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시작한다
산속으로 들어오고 반 시진이 지났다.
이제 각 조들은 저마다 뿔뿔히 흩어져서 움직이고 있었다.
전투 개시 시간이 되면 각자 상대를 찾아 움직일 것이다.
“역시, 처음만 그런 거 같군. 이제 안 쫓아와. 제까짓 것들이 그러면 그렇지. 크크. 아니 이럴 거 애초에 왜 그런 거지?”
당추가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 순간부터 맹룡대 칠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산이 깊어짐에 따라 다른 곳으로 간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할 예정이지?”
청우자가 네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냥 적당히 움직이다가, 만나는 대로 쓰러트리면 되는 거 아닌가?”
당추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와룡대 일조는 신경을 써야 해.”
영호준이 방심을 경계하라는 듯 말했다.
와룡대 역시 가장 뛰어난 이들을 모아 일조를 구성했다.
신진팔문에서 교룡관에 입관한 이들 중 가장 뛰어난 다섯.
“뭐 그래도 우리랑은…….”
당추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남궁지후를 향해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모습이다.
남궁지후.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교룡관에 와 있을 인물이 아니었으니.
신진팔문에서 아무리 뛰어난 이가 교룡관으로 왔다 해도, 남궁지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정도 재능을 가진 이는 각자의 문파에 남아 본파의 비전을 익히고 있을 테니.
“그럼 이곳에서 적당히 기다릴까? 아니면 더 들어갈까?”
청우자의 물음에 사람들의 시선은 남궁지후에게로 향했다.
“천천히 조금만 더 들어가도록 하지.”
남궁지후의 말에 다들 산책 나온 듯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
묵해진은 철기방(鐵騎幇) 출신의 사 년 차 생도 담당 교관이다.
이번 하투제의 판정관으로 차출이 되어, 맹룡대에서 유일하게 참가한 칠조의 담당으로 배정되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따라 움직였으나, 함께 움직일수록 그는 어이가 없었다.
이놈들은 달랐다.
맹룡대라 우습게 봤는데, 철저히 준비하고 온 모습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 녀석들. 정말로 전쟁을 하려고 하고 있다.’
자연스레 묵해진의 시선은 하무백에게로 향했다.
이들을 이리 가르친 것은 당연히 담당 교관일 테니까.
묵해진은 지난 전쟁의 끝자락에 참전했었다. 고작 1년 정도 전장에 구른 것이지만, 그동안 적지 않은 경험을 했다.
그중에는 당연히 하투제와 같은 유격전도 있었다.
철기방은 철갑기마대라는 병단을 운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방파였다. 철갑기마대가 쓸고 간 자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지난 전쟁에서도 철갑기마대는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묵해진은 그런 철갑기마대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모든 전장이 기마대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산악유격전도 있었다.
끔찍했던 경험이다.
수많은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정천맹 호천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철갑기마대의 절반이 사라졌을 지도 몰랐다.
이들은 목란산에 어느 정도 진입한 후 움직임을 멈췄다. 그때까지는 줄곧 잠룡대 일조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조심스레 움직임을 재개했다.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철저히 상대가 남긴 흔적을 추적했고, 자신들의 흔적은 지웠다. 심지어 뒤로 처진 한 명은 판정관인 자신의 흔적까지 지우고 있었다.
‘한참 전에 먼저 목란산으로 떠나서 훈련한다고 하더니.’
설마 이런 훈련을 했을 줄이야.
지금까지 하투제를 이렇게 준비한 이들은 없었다.
대체 이들은 무슨 생각인 걸까?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선두에 선 이가 몇 가지 수신호를 하자 이들은 다섯 갈래로 흩어졌다.
그러자 묵해진은 난감해졌다.
이들 중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수신호를 했던 이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지시를 하는 이를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든, 어떤 변화가 있든 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의 곁에는 하무백이 함께 움직였다.
자신은 절대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삐이익!
그때 전투 개시 시간이 되었다는 호각 소리가 목란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이들의 움직임은 더욱 은밀해졌다.
속도도 느려졌지만 상관없었다.
이들은 철저히 잠룡대 일조가 남긴 흔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멍청한.’
그 흔적은 묵해진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마친 산속으로 산책이라도 나온 마냥 너무도 적나라하게 찍혀있는 족적들 때문이다.
한 명의 족적만 희미했을 뿐, 다른 넷은 선명했다.
***
백리평은 족적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족적이 아마도 남궁지후일 것이다. 그의 경지가 저런 족적을 남겼을 터.
역시나 남궁지후가 가장 앞장서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간 방향과 주변 지형을 살폈다.
이곳의 지리는 샅샅이 알고 있었다.
정말 많은 곳을 누비고 다닌 덕이다.
백리평이 수신호를 보냈고, 서로에게 전달이 됐다.
다섯 사람은 각자의 방향에 맞춰서 샛길로 접어들었다. 길이 아닌 곳도 있었다.
잠룡대 일조를 질러가서 미리 매복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매복을 하기 좋은 장소 역시 이들의 머릿속에 있었다.
빠르게 그곳에 도착한 칠조는 각자의 자리에 몸을 숨겼다.
호흡이 느려졌다.
호흡을 거의 정지시키다시피 한다는 귀식대법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이들 수준에서는 기척을 숨기는 데는 충분했다.
그렇게 다섯 사람은 산속에 녹아들었다.
“쩝. 호각이 울렸는데, 마주치는 이들이 아무도 없군.”
잠시 후 당추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산속에 울렸다.
칠조의 예상대로 잠룡대 일조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모두 멈춰.”
남궁지후의 나직한 목소리.
“왜 그래?”
갑자기 심각해진 동생의 얼굴에 남궁지유가 물었다.
“매복이 있어.”
남궁지후는 나직히 대답하고 주변을 살폈다.
다른 네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의 기감에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하민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충분할 것이라 여겼는데, 남궁지후의 기감은 자신의 예상보다 뛰어났다.
그래도 미리 짠 계책대로 움직여야 했다. 모든 것이 계략대로 딱 들어맞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남궁지후가 자신들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한 것이다.
예상보다 빨랐지만, 이제 움직여야 했다.
‘시작한다.’
연하민의 손짓.
어느새 활에 화살을 잰 다섯 생도.
피잉.
다섯 곳에서 동시에 다섯 사람을 노리고 화살이 날아갔다.
“쳇.”
다섯 사람은 검으로 화살을 쳐냈다.
남궁지후의 말대로 매복이 있었다. 헌데 매복한 이들의 정체 때문에 잠룡대 일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혀 다른 다섯 방향에서 날아온 화살.
활과 화살을 가지고 온 이들은 딱 하나였다.
맹룡대 칠조.
설마 자신들이 맹룡대의 기척도 느끼지 못할 줄이야. 굴욕적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묵사발을 내주마!”
분노에 찬 외침을 터트리며 가장 먼저 달려 나간 이는 당추였다.
화살이 날아왔다는 것, 그리고 그 전에 맹룡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이성을 잃고 흥분한 상태였다.
당추는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주마.’
당추는 자신이 달려가는 방향에 당진산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
“먼저 우리가 활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잠룡대 일 조에게 보여주고 확실히 인식시켜야 해. 다른 조들은 활을 가지고 오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입을 연 연하민은 쉬지 않고 자신의 계책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맹룡대에 들어온 후 이토록 많은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전부 타당한 말이었기에 다른 네 사람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야말로 지낭(智囊)이라 할만한 모습이었다.
“그런 지형이 흔하지는 않을 텐데?”
길게 이어지는 연하민의 말을 과묵하게 듣기만 하던 낙우진이 핵심을 집는 질문을 던졌다.
“다행히 초입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런 지형이 한 곳 있어. 특히 작은 공터는 남궁지후가 창궁무애검을 펼치기 애매한 크기야. 제대로 펼치기에는 방해가 되는 나무들이 제법 있고, 그렇다고 펼치지 않기에는 아쉬운 애매한 크기지. 저들 성격상 아마 초입에서부터 곧장 길을 따라 앞으로만 갈 거야. 적당한 위치에서 화살로 도발을 해서 그쪽으로 유인을 해야지.”
이미 위치까지 생각했다는 듯, 연하민은 막힘없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당진산은 연하민의 전술을 떠올리며 열심히 달렸다. 당추는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었다.
계획대로 도망치는 와중에 간간이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은근히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
당추가 더욱 흥분해서 쫓아올 수 있도록.
“당진산!!!”
과연 흥분한 당추는 이 깊숙한 산에서 들으라는 듯, 저리 큰 외침을 터트리며 쫓아오고 있었다.
멀리 메아리치며 자신의 이름이 퍼져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평지였다면, 이렇게 당추를 유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전에 잡혔을 터.
하지만 이 산속은 다르다. 길도 제대로 없는 지형에 당진산은 제법 익숙해져 있었고, 이미 가야 할 경로도 머릿속에 선명했다.
나무로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움직여야 하는 곳에서 당추가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진산은 힘차게 땅을 박차며 움직였다. 연하민이 세운 계책대로 자신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히도록 신경을 쓰면서.
***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홀로 튀어 나가 버린 당추.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궁지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당가에서 지내는 동안 당진산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감정을 이곳에까지 가지고 오는 것은 좋게 봐줄 수는 없었다.
담룡각에서도 그랬지만.
지금은 하투제 중이다.
이런 곳에서 본인의 감정에 치우쳐 저런 개인행동이라니.
당진산이 소속되었다는 것만으로 맹룡대 칠조를 싫어하는 그의 감정은 알 바 아니었지만, 이렇게 주변에 폐를 끼치면 문제는 달라진다.
“지후야. 인상 풀어. 어차피 맹룡대 칠 조잖아.”
한 살 어린 동생의 심정을 짐작했음인가. 남궁지유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남궁지후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네 사람은 저들의 기척을 놓치지 않았던가.
만약 산속 깊은 곳까지 쫓아갔다가 저들의 기척을 놓쳐버리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그런데 어차피 맹룡대 칠 조라니.
상대를 너무 우습게 보고 있었다. 조금 전 기척을 놓친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우리도 각자 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영호준이 네 곳의 방향을 돌아보며 말했다. 더 지체했다가는 다시 기습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별거 아닌 기습이었지만.
남궁지후가 다시 한번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의 수준조차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조원들의 모습이 답답했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내가 다 정리하면 될 일…….’
남궁지후는 스스로의 강함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조원은 놓쳤지만, 자신은 분명 그들의 기척과 호흡을 느끼지 않았던가.
네 사람이 당한들 자신이 맹룡대 칠조 전부를 처리하면 그뿐이다.
그 후 홀로 하투제를 치러야 하겠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이런 요식행위가 같은 규칙들이 귀찮을 뿐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남궁지후가 그들의 기척과 호흡은 느꼈지만, 정확한 위치는 미처 특정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