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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무공교관-13화 (13/312)

13화. 잘한 선택인 거야

“음…….”

차향을 음미하며 작은 침음을 흘리는 팽도율.

그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하무백을 난감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아주 시원하게 저질렀구만.”

“그게 무슨 말이오? 저지르다니. 그놈들이 쓰레기였지.”

하무백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한 놈은 대놓고 싸우자고 시비를 걸었고, 다른 한 놈은… 이야기 못 들었소?”

하무백의 물음에 팽도율은 다시금 찻잔을 입으로 가지고 갔다.

“한평. 그 친구는 참…….”

팽도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북담룡각에서 어떤 짓을 벌였는지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정도로 정리한 게 다행인 줄 아시오. 아니면, 연가에 오늘 있었던 일 전부 알리길 바라오?”

“끄응.”

하무백의 말에 팽도율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가 정말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일에 대한 이야기가 연가에 흘러 들어간다면?

그때는 연가와 도림의 전쟁이 벌어지는 거다.

아니, 그 전에 자신이 연하민을 교룡관에 숨겨줬다는 이유로 팽가와 연가 사이에도 문제가 생길 여지가 컸다.

“알겠네. 알겠어. 다만, 그건 알아두게. 그 아이에게 연가는 지옥이었을 게야.”

연가에 알리는 것이 연하민에게도 좋지 않음을 에둘러 말하는 팽도율이다.

“교관들 관리 좀 잘 하시오. 실력 좀 있다고 그런 쓰레기를 그냥 그리 두다니. 쯧.”

혀를 찬 하무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관주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팽도율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바람 잘 날이 없다.

교룡관주가 되어 보낸 지난 몇 년보다 최근 며칠이 훨씬 더 힘들었다.

***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련시간이 되었지만 연무장에는 칠 조의 생도 다섯 명만 덩그러니 있었다.

한평 교관이 와룡대의 다른 교관에게 업혀 사라진 후에 하무백도 어딘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구경하는 교관들이 수군거리는 말 속에서 어쩌다 이런 사달이 벌어졌는지 대강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단목운뢰는 연하민을 힐끔 쳐다보았다.

‘예쁘기는 엄청 예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사실이다. 다만 저리 아름다운 이가 자신과는 인연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여지껏 말도 제대로 못 붙이고 있었다.

그저 같은 조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연하민. 교관님이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고. 교관은 잘 만난 것 같네?”

대강의 사정을 짐작한 당진산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시끄러.”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평소보다 더욱 냉막한 말이었다.

당진산의 서운하다는 듯한 얼굴에도 연하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오늘 있었던 그 치욕스러운 일을 곱씹기에 바빴다.

‘강해져야 해.’

결론은 그것뿐이다.

연하민은 즉시 움직였다. 커다란 방패를 들고 방패술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오전 내내 심법을 수련했으니 이제는 외공을 수련할 때다. 그런데 하무백에게는 아직 심법만 배웠으니, 방패술이라도 수련할 수밖에.

그 모습에 단목운뢰도 수련을 시작했다.

역시 방패술이었다.

“쯧. 성실하다니까.”

그 모습에 당진산이 중얼거렸다.

연하민과 단목운뢰의 모습에, 오전 수련 마지막 순간에 교관이 오후는 자율학습이라 한 것을 떠올린 백리평은 검을 잡고 연무장에 섰다.

사문인 종남파의 검술 수련을 위해서였다.

“흐음.”

그 모습에 당진산은 잠시 고민했다.

방패술은 딱히 끌리지 않았고, 가문의 무공도 별로였다.

아무래도 하루만에 내공을 심어준 교관의 삼재공에 흥미가 동한 상태였다.

그런데 초식이라고는 배운 것이 없으니.

“에라. 나는 일단 좀 쉬련다.”

그리고 나무 그늘로 향했다.

세 사람을 물끄러미 살피던 낙우진은 방패를 가지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자율학습이라 했으니 어차피 교관은 나타나지 않을 것. 각자 알아서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다.

“당진산. 너 혼자 팔자 좋구나.”

그때 나무 뒤에서 들린 목소리.

교관이었다.

당진산은 흠칫했으나, 놀라지는 않았다.

어제였으면 놀랐겠으나, 오늘은 아니다. 이미 절정고수를 박살내는 모습을 봤다.

그런 고수라면 당진산 자신이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으니.

“모여라.”

하무백이 연무장 가운데로 향했다.

“원래는 자율학습으로 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진도를 빨리 나가야 할 것 같다.”

교관들이 그렇게 무시하는데, 잠룡대와 와룡대의 생도들이라고 무시하지 않을 리 없었다.

어린놈들은 어른을 보고 배우고, 따라 하기 마련이니.

특히나 연하민의 미모에 혹해 쓸데없는 수작을 부릴 놈들이 계속 나타나리라.

교관이라는 새끼가 그렇게 저열하게 노는데, 그런 놈에게 배운 생도들이 정상일 리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앞장서 묻는 이는 역시나 당진산이었다.

“너희들이 무시를 당하면, 내가 기분이 더럽더라고.”

하무백의 대답에 다섯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 보여준 교관의 모습으로는 상상도 못할 말이었으니까.

“큼. 나도 그동안 몰랐는데. 오늘 알았다.”

괜한 헛기침.

그 말에 당진산이 은근히 웃었다.

“어차피 2년 뒤에 죽으러 갈 거, 집에나 가라면서요?”

“그 생각은 변함은 없다만. 적어도 내가 여기서 너희들이랑 있는 동안은, 내 기분이 더러워지는 건 싫거든.”

“호오?”

당진산의 반응에 하무백이 그 눈을 직시했다.

“너, 조장.”

“네?”

갑작스러운 말에 당진산은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게, 네가 적임자네. 아직 조장도 안 정했었는데. 지금부터 당진산 네가 조장이다.”

하무백의 말에 단목운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자신들 다섯 중에는 당진산이 조장에 가장 어울렸으니.

“저것 봐라. 단목운뢰도 동의하잖아.”

당진산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하무백의 물음에 다른 세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정.”

“아씨. 귀찮은데…….”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리는 당진산. 그러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 구성원 사이에서는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초식을 익힌다. 우선 삼재공 초식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삼재권법부터.”

그러면서 시선이 백리평에게로 향했다.

“권법 익힌 것 있나?”

“없습니다.”

“그럼 너도 같이 익혀라.”

“하지만 심법이…….”

“삼재권법은 상관없어. 그러니까 같이 수련해. 검을 잃었을 때도 생각해야지.”

하무백의 강한 어조에 백리평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질문 있습니다.”

그때 연하민이 짧게 말했다.

“뭐지?”

하무백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오늘 아침에 만든 내공. 그것을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 물음에 하무백은 물끄러미 연하민을 바라보았다.

저 답답한 생도를 어찌해야 할까. 겨우 저것 때문에 그곳으로 자신을 찾았다가, 그런 수모를 당했단 말인가.

어련히 때가 되면 배울 것을. 무엇이 그리도 급해서.

“오늘 아침에 만든 건 고작해야 내공의 씨앗이다. 아직은 미약하기 그지없지. 그걸 너희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은 아직은 무리야.”

“그럼 언제쯤…….”

“계속 수련을 한다면 움직일 수 있을 거다. 다만, 삼재공으로 쌓은 내공이니 삼재공의 초식 즉, 삼재권법을 수련하다 보면 자연스레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될 거다. 그 이후에 본인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더 수월해지는 거지.”

그 말에 단목운뢰와 연하민이 두 눈을 반짝였다.

당진산은 뭐 저리 당연한 이야기를 하냐는 표정이었고, 백리평은 자신의 사문의 내공이 있었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낙우진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삼재권법은 오늘 다들 봤지?”

“네?”

가장 먼저 반문한 이는 역시나 당진산이다. 다른 네 사람의 표정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대체 언제 가르쳐 줬단 말인가.

“다들 점심때, 북담룡각에서 내가 그 빌어먹을 놈 두드려 패는 거 안 봤나?”

그건 봤다.

아주 살벌하게 팼다.

맹주의 독문무공인 단천참마도를 사용하는 한평 교관의 도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아주 아파 보이는 곳에 여지없이 주먹을 박아 넣었었지.

그 장면을 떠올린 당진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리평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른 세 사람은 하무백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볼 수준이 안되었기에 그저 멀뚱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알아본 사람이 둘이나 있군. 그게 삼재권법이다.”

“마, 말도 안 돼…….”

백리평이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그의 솔직한 심정이 그대로 튀어나온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저자의 삼류 시정잡배들도 배우려면 배울 수 있는 것이 삼재권법이다.

그런 권법으로 정천맹주의 독문무공인 단천참마도를 깨부쉈다고?

그 누가 믿겠는가?

“무공 자체의 고하가 있을 수 있지만, 누가 익혀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고하가 의미가 없어지는 수도 있다. 너희들은 오늘 그걸 본 거고.”

하무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어지간한 무공도 아니고 삼재권법으로요.”

당진산이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열심히 하면?”

그 대답에 당진산과 백리평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흐음. 내가 잘나서?”

그 표정에 이어서 나온 설명.

“교관님. 좀 재수 없습니다.”

당진산이 불퉁하니 말했다. 일견 버릇없어 보이는 말에 단목운뢰는 기함했으나, 하무백은 상관없다는 듯 빙긋 웃었다.

“너희도 좀 그렇게 재수 없는 사람이 되도록 해보자.”

그 말과 함께 삼재권법의 초식 수련이 시작되었다.

가장 열성인 것은 연하민이었다.

담룡각에서 교관님이 자신에게 그랬었다.

똑똑히 봐두라고.

전음이라는 것까지 사용해서 말했으나, 보려야 볼 수가 없었다.

그 어지러운 움직임을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대결의 여파로 요동치는 거센 바람을 피하기에 바빴으니.

그래서 더욱 열심히 주먹을 내질렀다.

다음에는, 똑똑히 두 눈에 담으리라 다짐하면서.

언제부터였을까.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연하민의 단전에 있던 작은 씨앗이 간질거리는가 싶더니 조금씩 움직였다.

***

늦은 밤.

간단한 수욕을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연하민은 담담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위가 어둠에 잠겨 별빛만 점점이 보이는 하늘.

그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오늘 낮의 일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어디서 감히 내 새끼를 능욕하고 있어.’

교관이 했던 말이다.

그 말이 연하민의 가슴 깊숙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는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랬다.

자신을 위해 저렇게 나서주는 사람이 누가 있었던가.

절정고수를 상대로 자신의 앞을 지켜주는 듬직하고 넓은 등.

처음 겪은 일이었다.

가문에서 연가의 성을 가진 이들 중 유이한 자신의 편이었던 오빠도, 막내 숙부도 저리 나서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머니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곳에 와서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람이 저렇게 나서주다니.

신선한 경험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충격이기까지 했다.

어차피 죽을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며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던 교관이 그랬으니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느니, 그곳에서 죽는 게 낫지.’

그런 심정으로 그냥 버티고 있었다.

몸을 가꾸라는 의도로 가르쳐준 체술이라도 수련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 난생 처음으로 내공이라는 것을 느꼈고,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을 만났다.

“잘한 선택인 거야…….”

연하민은 작게 중얼거린 후 잠자리에 들었다.

앞으로 이곳에서의 일에 작은 기대를 가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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