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난 다른 일이 있어서
그렇게 오전의 수련 시간이 끝났다.
오전 내내 호흡만 계속했다. 그러나 이전과는 호흡을 하는 자세가 달라져 있었다.
호흡법을 수련한다고 뭐가 될까란 의구심을 가졌던 당진산이 가장 열정적으로 호흡법에 매달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직접 겪은 덕이다.
그런 당진산의 열의가 다른 세 사람에게도 전해진 것인지, 단목운뢰, 연하민, 낙우진 모두 호흡에 집중하고 있었다.
백리평 역시 자신의 내공심법에 깊이 빠져 있었다.
하무백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뭐, 이 정도 진지해지는 건 상관없겠지.’
아직 얼마나 이들에게 집중할지 정하지는 못했다.
본 지 얼마나 된 아이들이라고.
제자도 아니고 그저 담당 생도일 뿐이다. 자신은 교관일 뿐이고.
제갈명의 말에 그래도 조금 진지해지긴 했지만, 어디까지일지는 시간이 흐르고, 이 아이들과의 관계에 따라 달라지리라.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룡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벌써 밥 먹을 때네. 그럼 밥 먹고, 오후는 자율학습.”
하무백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나려 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그 발을 붙잡는 당진산의 물음. 그 물음에 하무백은 뒤를 돌아봤다.
“왜?”
“밥은 항시 같이 드시더니 갑자기 급히 가셔서 그럽니다.”
당진산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북담룡각. 오늘 거기 식단이 아주 내 마음에 쏙 들거든. 그러니 오늘은 너희끼리 알아서 먹고 자율학습해라. 오전에 특별히 많이 가르쳐 줬으니.”
특별히 많이 가르쳐준 정도가 아니었다.
네 사람의 단전에 삼재공의 내공을 심어 주었으니.
엄청난 것을 해줬다.
홀로 심법을 수련하면 재능에 따라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이 걸리는 것을 아니 어쩌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 것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린 것이다.
“그럼 난 간다.”
그 말을 남기고 하무백이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은 다섯 사람.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적어도 식사 때는 항상 앞장서 움직이던 교관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버려두고 먼저 사라지다니.
어찌해야 하나. 서로 눈치를 봤다.
“뭐, 우리도 밥 먹자고, 밥.”
앞으로 나선 것은 역시나 당진산이었다.
이 다섯 중 가장 쾌활한 성격을 가진 이, 성도 유흥가를 죄다 섭렵한 망나니답게 친화력이 상당히 좋았다.
그동안은 교관에게 버림받다시피 한 칠 조의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눈치를 보느라 조용히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기적까지 교관이 보여주었기에, 더 이상 그리 암울한 분위기는 없었다.
이제야 제대로 같은 조로서 교분을 나눌 상황이 되었다.
서서히 당진산의 본 성격이 나왔다.
“어서 가자고. 여기는 동쪽이 가깝네. 동쪽으로 가자, 가.”
단목운뢰의 어깨에 팔을 턱 걸치고 앞장서서 걸었다. 단목운뢰는 얼떨결에 당진산과 걸음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남은 세 명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낙우진과 백리평이 그 뒤를 따랐으나, 연하민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연하민. 넌 안 오는 거야?”
당진산이 뒤를 힐끗 돌아보고는 물었다.
“난 다른 일이 있어서.”
짤막한 말.
그 말을 남기고 연하민은 몸을 돌려 사라졌다.
“쩝.”
당진산은 아쉽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슬슬 조원 다섯 명이 한데 뭉칠 때도 됐는데 이런 식이라 아쉬운 것이다.
남은 이들이라도 챙겨야 했다.
***
칠 조를 두고 떠난 하무백은 북쪽의 담룡각에 들어서고 있었다.
마침 먼저 들어서던 제갈명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하 교관님.”
“아, 반가워. 제갈 교관.”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넸기에 하무백도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기실 지금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아니, 기대감 때문일까.
“북담룡각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항상 생도들과 함께 드시더니.”
“아, 오늘 이곳 식단이 좀 특별하다고 해서.”
교관 전용의 북담룡각.
아무래도 나머지 세 곳과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교관들을 위한 곳이니.
“그러는 자네는 이곳에 어쩐 일이지?”
“아, 지난번 그 일을 겪고 나서, 매 끼니를 돌아가면서 먹고 있습니다.”
동서남북의 담룡각을 끼니마다 바꿔가며 먹는다는 것이다.
그 말에 하무백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안 그러면 언제 또 그런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순서도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데 마침 이번 끼니는 이곳이었습니다.”
하무백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제갈명을 보았다.
이 친구는 진짜였다.
진짜 생도들을 생각하는 교관이었고, 자신의 소임을 넘어 더 많은 것을 하려고 했다.
오대세가에도 이런 친구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오늘 식단이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긴 한데, 나한테는 특별하거든.”
하무백이 특별히 좋아하는 식단이었다. 그런데 다른 담룡각에서는 나온 적이 없었다.
북쪽에서도 오늘 처음 나오는 것이다. 하무백도 지나가다 교관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고 알게 된 것이다.
그 말에 제갈명은 오늘 식단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 작소육(炸酥肉)일 텐데요?”
그 말에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청명절이로군요.”
제갈명의 말에 하무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갈 교관도 작소육을 알고 있나보군.”
“그저 이것저것 흥미가 많아서 말이지요. 아직 먹어본 적은 없습니다. 하 교관님이 이리 찾으시는 걸 보니 은근 기대가 되는군요.”
“나도 그래. 설마 북담룡각에 백족(白族) 숙수가 있을 줄은 몰랐어.”
하무백은 입맛을 다시며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작소육은 일종의 돼지고기 튀김이다.
계란과 밀가루로 옷을 입혀 튀겨내는 음식인데, 중원 서남부에 거주하는 백족이 청명절에 주로 해 먹는 음식이었다.
작소육을 배식 받은 하무백은 정신없이 음식을 먹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꽤 만족하는 듯했다.
제갈명은 맞은편에 앉아 천천히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귀에 담룡각 안의 교관들의 대화가 절로 들렸다.
“맹룡대 칠 조 너무 설치게 두는 거 아냐?”
“뭐, 어쩌겠어. 비무인 걸. 수석 교관이 병신인 거지.”
“하아. 사도광. 그 자식이 잠룡대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있어. 고작 일 년 차 생도 수석 교관 주제에.”
“킥킥. 맹룡대 쓰레기 집단의 일반 교관한테도 쥐어 터지는 수석 교관이라. 잠룡대 수준도 알만하군.”
“닥치라고. 와룡대 잡것은.”
저들 대부분은 하무백의 얼굴을 몰랐다.
그랬기에 하무백이 들어와 식사를 하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저마다의 대화를 나눌 뿐이다.
맹룡대는 안중에도 없고 와룡대와 잠룡대의 자존심 싸움이 거셌다.
그 와중에 하무백에게 패한 사도광 때문에 와룡대의 비웃음을 사고 있었다.
하무백은 그런 것들을 무시한 채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얼마 만에 먹게 된 작소육인지 모른다.
‘백족 마을에서 마교 장로 놈을 처단하고 대접받았던 그때 그 맛이군. 아주 좋아.’
무척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기느라,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호. 그럼 잘나신 와룡대는 얼마나 대단한지 그쪽에서도 한 번 나서 보지 그러나?”
“그런 쓰레기 고기 방패랑은 얽히는 것만으로도 수치야. 그건 너네 잠룡대에서나 실컷 해.”
“뭐라고? 이 새끼가?”
“얼씨구?”
“자자, 그만들 하고. 그 맹룡대에 그렇게 죽여주는 여자애가 하나 들어왔다며?”
“아아, 정말 장난 아니던걸.”
“연하민이라고 했던가?”
“응? 연가의 여식이랑 이름이 똑같은데? 설마?”
“빙연화(氷蓮花) 말하는 거야? 무림오화?”
“무림오화의 연하민이라고? 연가주가 머리에 칼 맞았냐? 빙연화를 맹룡대에 보내게? 네 녀석 제정신이 아니구만.”
“그렇지? 아니겠지? 그냥 이름만 같은 것뿐이겠지?”
“그런데 정말 죽여주던데. 흐.”
어느새 이야기의 주제는 연하민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다.
조금 전만 해도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 같았던 잠룡대와 와룡대의 교관이 금세 여자 이야기로 한 마음이 되었다.
웃긴 일이다.
그런데 점점 그 내용을 들어주기 어려웠다.
음담패설에 가까운 이야기로 진행된 탓이다.
교관이라는 작자들이 생도를 그런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니.
이 부분에서는 하무백도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리 오랜만의 작소육이라지만 도무지 식사에 집중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연하민은 분명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생도였으니.
이 소중한 시간에.
“저, 하 교관님.”
제갈명은 그런 하무백의 변화를 읽었다. 사실 제갈명도 듣기 힘든 이야기였다. 교관이 생도를 대상으로 놓고 저따위 저열한 말이라니.
아무래도 제갈명 자신이 나서서 사람들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하무백이 젓가락을 식판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막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할 때.
“어?”
“어어?”
사람들의 시선이 담룡각의 입구로 향했다.
한 여인이 사뿐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얼음꽃이 핀 듯, 냉막한 얼굴이었으나 그조차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래서였다.
생도의 신분임을 알려주는 무복을 입고 있는데도, 누구도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연하민은 이윽고 하무백을 발견했다.
살짝 표정이 변한 그녀가 곧장 하무백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오늘 단전에 만들어진 내공의 씨앗.
그것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질문을 하려 했으나, 그 틈을 주지 않고 하무백이 쌩하니 사라진 것이다.
결국 이곳까지 따라왔다.
그렇게 하무백을 향해 나아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막혔다. 누군가 손을 뻗어 진로를 막은 것이다.
“잠깐. 이곳은 생도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맹룡대에서는 그런 것도 안 가르치나?”
가장 먼저 연하민의 미모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이다.
“아.”
짧게 흘러나온 목소리.
그 목소리에 사람들은 다시 헤벌쭉 입을 벌렸다. 목소리마저도 아름다웠다.
연하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음욕이 어렸다. 그럼에도 연하민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을 뿐, 변화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보던 눈빛이었으니.
아니, 사실 맹룡대 칠 조가 신기한 것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저런 눈빛으로 보지 않았다. 같은 조원도, 교관도 말이다.
그래서 잠시 맹룡대에 있으면서 자신의 외모가 변한 건 아닌가 하는 착각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곳의 반응을 보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역시 맹룡대 칠 조의 사람들이 이상한 것이다.
“맹룡대에 있기에는 영 아까운 몸인 걸?”
연하민의 앞을 막은 교관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색욕이 도는 눈빛을 하고는 말했다.
“와룡대로 오는 건 어때? 그러면 이 몸이 특별히 받아주고, 오늘 이곳에 들어온 것도 불문에 붙이도록 하지.”
그는 그리 말하며 은근슬쩍 연하민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연하민은 그의 손을 찰싹 쳐내고는 가슴을 가리며 한발 물러섰다.
“크. 앙탈도 귀여운데?”
그의 목소리에는 음욕이 가득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연하민의 앞을 막은 교관.
그는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엉덩이였다. 연하민은 미처 그것까지 쳐내지는 못했다. 교관의 손이 금나수의 투로를 따라 교묘한 움직임을 보인 탓이다.
교관들이 모여있는 담룡관에서 이런 치욕스러운 일을 당할 줄이야.
“오? 아주 탱탱한데? 그러면 위는 어떠려나?”
어느새 주물럭거리고 있는 쓰레기 같은 교관.
“크크크. 적당히 해. 다음은 내 차례야.”
누군가가 그를 향해 외쳤다.
어이가 없는 일이다. 교관이 생도를 능욕에 가깝게 희롱하고 그걸 다른 교관들이 보며 즐기다니.
설마 이런 일을 당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가문에 있던 때에, 음탕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이들은 많아도 감히 앞에서 수작을 부리지는 못했으니.
그는 이제 노골적으로 연하민의 가슴을 다시 만지려 했다.
“미천한…….”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연하민이 그 말과 함께 상대의 뺨을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턱.
그러나 속절없이 상대의 손에 잡힐 뿐이다.
“뭐라? 미천?”
설마 자신이 맹룡대의 생도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어디 감히 하찮은 맹룡대의 벌레 같은 년이 이 교관님께 그딴 망발이냐. 거기다 손찌검까지 하려 해? 이렇게 예뻐해 주는 걸 영광으로 느끼지는 못할망정?”
그는 연하민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와 별개로 다른 손은 여전히 연하민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가슴으로 향하던 손으로 연하민의 손목을 잡은 것이다.
“감히 그 더러운 손을!”
다른 손이 상대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으나 다시 속절없이 잡혔다.
교관은 한 손으로 연하민의 양손을 제압했다.
“크크. 역시 벌레다운 실력이로구나. 겨우 이딴 실력으로 본 교관에게 손을 휘둘러? 엉덩이는 아주 탱탱하다만. 그 벌로 어디 그 가슴은 어떤지 한 번 볼까?”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던 손이 연하민의 상체를 향해 움직였다.
“퉤!”
연하민이 뱉은 침을 교관은 가볍게 피했다. 그의 두 눈에는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연하민의 눈이 잘게 떨렸다.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잔뜩 채워진 눈빛이다.
온몸의 힘을 사용해 저 개 같은 놈을 떨쳐내려 했으나,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늘 만든 내공의 씨앗의 힘을 사용하려 했으나, 단전에 있는 씨앗은 요지부동이다. 어찌 사용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 내공의 씨앗을 사용하는 방법을 묻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던가.
“이 개만도 못한 새끼가!”
퍽!
분노에 가득 찬 말과 함께 울린 타격음.
연하민을 희롱하던 교관은 어느새 붕 날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