둘의 호흡이 제법 잘 맞는 것일지도.

“허허허…… 이거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 이름도 없는 분대장이란 놈이, 들어올 때도 그렇고. 말투가…… 어찌 대드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여기서 사팔뜨기 오천각주가 끼어들었다.

태황각주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젓는 모습이 보였다.

“허허허, 오천각주.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잘들 노는군.’

이 뒤로 익숙한 대화가 이어졌다.

“추궁하듯 나무라면 저런 식으로 저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게 어디 태황각주의 잘못입니까? 건방진 수하의 잘못인 게지요.”

“그 역시 다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허허허.”

‘그냥 기획이라고 봐야 하나. 내 태도가 바뀌어도 비슷한 대화가 흘러가는군.’

설휘는 뭔가 비슷하면서도 어색한 상황에 흥미를 느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져서일까.

예전에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서 쭈그리고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실속 없는 놈들의 거들먹거리는 행동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흠흠. 그건 그렇고.”

사마귀가 운을 떼자, 설휘는 담담히 녀석의 말을 기다렸다.

“천일관 내 서기관을 맡을 생각은 없나?”

“천일관이라시면…….”

“네 녀석이 마공을 익히고 싶어 하기에 내 특별히 신경을 썼지.”

“영광입니다. 태황각주님.”

설휘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지. 네 녀석에겐 대단한 영광이지. 그래서 말이야, 그에 걸맞게 임무를 하나 줄까 하는데…….”

‘지금인가.’

설휘는 기다렸다. 예전에는 여기서 갑자기 눈앞에 지문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반응이 나타날 것인가. 플레이어가 아닌, 그들이 말하는 버그(사실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르지만)로 시스템 내에 들어온 거라면 여기서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했다.

‘……뜨지 않나?’

거기서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는 태황각주.

그리고 미간을 좁히는 오천각주.

예상과 달리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 [어떤 임무라도 따르겠습니다.]

▷ [다른 임무를 받고 싶습니다.]

▷ [오른팔을 자르겠습니다.]

선택창이 나타났다.

‘오.’

이전과 같은 내용. 그대로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시간이 멈추지 않는군.’

그리고 이전과 달리 시선뿐만 아니라, 선택지 자체가 선택되지 않는다는 것.

무엇보다 설휘의 흥미를 끈 것은.

“뭐야, 왜 아무 말이 없나?”

불쾌해하는 태황각주.

그에 설휘는 살짝 눈을 좁혔다.

‘대충 이런 건가.’

선택지를 선택하지 않아도 대화는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즉, 플레이어가 아니니 선택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지만 원래는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선택지가 뜬다.

설휘는 대충 시스템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 있지. 음……. 굳이 네가 시키는 걸 해야 할까 생각 중이라서 말이야.”

“…….”

폭탄이 떨어진 듯했다.

“저…… 저!”

사람이 얼마나 당황하면 이런 표정을 지을까.

좌중은 반쯤 얼어붙었고, 반쯤은 미미하게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장내에 흐르는 정적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무도 설휘의 말에 질책조차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아악!

그것을 신호라고 생각할 것일까.

천장 지붕이 갈라지며 흑비가 뛰쳐나왔다. 누가 봐도 눈 깜짝할 사이의 즉각 반응이었지만, 설휘에게는 느렸다.

단순히 느린 게 아니라, 멈춘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것이 상단전의 능력인가.’

시간의 흐름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게 아닐까 했다.

잠깐 흑비가 뛰쳐나오는 모습에 정신을 집중했을 뿐인데, 시간조차 흘러가는 게 더딜 정도라니.

어쨌든 설휘는 동귀어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저돌적이며 빠르게 달려든 그녀를.

툭. 빙글.

어깨 한번 잡고, 무게중심을 슬쩍 아래로 내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쿠타탕탕! 쾅!

“크악!”

바닥을 뒹굶과 동시에 벽에 부딪힌 흑비.

뛰어내린 속력 때문에 무게중심이 흐트러지고, 거기서 휘두르자마자 냅다 날아가 벽에 처박힌 것이다.

“……!”

“……!”

그 모습을 지켜본 두 노인이 경악했고, 설휘는 그런 그들에게 담담히 말했다.

“벌써부터 놀라지 마. 어차피 네놈 둘은 여기서 죽을 거야.”

담담히 죽이겠다고 예고하는 설휘.

부르르르…….

늙은이 둘의 얼굴이 동시에 경직되었다.

그리고 당혹스런 감정에서 먼저 빠져나온 것은 태황각주였다.

“물러서라. 네 상대가 아니다.”

이건 흑비에게 하는 말일 터.

그녀는 벽에 부딪힌 후, 자세를 고쳐 잡고 재차 반격을 하려던 모양이었다.

설휘는 까닥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말했다.

“네 주인 말이 맞아. 잠깐 쉬어. 이 늙은이 둘 송장 치우려면…….”

쾅!

설휘의 말에 태황각주가 탁자를 내리쳤다.

우지직! 콰득!

단단한 자단목 탁자를 단숨에 부숴버린 그의 눈에는 불길이 치솟았다. 아니, 비단 눈뿐이 아니었다.

그의 몸속 기류가 뜨겁게 변하고 있었다.

‘화온마공이군.’

“하, 이놈이 어디서 뭐 하나 주워 배웠나 본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오오오!”

후끈!

방 안에서 열기가 팽창하자, 흑비가 입을 가렸다.

어지간한 무인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기류가 쏟아진 것이다.

그럴진대, 설휘는.

“야, 사팔뜨기. 괜히 끼어들지 말고 자리에 앉아 있어. 이놈 처리하고 상대해 줄 테……?!”

쉬익!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황각주가 움직였다.

시간을 주지 않고 일격에 끝내려는 듯, 말 그대로 전력을 다해 움직인 태황각주.

그런 그의 엄청난 속도의 신법은.

턱. 퍼억!

“……?!!!”

화온마공이 채 펼쳐지기도 전에 멈춰져야 했다. 어떻게 된 건지 태황각주는 두툼한 자신의 배를 움켜잡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

“대답해 줄게. 이제 내 집이야. 앞으로 잘 사용할 거거든.”

“이, 이 새끼가아아…….”

태황각주는 다시 한번 마공을 끌어올렸다. 방심한 차에 상대의 기습 때문에 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 윽! 으아아앗!”

하지만, 당연히 헛수고였다. 설휘는 손바닥으로 잽싸게 태황각주의 얼굴을 부여잡은 뒤.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구구궁!

소리가 좀 달랐다.

강하게 내리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뼈를 산산조각 내는, 누가 들어도 죽었다고 확신할 만한 소리였다.

“고통스럽게 죽일까도 생각해 봤지만……. 뭐, 굳이.”

설휘는 손을 털면서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냥, 귀찮아졌다.

이런 같잖은 녀석을 상대로 감정을 소비하는 것이.

나름 불도에 정진한 적이 있어서 그럴까. 복수가 어쩌고, 악연이 어쩌고 하는 모든 것이 허망했다.

툭툭.

손을 턴 설휘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자.

“아…….”

얼굴이 샛노랗게 변한 오천각주가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아마도 감지한 모양이었다. 눈앞의 사내가 자신이 아는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고수라는 걸.

“어이, 사팔뜨기.”

“예…… 예!”

설휘의 말에 오천각주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너다. 준비됐냐?”

“아…… 잠깐. 잠깐이라고요, 씨---바알!”

그가 손을 내저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삭둑.

흑비가 쓰러지며 바닥에 놓은 검. 그걸 집어 든 설휘가 그대로 목을 잘라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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