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심법 때문이냐?
흑표를 잡은 지도 사흘이 흘렀다.
“이쪽이다.”
단목운뢰가 흔적을 발견하고 조용히 말했다. 방향을 확인하자 다섯은 넓게 흩어져 나무 사이를 움직였다.
움직이는 틈틈이 자신들의 흔적을 지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앞장서 움직이던 단목운뢰가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모두 멈췄다. 간단한 손짓.
그들끼리 정한 수신호였다.
그리고 펴지는 단목운뢰의 손가락.
셋.
둘.
하나.
동시에 한 곳을 향해 다섯 사람이 달려들었다.
챙!
넓게 쌓여 있던 나뭇잎 무더기에서 하무백이 튀어 올랐다.
다섯 사람은 즉각 삼재검진을 펼쳤다.
나무가 빽빽한 산길에서, 그에 맞게 변용해서 펼치는 검진.
고작 열흘 전에 배운 것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했다.
그렇게 얼마나 전투가 이어졌을까.
“큭.”
백리평이 신음을 흘리며 물러섰고, 그 틈을 이용해 하무백이 검진을 그대로 파훼했다.
“아깝다…….”
당진산이 정말 아쉽다는 얼굴로 주저앉아서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은 퀭했다. 눈 밑의 검은 그림자가 턱 끝에 닿을 듯했다.
다른 네 사람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칠 점.”
하무백의 짤막한 채점.
“오. 그래도 처음으로 칠 점이군요.”
당진산이 히죽 웃었다.
십 점 만점이라는 점수에서 처음으로 칠이라는 숫자를 들은 덕이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저녁거리 잡아다가 먹어라.”
그 말을 남긴 하무백의 신형이 사라졌다. 첫 날 자리를 잡은 곳으로 먼저 향한 것이다.
이제 다섯 사람은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사냥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좀 전에 화살을 먼저 쏘는 게 나았을까?”
계속해서 조금 전의 전투를 복기하던 단목운뢰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연하민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위치만 더 빨리 알려줬을 뿐일 거야.”
짤막한 대답.
그 말에 조금 더 고민하던 단목운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의견이 맞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긴, 아직 우리 궁술 실력으로는 무리였겠네.”
궁술 연습을 좀 더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단목운뢰가 몸을 일으켰다.
***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만 더욱 또렷해질 뿐이다.
흑표와의 싸움에서 처음 느꼈었다. 그 후 사흘 내내 그것을 느꼈다.
그것이, 지금 백리평을 잠 못 들게 만들고 있었다.
검을 뻗을 때의 이질감, 그 이질감으로 인해 검이 다른 조원들과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원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심법.’
종남의 심법으로 펼치는 삼재검법과 삼재검진이기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해결법 또한 간단하다.
삼재심공을 익히면 된다.
그 부분이 현재 백리평을 번뇌하게 만들고 있었다.
종남의 가르침이냐, 조원들과의 완벽한 합격이냐.
‘할아버지…….’
백리평은 이미 고인이 된 조부를 떠올렸다.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 은하검협(銀河劍俠) 백리단.
수많은 무림인의 존경을 받는 협객이었다. 지난 전쟁에서 늘 선봉에 섰고, 장렬한 죽음을 맞았던 이.
-평아. 종남의 긍지를 잊지 말거라.
할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다.
-평아. 기본이 가장 중요하단다. 기본에 충실하거라.
어린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실 때 항상 당부한 말씀이다.
태을심법(太乙心法), 사상검, 천성검법, 태을보.
이 네 가지가 백리평이 익힌 전부였다. 할아버지의 당부 때문이었다.
저 네 가지 무공이 극에 이르면 자연스레 다음 길이 열릴 것이라 하셨다.
때문에 사숙조이자 현 장문인인 주재승이 자신에게 더 이상 새로운 종남의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끔 금제를 가할 때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유유검객(幽幽劍客) 주재승.
전대 장문인인 백리단이 제대로 후계를 정하지 못하고 전장에서 유명을 달리하자, 즉각적으로 지지세력을 결집해 종남의 장문인 자리에 오른 자다.
장문인이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전대 장문인의 죽음과 전력의 붕괴를 핑계로 전쟁에서 발을 뺀 것이다.
‘긍지를 잊은 장문인.’
현 장문인 주재승에 대한 백리평의 평가였다.
그럼에도 백리평은 주재승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가 현 종남파의 장문인이었으니.
그래서 맹룡대에 가라는 말에 순순히 왔다.
종남에서 늘 조용히 지냈으나, 그 이유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주재승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이 조금씩 모였고, 그들이 바라보는 이는 백리평이었다.
전대 장문인 백리단의 손자이자, 그를 꼭 닮아 의협심이 가득한 제자.
주재승에게는 그게 위협이 된 게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질손(師姪孫)을 죽으라고 맹룡대에 보낸 것이다.
그런 만큼 백리평에게는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무백이 개죽음당할 뿐이라며, 집으로 가라고 할 때도 가지 못한 이유 역시 같았다.
어쨌든 장문인의 명이었으니.
맹룡대에서 복무 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당당히 돌아가야 했다.
그만큼 강해져야만 했고, 또한 이곳에서도 종남의 긍지를 지켜야 했다.
그것이 조부의 가르침이었으니까.
그래서 반드시 잠룡대 1조에게 설욕을 하고 싶었고, 또한 삼재공을 익힐 수가 없었다.
거기서 번뇌가 찾아온 것이다.
잠룡대 1조에게 설욕을 하기 위해서는 삼재검진이 더 완벽해지는 것이 좋았다. 그러자면 자신이 삼재공을 익혀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 종남의 긍지를 저버리게 된다.
‘긍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백리평은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하무백은 자신의 침상에 한가로이 몸을 눕혔다.
두 눈을 감고 기감을 주변으로 퍼트렸다. 그리고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감겼던 하무백의 두 눈이 슬며시 뜨였다.
“뭐지?”
하무백이 담담히 물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백리평이었다.
“뭐냐?”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하무백이 같은 물음을 던졌다.
“긍지란 무엇일까요?”
백리평의 물음.
너무도 답답했기에, 하무백을 찾아와 물었다.
명쾌한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떤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심정이었다.
“심법때문이냐?”
돌아온 물음에 백리평은 굳게 입술을 다물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재능이 있는 녀석이니, 흑표와의 싸움, 그리고 지난 사흘간의 대련에서 느낀 것이다.
다른 조원들이 삼재공과 삼재검법, 삼재검진에 익숙해질수록 그 자신이 미묘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흑표와의 싸움에는 그것 때문에 어쩌면 죽을 뻔했을지도 몰랐다. 운이 좋아 흑표의 어깨에 검이 박힌 것이지.
“종남파 출신에 백리 씨면, 은하검협. 그 영감님과는 어찌 되느냐?”
갑작스런 물음에 백리평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할아버지를 아십니까?”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그럴 거 같았다. 네 고지식한 모습이 딱 그 영감님 판박이니.”
백리평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하무백을 보았다.
그럴 수밖에.
조부는 전쟁이 한창일 때 전장에서 돌아가셨다. 저 교관과는 접점이 없는 것이다.
저 교관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잠깐…….’
교관은 항상 산월마림의 끔찍함을 이야기했다. 직접 겪었다는 듯이.
어쩌면.
“할아버지의 전우이신 겁니까?”
하무백은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래 그 고지식한 영감님은 너에게 긍지라는 것이 뭐라 하시더냐?”
대답 대신 돌아온 물음에 백리평은 까마득한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렸다.
그래, 분명 자신이 할아버지에게 종남의 긍지가 무엇인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뭐라 대답하셨던가?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지금껏 잊고 지냈었지만, 교관의 물음에 그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허허허. 평아. 종남의 긍지란, 종남이라는 이름 앞에서 당당한 것이란다. 종남은 의협과 정의 앞에 올곧게 서 있는 곳이다. 의협, 정의 그리고 스스로의 양심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 그게 곧 종남의 긍지란다. 아직 어린 너에게는 너무 어려운 말이지?
백리평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감은 두 눈. 그 상태로 백리평은 작은 깨달음을 얻어 한 꺼풀 껍질을 벗었다.
삼재심공.
타문파의 것을 훔쳐 배우는 것인가? 아니다.
종남의 뜻을 저버리고 배우는 것인가? 아니다.
종남의 무공을 익히는데 방해가 되는 것인가? 아니다.
악한 무공인가? 아니다.
악을 행하기 위해 배우는 것인가? 아니다.
그 어느 것도 종남의 긍지에 반하는 것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배우고, 익히되 종남의 긍지를 잊지 않으면 될 일이다.
종남의 긍지란 종남의 무공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삼재공을 배우고 싶습니다.”
눈을 뜬 백리평이 하무백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다.
“좋아.”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새벽이 찾아왔고, 칠 조의 네 명은 저마다 눈을 떴다.
피곤함이 가득한 눈이다.
일어나자마자 늘 심법을 수련하던 장소를 찾아온 그들은 흠칫 놀랐다.
백리평이 심법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응?”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단목운뢰였다.
“왜 그래?”
당진산의 물음.
“평의 분위기가 평소랑은 좀 다른 것 같아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법을 수련하는 것인데도, 어떤 심법이냐에 따라 주변에 풍기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지금까지 백리평은 종남파의 태을심법을 수련했기에 다른 네 사람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딘지 익숙한 분위기다.
단목운뢰의 말에 당진산이 백리평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네……. 설마…….”
“그래. 백리평도 삼재심법을 수련 중이다.”
그때 들려온 하무백의 목소리.
네 사람의 눈이 잘게 떨렸다. 설마 백리평이 삼재심법을 익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잠룡대 1조를 꼭 이기고 싶은 모양이더군. 그게 백리평 한 명의 노력으로 되지는 않겠지?”
그 물음에 네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심법에 빠져들었다.
심법 수련을 마친 백리평은 곧, 검법 수련에 들어갔다.
검을 쉬지 않고 휘둘렀다.
그의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호흡도 점점 거칠어졌다.
그럼에도 그의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갔다.
뻗어 나오는 속도도, 변화도 달랐다.
아직은 아주 작은 차이였지만, 백리평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삼재심법에 기반한 삼재검법은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핑.
화살이 날아갔다.
틱.
아슬아슬하게 목표를 놓쳤다.
목표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왔다.
화살을 쏜 백리평은 활을 빗겨 매고 방패와 검을 들고 마주 달렸다.
목표와 정면에서 충돌하기 직전.
좌우에서 검이 불쑥 튀어나왔다. 깊은 수풀에서 기척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검.
목표가 웅혼한 검격으로 두 검을 쳐내는 순간, 바닥에 낮게 몸을 숙인 백리평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목표의 턱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목표는 황급히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 순간 날아오는 두 발의 화살.
목표의 왼손에서 뿜어 나오는 진중한 장력이 화살을 쳐냈다.
좌우에서 목표를 찔렀던 당진산과 단목운뢰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채챙!
목표는 무너진 자세에서도 두 사람의 검을 쳐냈다. 공격을 했던 두 사람이 오히려 뒤로 휘청이며 물러났다.
그 틈을 백리평이 놓치지 않고 찔러 들어갔다.
챙.
역시나 목표의 검에 백리평의 검이 막혔다.
그 순간 백리평은 왼손의 방패로 목표의 얼굴을 노리고 후려쳤다.
순간적으로 가려진 목표의 시야.
그 즉시 단목운뢰와 당진산이 목표의 양 무릎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목표가 뒤로 주춤 물러설 때.
등 뒤를 노리고 연하민과 낙우진의 검이 날아왔다.
목표는 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웅혼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졌고, 그 기운에 다섯 사람은 모두 밀려났다.
그럼에도 소득은 있었다.
목표의 왼쪽 무릎에 공격을 성공한 것이다.
이걸로 목표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했다.
정말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다.
그리고 마침내 목표가 쓰러졌다.
대가는 있었다.
낙우진과 당진산 역시 쓰러졌으니.
“구 점.”
목표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섯 사람의 입에 은근한 미소가 걸렸다.
“장족의 발전이군.”
목표였던 하무백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슬아슬하게 목표치에 도달했다. 사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방패를 던진 임기응변도 좋았고, 방어만 담당하던 낙우진이 공격하는 변칙성도 좋았다. 진법의 운용이 한결 좋아졌어.”
흑표와의 싸움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하무백의 칭찬에 다섯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늘 내가 보여준 무위가, 아마 남궁지후의 무위에 근접할 거다. 내가 파악한 그의 무위보다 일 할 정도 강하게 실력을 조절했으니. 뭐, 무공은 다르겠지만. 최대한 남궁가의 창궁무애검에 비슷한 분위기로 내보려 했고.”
아무튼 저 교관은 저런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정말 별 거 아니라는 듯.
“그 결과가 두 명의 탈락이다.”
낙우진과 당진산이 아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하투제의 전체적인 전략을 결정해야 할 거다.”
오늘은 유월하고도 열아홉 번째 날이다.
하지까지 남은 날은 이틀.
하투제 이틀 전에 하무백이 전략을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