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처음부터 시작하다 (3)
뚝. 뚝.
피가 흘러 떨어졌다.
단 한 번의 칼질.
갑작스런 혼란 상황은, 사내의 일검으로 그렇게 간단하게 마무리되어 버렸다.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
흑비는 머리가 하얗게 되어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호위무사임에도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
아니, 명색이 호위일 뿐. 애초에 그녀가 태황각주보다 강하지 못했으니 뭘 어떻게 할 능력도 없었다.
그러니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아서라. 날도 좋은데 괜히 덤볐다가 분위기 망치지 말고.”
“…….”
사내의 목소리에 흑비는 흠칫했다. 상대는 자신이 뭘 하려는지도 쉽게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꺼내 든 단검.
보통은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키는 용도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의식적으로 단검을 꺼내 들었고, 상대가 의식해 버렸다.
‘덤비면 죽을 거야.’
너무도 당연하게.
그만큼 조금 전 사내가 펼친 일검은 흑비에게 충격적이었다.
완벽한 검선, 아니 어쩌면 완벽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경지의 차갑고도 깔끔한 일검.
‘도저히 닿을 수조차 없는 경지…….’
그녀 역시 무인.언제고 단 한 번이라도 저런 검선을 만들고 싶어서 정말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무예에는 노력뿐만이 아니라 재능 또한 필요한 법. 십 년을 넘는 고련에도, 결국 그녀는 그런 완벽한 검선을 그려내지 못했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상에 완벽한 검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위안하며 살아오다가.
갑자기 눈앞에서 보고 말았다.
주군을 일격에 참살해버린, 그녀가 알기로 분명 일개 삼류 무사에 지나지 않던 한 사내의 손에서.
“…….”
허무함, 자괴감, 앞날에 대한 막막함. 수많은 복잡한 감정 속에서 그녀는 손에 든 단검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목을 향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하지만 단검의 움직임은 순식간에 봉쇄당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사내가 혀를 차며 흑비의 자결을 저지한 것이다.
“……왜?”
“아니. 내가 저 뱀눈깔을 조금 아는데, 수하들을 딱히 잘 챙기는 인덕 있는 새끼는 아니었거든.”
“…….”
“그런데 넌 왜 굳이 죽으려고 하냐고. 혹시 가족이야? 아니면 뭐, 인질이라도 붙잡혀 있어?”
“가족?”
남자의 말을 흑비는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이라니,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다.
기억조차 까마득한 어린 날부터 그녀는 명령과 고문을 받았고, 수련을 반복하다 태황각주를 자기 몸처럼 지키게 되었다.
“뭐야, 그럼 금제야? 여기서 자살 안 하면 독이나 심법으로 고통스럽게 죽는 거야? 뱀눈깔이 그런 짓을 했어?”
“…….”
설휘는 의아하게 바라보는 흑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주인이 명하면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지끈!
“윽……!”
그러다 갑자기 흑비가 머리를 만졌다. 통증을 느끼는 듯이 보였다.
뚜둑.
설휘는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꺾었다. 독이 발린 단검을 빼앗으며.
“세뇌였구만. 스스로를 물건이라고 여기게 취급했나. 하긴, 그 새끼다운 짓거리지. 사람을 부품처럼 여기는 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소리, 네 목숨은 이제 너의 것이다. 저 터진 뱀눈깔의 것이 아니라.”
의아해하며 묻자, 사내가 측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공이 영 이상한 게 알아들을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새겨들어. 네 목숨은 네 거다. 저기 방금 칼 맞고 죽은 뱀눈깔의 것도, 사팔뜨기의 것도 아냐. 네 인생이고, 네 삶이다.”
“…….”
“죽으려 들지 말고 살아. 족쇄는 풀렸으니까. 알아들었어?”
설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깜박깜박.
하지만 여전히 반응은 미묘했다.
흑비는 눈을 껌뻑이고 있었지만 그건 기계적인 반응이었다. 족쇄가 풀렸다느니, 제 인생 제가 살라는 등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때에 드러내야 할 기쁨이나, 혹은 자신에 대한 반발심, 심지어 주군이 죽어서 느낄 슬픔 같은 것도 전혀 없어 보였다.
말 그대로 감정을 모르는 기계처럼 살아온 인생.
‘이런 개새끼들…….’
설휘는 머리뼈가 박살이 난 채 엎드려 있는 태황각주를 보며 이를 갈았다.
솔직히, 전생에서 흑비와의 인연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태황각주에게 한칼 먹이려다 이 여자에게 제지당하거나, 때로는 태황각주의 명령을 받은 흑비가 설휘의 휘하 부대장을 살해한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 여인의 반응은, 누가 봐도 오랜 시간 세뇌가 되어 이지를 상실한 실혼인의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이제껏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듣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후우.”
설휘는 부서진 탁자 옆에 앉았다.
태황각주.
언제고 돌아와 죽이겠다고 다짐했고, 확실히 복수까지 마쳤는데 갑자기 찜찜한 문제가 생겼다. 바로 흑비.
정신이 완전히 망가졌고, 임무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철저하게 살인 기계로 거듭난 여인.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대화는 할 수 있나?”
“대화……?”
흑비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마치, 그런 쓸데없는 것을 뭐 하러 하느냐는 듯이.
“아니, 그냥 의사소통은 가능하냐고.”
다시 말을 걸던 그때.
“나, 나를 이용해 뭔가를 캐낼 생각이라면 답하지 않겠다! 너는 내 적! 방금 내 주군을 죽인 놈이니까!”
그녀는 갑자기 경계를 하기 시작하더니, 눈빛이 돌아왔다. 마치 조우하기 전처럼.
“……그래, 어련하시겠나. 네 편한 대로 해. 다만 내 앞에서 목숨을 끊는 건 하지 말고.”
“왜지? 왜 나의 방식을 막는 거지? 혹시 나를 고문하기 위해……. 그래, 그거였어! 나를…….”
쿠욱!
악다구니를 듣다 못한 설휘가 수혈을 짚었다. 흑비는 입에 거품을 문 채로 뒤로 넘어가, 드디어 조용해졌다.
“이봐, 나도 바쁜 몸이라고. 어차피 너한테 알아낼 것도 없고, 흥미도 없어.”
툭. 툭. 스윽.
그는 엉망이 된 태황각을 헤집어 이부자리와 옷가지, 약간의 물과 음식을 챙겼다. 그러고는 흑비의 몸에 몇 번 더 혈을 눌렀다.
쿡. 쿡.
진기를 잔뜩 밀어 넣은 점혈법이다.
이걸로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목만 겨우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자결은 못 하겠지.
며칠간 꼼짝도 못 하고 있다 보면 머리도 식을 테고.
둘둘둘둘.
일일이 옷을 챙겨 입히기도 귀찮아, 그냥 이부자리 채로 둘둘 말아서 안에 약간의 물과 음식까지 밀어 넣었다.
그러고서야 한숨을 내쉬는 설휘.
“이놈의 오지랖은……. 그렇다고 죽일 수야 없으니.”
그냥 두고 갔다간 자살을 하든가, 아니면 상부에 보고를 할 거다. 귀찮아진다.
그렇다고 약한 데다 마음까지 꺾인 여자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힘 좀 생겼다고 이래저래 아무나 처죽이고 하면, 결국 태황각주와 자신이 다를 바가 무언가?
“끝까지 기분 더럽게 만드는 새끼라니까. 에이, 퉤퉤!”
기껏 옛날 생각해서 왔더니, 괜히 심사만 뒤틀어진 설휘였다. 앞으로 이쪽을 보고는 오줌도 싸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밖으로 나왔다.
***
“호오. 여기구만.”
천일관 앞에 선 설휘의 표정은 밝았다.
태황각에서 더러워졌던 기분이 단번에 청량하게 개는 느낌이었다. 같은 기억이라도, 천일관에서의 삶은 그에게 너무도 그립고 아련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하하, 하하하…….”
고향.
자신에게 그런 것이 있다면 아마 이곳이 아닐까. 이 안에 모두 있었다.
그간 보고 싶어 했던 옛사람들도.
으르렁거리며 악다구니했던 경쟁자들도.
오랜만에 그리운 친우를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휘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잠깐!”
멈칫.
입구를 지나치는데, 자신을 막는 낯익은 이가 있었다. 사무관 두홍이다.
“어떤 연유로 왔나.”
헌데 보자마자 반말이다. 그것도 왠지 멸시 어린 눈으로.
“…….”
설휘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차림새를 훑어보고 납득했다.
지금 자신이 입은 옷은 소속을 나타내는 문장이나 표식도 없고, 옷감부터 질이 낮은 추레한 하급 무사의 복장이었으니까.
‘아니, 근데.’
그래도 그렇지. 설휘는 살짝 골이 나서 인상을 찌푸렸다.
“허어. 요새 사무관들은 버르장머리가 없군. 초면에 보자마자 반말부터 냅다 갈기니.”
“……?”
순간, 두홍의 낮빛이 서서히 변해갔다.
당연한 일이다. 네놈의 성격을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 저…… 어디서 오셨는지…….”
역시나, 예상대로 말투가 변했다. 설휘는 거기서 더 대차게 나갔다.
“곤마는 안에 있는가?”
“……!”
와락!
두홍이 기겁해서 바닥에 엎드렸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교주의 사제자 이름을 일개 부대원이 마음대로 부를 리가 없으니까.
“그, 조금 전에 올라가셨습니다만…… 오침 시간이라 가급적이면 올라가지 않는 게.”
“허어! 이놈이 건방지게 누구보고!”
“힉! 죄송합니다.”
쿵!
두홍이 아예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전형적인 강약약강. 이렇게 보니, 뭔가 씁쓸하단 생각이 들었다.
“야.”
설휘는 녀석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예…… 예! 하명하십시오!”
“겉만 보고 사람을 대하다 보면, 괜히 골로 갈 수도 있다.”
“……예.”
문지기면 사람 대할 때 그냥 기본, 기본만 하면 된다. 그러면 상대가 숨은 고수든, 성질 더러운 놈이든,
긁어 부스럼은 웬만하면 피할 수 있으니까.
딴에는 평생 목숨 건질 말을 던져주고 설휘는 익숙하게 발을 옮겼다.
***
끼이이익.
꼭대기 층에 올라선 설휘가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창가에 햇살이 비치는 아름다운 실내.
평온하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낮잠을 청하고 있는 한 청년.
‘곤마다.’
운 좋게도 딱 시간에 맞게 그를 볼 수 있었다. 설휘는 잠시 잠든 그의 모습을 보다 인기척을 냈다.
“크흠. 흠!”
“…….”
그러자 서서히 눈을 뜨는 곤마.
천살성이라서 그런가. 누구도 자신을 기습할 리 없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살짝 잠이 덜 깬 멍한 얼굴이, 마침 그의 성격에도 어울린다.
“누구시오?”
그의 말에 설휘는 담담히 대답했다.
“당신이 기억 못 하는 옛 친우.”
“……친우?”
“뭐, 대충 알아두시고…… 난 협상을 하러 왔소. 아마 당신이 거부할 수 없는 좋은 조건일 거요”
스윽.
반사적으로 곤마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기야,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라는 말을 하면.
보통은 협박을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다.
“말해보시오. 좋은 협상은 마다하지 않소.”
하지만 낙천적인 성격 탓인지 몰라도 곤마는 느긋했다.
본인이 누구인지, 어떤 조건이 걸린 건지도 묻지 않으며.
역시나 신분, 그리고 조건 따위는 보지 않는, 낭만 있는 자세다.
“좋소.”
그 말에 설휘는 씨익 웃었다.
시작부터 본론을 꺼내는 게 너무 수월하다 싶어서.
“천마의 넷째 제자 곤마, 당신의 역할을 내가 하려고 하오.”
“…….”
“어떻소? 내 제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