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19화 (19/312)

19화. 오랜만이다

“헉헉헉.”

“커억.”

“흐억흐억.”

거친 숨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과연 하무백의 말대로 힘들었다. 정말로 욕 나오게 힘들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지금까지의 수련은 마치 아이 장난 같았다.

수련의 밀도가 달랐다.

“쯧. 겨우 이 정도로 뻗으면 곤란해. 오늘 첫 날이다.”

하무백이 바닥에 널브러진 다섯 사람을 보고는 혀를 찼다.

이미 서쪽 하늘은 붉게 물들다 못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자, 그러면 이제 마지막.”

하무백의 말에 다섯 사람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이제 끝이 보이는 것이다.

“오대일 대련이다.”

싱긋 웃는 하무백.

다섯 사람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대련이라니.

처음 있는 일이다.

다섯 모두 자신들의 교관이 얼마나 괴물 같은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직접 절정고수를 묵사발로 만들지 않았던가.

“수준 맞춰서 상대해줄 테니까.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말고.”

하무백이 손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자, 들어와. 어서.”

그럼에도 다섯은 주춤거렸다.

“너희들이 안 오면, 내가 간다. 그러니까 어서 들어와.”

연이은 교관의 재촉.

가장 먼저 나선 이는 단목운뢰였다. 땅을 박차고 하무백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다리가 무거웠다.

그렇게 뻗은 주먹은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너무도 간단하게 뒤로 날아갔다.

“그렇게 무작정 달려들면 저 꼴이다.”

교관의 지적에 남은 네 사람은 천천히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감히 달려들지는 못했다.

그 사이 단목운뢰가 몸을 일으켜 다시 합류했다.

이번에 달려든 것은 당진산이다. 그와 동시에 백리평이 하무백의 측면을 노리고 움직였다.

하무백이 둘을 막는 사이 연하민이 그의 등을 노렸다.

제법 머리를 쓴 합격이었다.

사전에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역할을 분배했을까?

‘제법.’

살짝 흡족한 마음이 드는 하무백이었으나,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주먹은 더욱 무자비했다.

다섯이 전력을 다해 달려들었지만, 일각은커녕 반각도 버티지 못하고 다들 바닥에 드러누웠다.

“헉헉헉. 가뜩이나 수련으로 체력이 바닥인데……. 대련이라니. 너무 하시네요.”

당진산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전쟁 중에는 적이 너희들 체력 사정을 봐주면서 나타나지 않아.”

“…….”

돌아온 대답에 당진산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하투제 역시 마찬가지다.”

사위는 이제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뭐, 일몰이 지났으니 이제는 전투 금지인 시간이다만. 그것도 사실 너무 물러. 밤에는 전투 금지라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하무백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다.

“밤이야말로 전쟁의 지옥도가 펼쳐지는 때이거늘. 쯧.”

씁쓸한 얼굴로 작게 혀를 차는 하무백. 그의 표정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면 저녁들 잘 챙겨 먹고. 내일 보자.”

하무백이 손을 흔들며 연무장을 떠났다.

***

땀이 흠뻑 젖은 몸을 계곡 물에 시원하게 씻었다.

오늘 수련도 만족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하투제라는 걸 치를 산이 이곳인가?”

하무백이 어둠에 물든 산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교룡관 근처에 그런 규모가 될 만한 산이 이곳 정도였다. 그래서 하무백도 이리로 수련을 하러 온 것이다.

땀을 씻어낸 하무백은 물 밖으로 나와 검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검을 가지고 왔다.

“교룡관에 와서는 처음인가?”

검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리는 하무백.

기실, 직접 수련을 할 단계는 까마득히 지난 경지에 올랐다.

그럼에도 외공과 근력 수련은 습관이었기에 매일 같이 했다.

오늘.

오랜만에 대련이라는 것을 했더니, 살짝 마음이 들떴다. 그래서 굳이 검을 챙겨 들고 온 것이다.

스르릉.

맑은 소리와 함께 검이 검집 밖으로 몸을 드러냈다.

새하얀 검신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오랜만이다.”

하무백이 검신을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이렇게 검을 뽑아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했다.

실상 언제부터인가, 검을 뽑을 일이 없었다. 그냥 주먹만으로도 웬만한 상대는 다 쓰러트렸으니까.

전쟁이 끝난 이후.

하무백으로 하여금 검을 뽑게 만드는 일은 없었다.

그랬으니, 정말 오랜만이다.

그럼에도 검은 바로 직전에 손질을 해놓은 듯 시리도록 차가운 빛을 흘리고 있었다.

하무백은 가만히 검을 들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거의 멈춰있는 듯이 보이는 지극히 느린 움직임.

느림의 극치였다.

만검(晩劍).

사부로부터 혹독하게 가르침을 받았던 수련법이다.

내공이라고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근력만으로 지극히 느리게 초식을 따라 움직이는 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과연 저게 무엇인가 싶을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에서 검법의 초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무극여의팔절검해(無極如意八絶劍解).

하무백의 독문절기가 달빛 아래 천천히 펼쳐졌다.

일절부터 팔절까지 모두 펼친 하무백이 호흡을 골랐다.

“괜찮군.”

나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하무백의 검은 그 사이 또 한 단계 경지가 올라 있었다.

스스로도 그것을 느꼈다.

전쟁이 끝난 후 의도적으로 검을 멀리했었다.

무공 수련도 외공과 근력 수련 위주였다. 그리고 운공.

검은 의도적으로 잡지 않았다.

전쟁 동안 피를 너무 지긋지긋하게 본 반동이었다.

그럼에도 실력이 퇴보하기는커녕 오히려 경지가 올랐다.

하무백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다.

‘숨 쉬고, 보고, 듣고, 겪고, 행하는 모든 것이 곧 수련이니라.’

언젠가 사부가 했던 말이 지금 다시 귀에 울리는 듯했다.

“잘 지내고 계시려나.”

문득 사부 생각이 났다.

제자라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맡아서 가르치는 아이들 다섯이 생긴 탓일까.

괜히 사부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 한번 시간을 내서 사부를 찾아봐야겠다 마음먹었다.

하산한 이후 가끔 서찰을 전할 뿐 직접 찾아가지 않았었다.

아니 찾아가지 못했다.

피에 절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드릴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또 그 아이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래서 서찰로 소식만 전했을 뿐이다.

“찾아가야지. 피 냄새가 조금 더 빠지면.”

그때가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검해를 펼치며 그런 확신을 가졌다.

다시 한번 몸을 씻고 옷을 챙겨 입었다.

몸을 날려 교룡관으로 향했다. 담장을 훌쩍 넘는데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흠…….”

절로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느껴질 리 없는 기척인 탓이다.

“오셨군요.”

하무백의 모습을 확인한 당진산이 담담히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운뢰가 그러더라고요. 자시가 넘어서 수련을 하다가 교관님을 봤다고.”

“그래. 운뢰는 수련하고 있었지. 너처럼 하릴없이 앉아 있던 게 아니라.”

“지금 축시가 넘었습니다만? 저 정말 오래 기다렸습니다.”

검을 펼치느라 평소보다 한 시진 정도 늦었다.

당진산의 너스레에 하무백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정말로 복수할 수 있을까요?”

불안한 듯 살짝 떨리는 목소리다.

“죽어라 하면 가능성이 있지.”

“하지까지 고작 한 달하고 보름 정도 더 남았습니다.”

“많이 남았네.”

하무백은 담담하게 답했다.

“하지만 제가 보낸 지난 세월에 비하면 엄청나게 짧은 시간이지요.”

그 목소리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쯧.”

하무백이 혀를 찼다.

“따라와라.”

그가 당진산을 데리고 간 곳은 교룡관 밖의 허름한 주루였다.

손님이라고는 한 명도 없이, 그저 점소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곳이었다.

간단한 안주거리와 싸구려 술 한 병.

하무백이 잔을 채워 당진산에게 건넸다.

“딱 한 잔이다. 내일 죽어라 수련하려면.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술잔을 받아든 당진산이 한 모금 목을 축였다.

“제 아버님은 사천당가의 가주십니다. 제가 넷째 아들이지요.”

“알고 있다.”

“당가삼준(唐家三俊)이라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제가 봐도 무척 뛰어난 이들입니다. 현재 당가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 셋이지요. 제 큰형님, 그리고 제 여동생이 그중 둘입니다.”

하무백은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오늘 낮의 그 녀석이죠. 당추.”

그 말에 하무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법 뛰어난 재능을 가진 듯했으나, 삼준이라 불리기에는 부족해 보였던 것이다. 적어도 당가라는 세가에서는 말이다.

게다가 인성에도 문제가 많아 보였고. 그런 놈이 삼준 중 하나라니. 삼이라는 숫자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끼워 넣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사촌입니다. 저랑 나이도 같지요. 정확히는 저보다 늦게 태어나 동생인 놈입니다만. 직계였다가 방계가 된 녀석이지요. 조부께서 가주셨을 때는 숙부의 아들, 그러니까 가주의 손자이니 직계였습니다만. 제 부친이 가주가 되면서, 방계가 되었습니다. 당가는 가주의 직계 외에는 방계가 되는 게 가법입니다.”

넋두리다.

그랬기에 하무백은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가끔 술을 홀짝이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하는 동안 당진산도 간간이 목을 축였다.

“재능이 넘치는 녀석이었는데, 방계가 되는 순간 대우가 달라졌습니다. 직계에게만 전해지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요. 저와 녀석이 열 살쯤 그렇게 되었으니, 아마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울분은 저에게로 향했지요.”

당진산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젖히고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제가 정말 재능이 없었거든요. 그럼에도 직계라는 이유만으로 그 녀석에게는 전수가 금지된 여러 절기들을 제가 배웠으니.”

말을 이어갈수록 당진산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습니다. 한심한 일이지요. 당가제일둔재. 그게 당가에서의 제 별명입니다. 후후.”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음. 내가 볼 때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하무백의 말에 당진산의 눈꼬리가 살짝 휘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오늘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뻔히 초식과 투로를 아는 편법조차 제대로 피하지 못하는 모습을요. 재능이 미천해서 직계에게 전해지는 만류귀원공(萬流歸元功)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저 삼양귀원공을 익혔을 뿐이지요.”

“그래도 오늘은 조금 달랐을 텐데?”

“…….”

당진산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분명 세가에서와는 달랐으니까.

그때는 한 번을 피하지를 못하고 형편없이 당했다.

“성도화화공자라고 했던가?”

하무백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진산이 고개를 숙였다.

“미천한 재능에 절망하고, 현실에서 도망치려 할 때 얻은 부끄러운 별명입니다.”

“그 때문에 당가주께서 너를 이곳에 보낸 것 같군.”

“…그렇습니다.”

“고작 두 달 만에 한 번은 피했다.”

하무백의 말.

당진산은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가 술잔을 들었다.

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살짝 한숨을 내쉰 하무백이 잔을 채워주었다. 한 잔이라 했지만, 그렇게 딱 자를 수가 없었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고사는 알고 있겠지?”

하무백의 물음에 당진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눈에 의문이 어렸다.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네 녀석이 대기(大器)라고는 하지 않겠다. 다만 네 녀석과 당가가 그릇의 모양이 맞지 않았을 수는 있어.”

“…….”

“한 번도 피하지 못했던 걸, 고작 두 달 만에 한 번은 피할 수 있게 된 게 그 반증일지도 모르지.”

하무백은 자신의 빈 잔을 채웠다.

당진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수다스럽던 성격, 유쾌함, 그리고 작은 반항기까지.

그 모든 모습은 자신의 얕은 재능을 가리기 위한 방패막이었을까?

오늘 스스로의 재능의 민낯이 드러났다고 생각한 이후로 계속해서 의기소침해 있었다.

애써 분노하고 투지를 불태우려 해도, 그때뿐.

금세 이런 모습을 보인다.

“네 녀석에게 정말 재능이 없었다면, 그 삼양귀원공으로 그 정도의 내공도 쌓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내 가르침을 따라오지도 못했을 거고.”

“…….”

하무백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녀석 재능이 있다. 너 자신을 못 믿겠으면, 내 안목을 믿어라.”

거기까지 말한 하무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들어가자.”

당진산은 하무백의 말을 곱씹으며 그 뒤를 따랐다.

맹룡숙에 도착했다.

하무백이 당진산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는 내공을 일으켰다.

“무슨…….”

당진산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따스한 기운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와 동기에 취기가 사라졌다.

“내일 죽었다고 생각하고 나와.”

하무백은 손을 흔들고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