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해볼 만하다
남궁지후의 시선이 판정관에게로 향했다.
“이럴 경우는 제압해서 판정관님께 데려오면 되는 것이었던가요?”
선의곡 출신의 와룡대 교관 비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다만 손속에는 사정을 두도록 해요.”
그녀 역시 활을 쏜 이들이 맹룡대임을 알았기에 하는 당부였다.
목란산 초입에서 활을 빗겨 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절로 끌었으니.
“그럼 이 각(약 30분) 안에 다시 이곳으로 오는 걸로 하지.”
판정관의 확인에 남궁지후가 다른 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알았어.”
영호준이 가장 먼저 한쪽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뒤이어 청우자도 몸을 날렸다.
“판정관님은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그럴 수는 없죠. 저는 남궁소저와 함께 움직일 거예요.”
같은 여성인 때문인지, 비가영은 남궁지유를 바라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남궁지후도 한쪽으로 몸을 날렸다.
남궁지유는 자신이 쳐낸 화살을 집어 들었다. 희미하지만 은은한 방향(芳香)이 느껴졌다.
누가 쐈는지 짐작이 가는 화살이다.
남궁지유도 자신을 향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추적을 시작한 지 일 각이 흘렀다.
이 각 안에 다시 모이기로 했건만, 그건 불가능할 듯했다.
아직 상대의 뒷모습도 보지 못했으니.
영호준은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산속에서 이렇게 재빠르게 움직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너무 우습게 봤나.”
씁쓸한 웃음을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영호준은 상대를 놓치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다는 거겠지?”
바닥에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은,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절박하게 달리고 있는지 알려줬다.
덕분에 추적하기는 편했다.
다른 세 사람도 영호준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상해.’
남궁지유는 발자국을 쫓아가면서도 석연치 않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들도 내공을 익혔을 것이고, 간단하게나마 경공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전력으로 달린다면, 경공을 펼쳐야 할 텐데 그런 것 치고는 발자국이 너무 선명했다.
경공을 빠르게 펼칠수록 몸이 가벼워져 발자국이 희미해지는 것이 정상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들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해도, 이건 그 정도를 넘어섰다.
“마치 일부러 보여주려고 선명하게 딛은 듯…….”
작게 중얼거리던 남궁지유는 말을 멈추고 흠칫 놀랐다.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었으나, 그 안에 무언가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녀는 추적을 멈췄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발자국에만 이끌려 깊은 산속으로 이끌려 들어왔다.
추적하는 중간 중간 날아오던 화살에 그만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쫓기만 한 탓이다.
그 화살도 언젠가부터 날아오지 않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비가영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런 남궁지유를 지켜보고 있었다.
***
어느 정도 당추를 달고 움직이던 당진산은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멀찍이 당추를 따돌릴 만큼 빠른 속도였다.
바닥에 발자국을 콱콱 찍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당진산은 어느 순간부터 흔적을 지우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당진산이 남긴 발자국은 어느 지점을 끝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동하는 당진산은 화살을 쏘기 전 미리 약속한 장소를 향해 조심스레 움직였다.
모든 것은 연하민이 짠 계책대로의 움직임이었다.
첫 시작이 조금 어긋났지만, 그 이후로는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
“우리가 각자 흩어져서 움직인다면 아마 자신을 노린 화살이 날아온 곳을 향해 추적할 거야. 특별할 것 없는 반사적인 행동으로. 백리평. 네가 남궁지후를 달고 움직여야 해. 너는 남궁지후가 딴 생각하지 못하게 우리 수준에 맞는 흔적을 조금씩 남기며 최대한 빠르게 목표지점으로 움직여. 흔적이 너무 선명하면, 그라면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백리평은 판정관을 달고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판정관이 누구를 쫓아가느냐는 전적으로 그의 의사였다.
화살을 쏘기 전, 연하민의 부탁으로 묵해진은 백리평과 움직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리평의 역할이 남궁지후를 유인해서 목적한 장소로 끌고 가는 것이다. 즉, 흔적을 지우고 이동할 일이 없었기에 판정관이 함께 움직여도 딱히 신경 쓸 것이 없었다.
남궁지후가 판정관의 흔적을 보고 따라와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다른 네 사람은 달랐다.
한쪽으로 유인한 흔적으로 그들을 산속 깊은 곳에 따로따로 떨어트려 놔야 했으니, 혹여라도 판정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면 곤란했다.
이 계략을 펼치는 동안은 판정관의 흔적을 지울 여유는 없으니.
애초에 흔적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백리평에게 판정관을 붙인 것이다.
묵해진은 재미있었다.
사실 누구와 함께 움직여 달라는 부탁 따위 들어주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 애송이들의 움직임이 너무나 본격적이었다.
가만히 보아하니 이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각개격파.
깊은 산속에 잠룡대 다섯을 흩어놓고는 하나하나 부술 생각인 것이다.
그 첫 번째 목표가 남궁지후.
묵해진이 생각하기에는 얼토당토 않는 목표다.
이들의 수준으로 남궁지후라니. 어림없는 일이다. 암.
그런데 이 녀석들의 행동을 보니, 또 무언가 있을 듯했다.
그랬기에 흔쾌히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
“잠룡대 일조에서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인물은 남궁지후야. 그건 어쩔 수가 없어. 다른 이들을 상대할 때 남궁지후가 난입하면 그 순간 그 판은 끝이니까. 우리가 복수에 성공하려면 무조건 가장 먼저 남궁지후를 잡아야 해. 만약 그걸 성공한다면, 복수의 구 할은 완성된 거나 다름없어.”
백리평은 연하민의 말을 곱씹으며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그곳이 나타난다.
남궁지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이 각이 지났다.
설마 자신이 이 각 동안 상대를 잡지 못할 줄이야.
족적을 봐서는 제법 경공을 펼칠 줄 아는 자였다. 거기에 더해 이런 산속 길에 상당히 익숙한 듯했다.
그 탓이었다.
거리를 점점 좁히고 있지만, 이 각이 지나도록 제대로 꽁무니를 잡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상태면 반의 반 각이면 상대의 등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남은 흔적을 추적해 달리던 찰나.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이런 산속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정면에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백리평이었던가?”
대강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얼굴도 알고 있었고.
종남의 제자였지만, 맹룡대에 들어간 이.
아마도 장문인의 명이었다고 했던가.
저 친구도 자신 같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듯했다.
남궁지후는 피식 웃었다.
말 못할 사연은 무슨.
남궁지후 자신도 자신의 사연은 몰랐다. 왜 잠룡대에 와야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주의 명이기에 따랐을 뿐.
저 친구는 어떨까? 적어도 자신의 사연 정도는 알고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상대를 쓰러트리고 어서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야 했다.
너무 깊숙이 끌려 왔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남궁지후는 정면을 다시 한번 살폈다.
검과 방패를 든 채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리평.
조금 떨어진 곳에 판정관으로 보이는 교관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판정관이 보고 있다면 좀 더 빨리 무력화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가 승복하지 않고 계속 덤비는 경우는 없을 것이니.
그리고 그 곁에 교관이 한 명 더 있었다.
‘맹룡대의 교관인가? 유난이군.’
하무백의 모습을 본 남궁지후가 그리 생각했다.
규칙상 담당 교관이 함께 움직일 수는 있었다. 다만, 그렇게 움직이는 교관이 거의 없다시피, 아니 전무했다.
그런데 저리 당당히 함께 움직이다니.
실소가 흘러나오려 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어서 저 친구를 무력화 시키고, 본래 있던 장소로 돌아가야 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남궁지후의 가슴 한쪽을 자극했다.
“항복할 생각은 없나?”
남궁지후가 백리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대를 향한 마지막 배려였다.
“당연히 없어.”
백리평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하고는 검과 방패를 치켜들었다.
‘삼재검법에, 제갈 교관의 방패술을 섞은 건가?’
보는 순간 알았다.
그깟 맹룡대가 수련하는 방패술이었지만, 제갈가의 천재가 창안했다는 말에 호기심으로 한 번 본적이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럼, 간단히 끝내주지.”
남궁지후가 가검을 뽑아 들고는 창궁무애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무거운 기세가 피어나와 주변을 잠식해 들어갔다.
백리평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예상은 한 일이지만, 막상 자신 또래의 무인이 저런 기도를 보이니 절로 긴장이 되었다.
사문에서 사숙들이나 보이던 기도였기에.
정녕 눈앞의 상대는 괴물이었다.
그런 백리평의 모습에 하무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놀라운 기도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자신은 저보다 더 강한 기세로 칠조 다섯을 상대하지 않았던가.
경험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건만 저런 모습을 보이니 답답한 것이다.
‘나름의 첫 실전이라는 건가…….’
하무백은 애써 그리 생각하며 속을 삭혔다.
머리를 털고 정신을 수습한 백리평은 천천히 움직였다. 공터의 중심을 두고 빙그르르 도는 모습이다.
그렇게 제법 우거진 숲을 등졌다.
백리평은 그곳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검과 방패를 움켜쥔 채 남궁지후를 노려보았다.
“먼저 들어오는 게 어때? 그렇지 않으면 공격할 기회도 없을 텐데.”
남궁지후 나름의 배려였다.
그래도 하투제인데,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제압당하면 얼마나 아쉬울까.
그런 생각에서였다.
“…….”
백리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남궁지후를 응시했다. 그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뭐, 그럼 내가 가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순식간에 백리평을 향해 돌진한 그의 검이 백리평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쾅!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백리평이 방패를 들어 남궁지후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검에 실린 힘에 백리평은 비틀거리며 두 걸음 정도 움직였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이 빛났다.
‘약하다.’
부딪혀서 당해보니 알 것 같았다.
검격에 실린 힘이 하 교관의 그것에 비하면 이 할쯤 약했다. 이 정도면 백리평 혼자서도 감당할 만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해볼 만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 강한 적을 상대한 경험이 있으니까.
하무백은 그런 백리평의 변화를 단 번에 알아보고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꼬리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백리평이 자신의 검격을 막아내자 남궁지후의 눈에 작은 이채가 어렸다.
그러나 곧 그는 이격을 위해 검을 움직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의 나무가 문제였다.
창궁무애검의 검격을 펼치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깟 나뭇가지 정도야 무시하고 잘라버리면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검의 경로에 미세한 오차가 생긴다.
완벽주의자적 성격을 가진 남궁지후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검의 움직임이 작아졌고, 백리평은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삼재검법과 방패술의 혼용.
웅혼하게 자신을 덮치려는 남궁지후의 검을 백리평은 용케도 막아내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때로는 머리를, 때로는 다리를, 어쩔 때는 가슴을 노리는 치명적인 일격들이었으나, 그 어느 것도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덕분에 남궁지후의 눈살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아무리 종남의 제자라지만, 설마 자신의 검을 이만큼이나 막아낼 줄이야.
그것도 종남의 검이 아닌, 고작 삼재검법과 방패술로 말이다.
‘안 되겠군.’
그제야 남궁지후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완벽한 검법도 중요했지만, 일단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약속한 시간에서 이미 한참 지났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발목이 잡혔으면, 다른 이들은 더 안 좋은 상황이리라.
그들은 저들의 기척도 놓치지 않았던가.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모두 부순다.’
웅혼한 검의 기운에 패도적인 기운마저 실렸다.
그때부터였다.
사방으로 잘린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비산했다.
그리고 백리평이 점차 수세에 몰렸다.
‘크윽.’
지금 남궁지후의 검격의 위력은 하무백의 그것에 비해 일 할? 아니 오 푼 정도 부족했다.
이 정도라면, 백리평 혼자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백리평은 남궁지후가 몰아붙이는 대로 움직였다. 점점 공터의 중앙을 향해서였다.
남궁지후는 자신이 전력을 다하기에 최대한 편한 장소로 백리평을 밀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완벽한 검을 펼치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웠지만, 상대를 이렇게 압도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남궁지후는 흠칫했다.
‘고작 맹룡대의 생도 하나를 압도하는 것에 만족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다. 남궁지후의 얼굴이 급격히 딱딱하게 굳었다.
그 찰나.
쒜엑~!
두 발의 화살이 남궁지후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