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러면 앞으로 많이 힘들 거다
“오늘도 괜찮았어.”
하무백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연무장을 향해 걸었다.
그런 그의 기감에 재미난 것이 걸렸다.
“응? 이건 당가 같은데?”
동담룡각 근처에서 작게 퍼진 기파.
그건 분명 당가의 그것이었다.
“당진산 녀석 말고도 당가 녀석이 있었던가? 이건 제법 실력이 좀 있는 녀석 같은데?”
발길이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
“뭐해? 언제까지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거지?”
당추가 당진산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타핫.”
그와 동시에 당진산이 당추의 품을 향해 파고들었다.
정직한 공격.
정면으로 곧게 뻗어 나오는 주먹.
당추는 몸을 살짝 트는 것으로 가볍게 그 주먹을 피했다.
“하. 정말로 삼재권법이라니.”
헛웃음을 지으며 당추는 왼손을 휘둘렀다.
당진산의 얼굴을 향해 정확히 날아오는 손바닥. 당진산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왼손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삼재권법 중 지(地)의 초식.
하무백의 갈굼에 가까운 지적을 받아가며 한 달간 죽어라 휘두른 주먹이었다.
정확히 당추의 손바닥을 쳐냈다.
“호?”
당추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어렸다. 설마 자신의 손을 쳐낼 줄이야.
뺨을 정확히 쳐올리는 짜릿한 손맛을 기대하며 휘둘렀건만.
“재미있네. 겨우 삼재권법으로 내 손을 쳐냈단 말이지. 성도화화공자가?”
당진산이 다시금 짓쳐 들자, 당추는 보법을 밟으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허리에서 풀어 오른손에 감아 들었던 채찍을 풀었다.
당가만의 비전인 특수한 실로 꼬아 만들어서, 얇으면서 질기고 가벼웠다.
가죽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당추의 주특기는 원래 암기였기에 사실 사편(絲鞭)은 암기가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병기였다.
다만, 교룡관에서는 암기의 사용이 금지였기에 사편을 풀어낸 것이다.
그 모습에 당진산이 마른침을 삼켰다.
빠르게 몰아쳐서 한 방이라도 먹이려고 했는데, 스치지도 못했다.
자신을 공격하는 손바닥을 쳐낸 것이 전부일 뿐.
“그럼 어디 이것도 한번 쳐내 보라고.”
새하얀 사편이 뱀처럼 영활하게 움직이며 날아갔다.
영사구편(靈蛇九鞭).
사천당가의 절기가 당추의 손아래 펼쳐졌다.
당진산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사편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진산도 잘 알고 있는 편법이다.
아홉 가지의 초식 모두 알고는 있다. 다만 알고 있다고 과연 피할 수 있을까.
‘삼재권법으로는 무리다.’
당진산은 자신의 수준을 냉정하게 판단했다.
삼재권법으로 저 사편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삼재공의 내공도 부족했다.
결국은 당가의 무공을 사용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머리 한쪽을 차지하는 생각이다.
내공은 제법 있었다. 다만 그뿐이다.
당가에서 배웠던 무공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었다.
삼양귀원공(三陽歸元功)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귀원보(歸元步)를 밟았다.
그 모습을 본 당추의 입가에는 조소가 어렸다. 당진산의 수준을 뻔히 알고 있는 탓이다.
분명 제대로 방위를 밟지도 못하고 다리가 꼬여 넘어져 자신의 사편에 형편없이 뚜드려 맞으리라.
당가제일둔재(唐家第一鈍才).
당진산의 또 다른 별명이었다.
침착하게 배웠던 대로 방위를 밟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초식대로라면, 피해야할 방위는 뻔했다.
다만, 자신의 몸이 그것을 제대로 행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당진산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다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귀원보를 펼치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덕분에 당추의 사편은 헛된 바닥만 두드렸을 뿐이다.
“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 이건가? 그럼 제대로 굴려주지.”
채찍의 움직임이 변했다.
변초가 섞이기 시작했고, 그러한 변화는 당진산이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당진산의 선전은 거기까지였다.
차악! 차악! 차착!
채찍이 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크윽.”
옷이 찢어지며, 살갗이 붉게 물들었다. 등짝은 살이 터져 피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익.”
그 모습에 단목운뢰가 주먹을 꽉 쥐고는 당장에라도 뛰쳐나가려 했다.
그런 그의 어깨를 백리평이 붙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둘의 비무였기에 끼어들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니 끼어들어 봐야, 단목운뢰는 더 심한 꼴을 당하리라. 그것을 알기에 백리평이 막은 것이다.
단목운뢰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그 사이에도 당추의 사편은 영활한 뱀처럼 움직이며 당진산의 몸을 두드렸다.
다시 한번 크게 움직이는 사편.
노리고 있는 곳은 얼굴이었다. 당진산은 양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그러나 이어진 고통은 없었다.
사편이 끝까지 뻗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궁지후가 당추의 어깨를 잡은 탓이다.
“그쯤 하지. 승부는 난 것 같은데.”
묵직한 음성이다.
당추는 그 말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남궁세가의 소공자가 하는 말을 감히 거부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지.”
사편을 다시 허리에 감은 당추는 당진산을 힐끗 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제야 주변에 모여들었던 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이미 점심시간은 끝난 때였다.
“허억. 헉. 헉.”
당진산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뚜드려 맞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상당한 체력이 소모되었다.
그럼에도 당진산은 쓰러지지 않고 꿋꿋이 서 있었다. 당가에서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간의 수련이 효과가 있었나?’
무식하기 짝이 없던 근골 수련.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쇳덩이들.
아무래도 이번만은 그 덕을 본 것 같았다. 형편없는 모습으로 패배하긴 했지만.
당가에서의 자신을 생각하면, 분명 의미 있는 발전이 있었으니.
“진산!”
단목운뢰가 당진산을 향해 달려갔다.
“윽. 아파. 살살.”
단목운뢰의 손길에 당진산이 신음을 흘렸다.
나머지 세 사람도 당진산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비무의 형식을 띠고는 있었지만, 일방적인 시비와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평. 잘 참았어. 고맙다.”
현재 수준에서 다섯 중 가장 강한 이는 백리평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당추의 상대는 아니다. 둘 모두 잘 아는 당진산의 냉정한 평가였다.
그랬기에, 백리평 마저 나섰다면 문제가 더욱 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별로.”
백리평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제야 단목운뢰는 자신의 어깨에서 은은한 통증을 느꼈다.
슬쩍 옷자락 사이로 보니, 백리평이 자신을 말리기 위해 잡았던 부분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백리평은 단목운뢰를 말리면서, 스스로의 분노 역시 참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쯧쯧. 꼴 한번 좋구나.”
그때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다섯의 고개가 한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하무백이 서 있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당진산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네가 당추라는 놈과 막 마주섰을 때 도착했지.”
“왜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단목운뢰가 원망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생도들 간의 문제고, 이미 비무가 시작됐는데 내가 끼어드는 것도 우습지. 이런 꼴을 당할 줄은 몰랐다만. 쯧쯧.”
하무백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일단 우리 연무장으로 가자. 가서 이야기 하자.”
하무백이 앞장섰다.
연무장으로 향하며 하무백은 식사 중 제갈명에게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어떻게 알고 나타나는지, 어쩌다 하무백이 북담룡각에 갈 때면 항상 제갈명을 마주쳤다.
‘하투제라고 했지?’
식사에 집중하느라 대충 흘려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그 하투제에 지대한 흥미가 생겨났다.
***
오후 수련은 삼재권법의 초식 수련이다.
초식에 따라 주먹을 뻗고 발을 움직이는 이들의 눈빛이 흐리멍텅하게 죽어 있었다.
당진산이 당한 일 때문이리라.
하무백은 그 모습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겨우 그 일로 이런 모습이라니.
“너희들 겨우 그런 걸로 그러면, 산월마림에 도착하자마자 죽는다. 그냥 집에 가라.”
하무백의 입에서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튀어나온 소리다.
집에 가라.
당진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는 집에 못 간다. 당가에서도 모자라 교룡관에 와서까지 당추에게 그 꼴을 당했는데.
쪽팔려서 어찌 간단 말인가.
당추 놈이 얼마나 떠벌려 놓을지 겪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단목운뢰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자신이 약한 탓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하민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정말 집에 갈 거냐? 그런 놈에게 당했을 때는 그렇게 죽상을 짓고 있는 게 아냐. 다음에는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분노에 차 있어야지. 쯧. 그렇게 눈빛들이 죽어 있어서야…….”
“다음에 복수할 수 있습니까?”
단목운뢰가 물었다.
“뭐, 하기 나름이다.”
그 대답에 단목운뢰의 눈에 거센 불길이 일었다.
“하겠습니다.”
짧은 결의.
그 모습에 하무백은 피식 웃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다.
“당진산. 네가 왜 그놈과 비무를 하게 됐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졌는지는 알고 있지.”
“…….”
당진산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놈. 참 싸가지가 없더군.”
시작은 보지 못했으나, 끝은 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마 그래서 기분이 더 더러울 거야. 그러니 해야지. 복수. 그래야 그 더러운 기분이 가실 거다.”
하무백은 당진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당진산의 꽉 쥐어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행이랄까? 적당한 기회가 있더군. 하투제라고 알고 있나?”
하무백의 물음에 모두의 얼굴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뭐, 나도 오늘 밥 먹다가 들었다만.”
“그게 뭡니까?”
단목운뢰가 물었다.
“음. 일 년 차 생도들의 단체 비무라고 할까? 아니면 집단 유격전 모의 전투라고 할까?”
하무백의 말에 다섯의 얼굴에 어린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
“하지날. 하투제에 참가한 모든 조를 적당한 산에 몰아넣는다고 하네. 그리고 낮 동안 산속을 돌아다니면서 마주치는 조들과 전투. 밤에는 전투 금지. 그렇게 칠 일을 진행해서 최후의 한 조가 우승. 간단하지?”
두 번의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해 마련된 행사라고 했었다.
일 년 차 생도들에게, 당시의 전쟁 중 무림의 영웅들이 어떤 고난을 헤쳐 승리를 이끌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주겠다는 의도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하무백은 그저 웃었다.
겨우 그런 애들 장난 같은 유격전으로 어찌 그때의 그 참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별 의미 없이 흘려들었다.
두 번의 전쟁 한 가운데 있었던 하무백으로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대회였으니.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당추라는 놈에게 당진산이 박살이 났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시비를 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당하기만 하면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갚아줘야지.
그것도 공식적인 곳에서, 아주 철저히 박살을 내서.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하투제를 떠올린 것이다.
“어때? 참가해서 복수해볼 거냐?”
“네!”
하무백의 물음에 단목운뢰가 가장 먼저 큰 소리로 답했다.
“하겠습니다.”
당진산 역시 이를 악물고는 대답했다.
하무백의 시선이 다른 세 사람에게로 향했다.
“하죠.”
백리평의 짧은 대답.
낙우진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하겠다고 답했다.
연하민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면 앞으로 많이 힘들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