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가능하겠소?
‘젠장. 젠장. 젠장. 젠장…….’
팽도율은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는, 속으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욕설을 눈앞의 상대에게 퍼붓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교룡관 최고, 최악의 폭탄이 아침 댓바람부터 묘령의 여인을 데리고 자신을 찾아왔으니 말이다.
“란아 인사드리거라. 이곳 교룡관의 관주님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관주님. 소녀 하설란이라 합니다. 부디 어여삐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팽도율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초인적인 힘으로 붙들고 미소를 유지했다.
이름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피붙이다.’
저 괴물 놈이 따뜻하면서도 한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렇고, 일단 같은 ‘하’씨다.
‘여동생이겠지. 분명.’
덕분에 팽도율은 아무런 소개가 없어도 하설란의 정체를 쉬이 알 수 있었다.
‘허, 저 괴물에게 저런 여동생이 있었다라…….’
다른 한 편으로는 놀랍기도 했다.
아무도 그에게 저리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
“허허. 반갑네. 하 교관에게 이리 아름다운 누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군. 그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후반기 맹룡대 추가 인원 모집에 이 아이가 지원할 겁니다.”
평소와는 달리 아주 예의 바른 말투였다. 물론 여동생 앞인 탓이겠지.
다만 팽도율은 그런 하무백의 태도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던진 말이 지금 그의 머리를 쪼갤 듯한 고통을 주고 있는 탓이다.
한설빙에 팽군호, 거기에 주우명까지.
지금 온갖 폭탄들이 몰려온 게 불과 어제다. 그런데, 오늘 이른 아침부터 이런 대형 폭탄? 아니, 이건 폭탄이 아니라 재난 수준이다.
팽군호, 맹룡대, 그리고 눈앞의 하설란의 미모가 조합이 되자…….
‘어쩌면 초대형 재난이 덮칠지도…….’
온몸이 오싹해졌다.
팽군호 이 개자식이 혹시라도 하설란의 미모에 혹해서 미친 짓이라도 벌였다가는, 어쩌면 저 괴물과 팽가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아. 아버지… 형님… 어쩌자고 그 개자식을 이곳에 보내셔서는…….’
눈앞의 하무백이 아닌, 가문의 아버지와 형을 향해 원망을 보냈다. 아무래도 그들이 좀 더 만만했다.
아주 미묘하게 변하고 있는 팽도율의 표정을 읽은 하무백이 물었다.
“관주님. 혹여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무척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눈빛은 살벌했다.
“하하. 별거 아니네. 어제도 손님이 좀 잦았던 터라…….”
거기까지 말한 팽도율이 우뚝 말을 멈췄다.
한설빙이라는 이름에 생각이 멈췄고, 지나가듯 풍월인 듯 들었던 소문이 떠오른 덕이다.
그 소문이 어제가 아닌 왜 이제야 떠올랐을까.
“혹시 맹룡대에 새 교관이 발령 받은 것은 알고 있는가?”
“어제 늦은 저녁에야 무창에 들어왔고, 오늘 아침에 곧장 오는 길입니다. 알 리가 없죠.”
한설빙이 맹룡대를 강력하게 원했기에 그리로 배정될 예정이었지만, 팽도율은 이 순간 배정을 확정으로 바꿨다.
전반기에 대략 스무 명의 인원이 맹룡대를 그만뒀다. 네 개 조가 빈 것이다. 그리고 그만둔 교관도 둘.
후반기에 이들에 대한 충원이 이루어질 터. 새로운 교관이 온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구태여 그런 이야기를 왜 자신에게 하느냐는 눈빛을 팽도율에게 던지는 하무백이다.
“그, 한설빙 부단주가 새로이 맹룡대 교관으로 발령받았다네.”
그러나 팽도율의 말이 이어진 순간.
하무백의 얼굴은 팍 일그러졌다. 그리고 굉장히 곤혹스러워하는 표정.
‘그냥 헛소문인지 알았는데, 어느 정도 사실이 있었나 보군.’
그런 하무백의 변화에서 팽도율은 그런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때.
“허…….”
하무백이 어이없다는 듯한 한숨을 흘렸고, 그와 동시에 관주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팽도율은 깜짝 놀랐다.
나름 절정고수 중에서도 상승의 반열에 들었다고 자부하는 자신이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한 탓이다.
“단주님!!”
반가움과 섭섭함, 분노가 뒤섞인 외침을 터트리며 들어온 한설빙이다.
‘호천단은 호천단이라는 건가…….’
하무백에 대해서야 잘 알고 있었지만, 부단주였던 한설빙이 작정하고 달려오니 지근거리에서조차 팽도율 자신이 기척을 놓쳤다.
그런 이가 고작 맹룡대의 교관을 자처하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여기선 단주가 아니다. 그리고 관주님 집무실 문을 그리 벌컥 열어젖히다니,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냐.”
차가운 목소리가 하무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내가 온 건 또 어찌 알고?”
그 물음에는 한설빙이 싱긋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모아 동그랗게 만들었다.
“이거면 어지간한 건 다되죠.”
“저기에?”
하무백이 가리킨 쪽은 집무실 문밖에 자리 잡은 팽도율의 수행위사이었다.
“단주님 이곳에 오시는 게 뭐 대단한 일은 아니잖아요? 저한테나 중요한 거지.”
한설빙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관주 집무실 방문자 목록도 나름 기밀 아닙니까?”
하무백이 팽도율을 향해 물었다.
“기밀이지. 급수는 좀 낮네만. 아무래도 잠시 후에 밖에 있는 친구랑 대화를 좀 나눠봐야겠군.”
“이거 규율 위반으로 저 친구 날릴 수는 없을까요?”
하무백은 손가락으로 한설빙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주님!”
그 말에 한설빙이 소리를 빽 질렀다.
“씁. 관주님 앞이라니까.”
하무백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한설빙은 살짝 찔끔하는 듯했으나, 그래도 하무백을 마주 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징계는 가능하네만, 정직이나 감봉 정도일세. 자네가 원하는 것처럼 날릴 수는 없을 것 같네만.”
“아쉽군요.”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될 것 같고. 아무래도 한 교관이 담당교관이 될 것 같거든.”
“네?”
“뭐가요?”
하무백과 한설빙의 고개도 동시에 팽도율을 향해 획 돌아갔다.
“하 교관. 자네도 알지 않은가? 자네 조는 이미 꽉 차 있다는 걸. 그렇다면 다른 교관에게 맡겨야 할 텐데. 한 교관이 가장 믿음직스럽지 않겠나?”
그 말에 하무백은 복잡한 표정으로 한설빙을 바라보았다.
“뭔데요? 도대체?”
한설빙이 답답하다는 듯, 하무백을 향해 물었다.
“흐음.”
팽도율의 말이 맞기는 했다. 하설란을 조원으로 맡기기에는, 저 녀석이 제일 믿음직했다.
하무백에게서 대답이 없자,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던 한설빙의 시야에 그제야, 하설란이 들어왔다.
“어, 여기 이 아름다운 소저는 혹시 누구신지…….”
그리 묻는 한설빙의 목소리에는 살짝 경계심이 스며있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오라버니의 동생 하설란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몰아친 상황에 얼이 빠져 있던 하설란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한설빙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동생? 단주님의?”
그리 말하는 한설빙의 두 눈이 반달처럼 휘며 웃음을 지었다. 목소리도 따스하게 변했다.
“아하. 단주님 동생분이 맹룡대에 들어오려는 거구나. 그럼 당연히 제가 맡아야죠.”
한설빙이 하무백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끄응.”
맡기자니 불안하고, 그렇다고 맡기지 않자니 그것도 또 불안했다.
“이왕 이렇게 한 교관이 찾아온 거, 다른 생도들도 알려주지. 팽군호라고, 팽가 가주의 장손일세. 아주 개차반인 녀석이지.”
한설빙과 하무백을 보는 순간 문득 즉흥적으로 떠오른 묘안이었다.
이 빌어먹을 녀석이 언제 재난을 건드릴지 알 수 없으니, 아예 가까운 곳에 두고 눈앞에 두는 게 낫겠다고.
한설빙, 그녀 정도의 강단과 실력이라면, 팽군호 쯤이야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리라.
“잠깐만요. 교관님. 그런 개차반인 녀석을…….”
“한 교관이 충분히 감당할 걸세. 그런 녀석은 오히려 직접 눈앞에 두는 게 나을 수도 있지.”
팽도율의 대답에 불만을 이야기하려던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안전장치도 있었고.
“그런데 팽가주님의 장손이라 하면, 관주님과는…….”
“내 조카일세. 아주 빌어먹을 놈이지.”
타인 앞에서, 혈육에 대해 저리 이야기할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엉망진창인 녀석이라는 걸까.
하무백은 결국 한설빙에게 하설란을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주우명 공자일세.”
좀 전과는 전혀 다른 호칭.
“무연진인 어르신의 속가제자이네.”
이어진 말에 하무백과 한설빙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 태도다. 배분상 그와 동배였으니.
“무연진인이라…….”
하무백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당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이였다.
언제던가. 상당히 재능이 뛰어난 아이를 들였다고 기껍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었다.
“한 교관, 자네라면 그런 배분은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네.”
“그렇긴 하죠.”
그녀의 출신은 신진팔문 중 한 곳인 빙천궁. 신진팔문으로 묶여 있기는 하나, 정확히 따지면 빙청궁은 새외(塞外) 문파였다.
그래서 중원 문파들의 배분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았지만. 존중은 하되, 적정한 선만 지키는 그 정도였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배분보다는 직위가 우선이었다.
한설빙은 교관이고, 주우명은 생도다.
그게 전부였다.
“그럼 나머지 두 사람은요?”
“글쎄. 충원되는 인원에 따라 채워질 수도, 안 채워질 수도 있네.”
“네? 왜요?”
“자네가 맡을 조가 20조거든. 맹룡대의 마지막 조.”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무백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십 조의 연무장은 칠 조의 연무장 바로 옆이었다.
하무백이 팽도율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의도를 알겠다는 눈빛이었다.
팽도율은 웃음으로 그 눈빛을 마주했다. 뭐 어떠냐는 웃음.
어차피 여동생을 가까이 둘 수 있으니 좋지 않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다.
그렇게 팽도율에게 닥칠 마지막 태풍이 지나갔다.
***
교룡관은 무척 큰 기관이다.
그 거대한 크기만큼,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역할의 사람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일하고 있다.
또한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일을 관두기도 하고 새로이 시작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항시 일손이 부족한 편인 곳이 교룡관이다.
그래서 잡일꾼의 경우는 항시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잡일꾼은 교룡관에서도 최하층의 일꾼들이다. 그러니만큼 일이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생도들 때문에 힘들어 그만두는 이들이 많았다.
잠룡대와 와룡대는 말할 것도 없고, 맹룡대의 생도들 역시 잡일꾼을 상대로는 묘한 우월의식으로 그들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런 잡일꾼을 뽑는 곳에 하무백의 사부, 위지군이 찾아갔다.
“무슨 일로 오셨소?”
“일꾼을 뽑는다고 해서 왔소이다.”
교룡관 서문 옆에 마련된 작은 모옥. 이곳이 교룡관의 잡일꾼을 뽑는 사무실이었다.
담당 직원이 묘한 눈으로 위지군을 살폈다.
늙은이다. 분명 늙은이다.
그런데 노인은 안 뽑는다고 당장 쫓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기골이 장대했다. 딱 붙은 옷을 입은 덕에 그 모습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똑바로 펴진 허리에 떡 벌어진 어깨, 거기에 옷을 팽팽하게 채운 것으로 보이는 근육까지.
인상은 흰수염에 청수한 것이, 영락없이 글선생 같은 얼굴인데…….
몸은 달랐다.
이 정도라면 능히 일을 해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 상당히 힘들 텐데 가능하겠소?”
싱긋.
위지군은 그저 그렇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