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43화 (43/312)

43화. 저 놈 때문이야

시간은 빨랐다.

지난 한 달.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평화로운 나날이 하루하루 반복된 것이다.

물론 수련하는 생도의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었다.

오늘도 칠 조의 조원들은 입 안에 단내가 나도록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귀한 약을 먹은 만큼 약값을 해야 한다는 하무백의 생각 때문이었다.

정말 욕 나올 정도의 수련이었고, 입에서는 욕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다섯 생도의 눈에는 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들이 바라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욕 나올 정도로 힘든 수련.

저마다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이들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계를 초월한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으니.

그런 그들이 전반기에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당추와의 일이 없었다면, 하투제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계속 그리 방치되었을 터.

“헉헉헉. 어찌 보면… 당추 그놈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오늘의 수련을 마치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당진산이 땅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말에 다른 생도들이 갑자기 웬 헛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힘든 수련 잘 버텨 놓고 드디어 미친 건가. 그런 생각을 연하민은 아주 잠깐 했었다.

“아니. 우리 교관님이 그나마 좀 진심으로 우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게 그놈이랑 엮인 다음인 거 같아서…….”

“그러고 보니…….”

단목운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놈은 지금 뭐하지?”

늘 과묵하던 낙우진이 뜬금없이 물었다.

“몰라. 하투제 끝나고 본가로 간 뒤로 소식이 없네.”

당진산의 대답이다.

“그놈 어찌 되는지는 이제 내 알 바도 아니고.”

그 말대로다. 당진산은 지난 하투제에서 당추에게 쌓인 모든 것을 털어 버렸으니까.

“뜬금없이 왜 그러는 거야?”

단목운뢰가 낙우진에게 물었다.

“몰라. 그냥 그 재수 없는 면상 떠오르니까. 좀 더 괴롭게 지내고 있으면 해서 물어봤어.”

낙우진의 대답에 단목운뢰와 연하민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당추.

참 재수 없는 놈이었다.

이제 보지 않아서 좋았고.

그때 저벅거리면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느릿느릿하면서도 거만함이 가득한 걸음 소리다. 이제는 그냥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 당추 놈이 더 괴롭게 지내길 바란 이유를 알겠다. 저놈 때문이야.”

낙우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속삭이는 것보다 조금 큰 목소리였으나, 나머지 넷은 모두 알아들었다.

잠시 후.

“흐음. 여전히 팔자 좋은 조로군. 오늘도 이렇게들 널브러져 있으니.”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연무장 가장자리에 서서 칠 조 생도 다섯을 내려다보는 인물.

팽군호였다.

연무장이 바로 곁이다 보니, 수련이 끝날 시간이면 이렇게 찾아와 이죽거린다.

이십 조의 다른 두 사람은 지금도 열심히 수련 중일 텐데, 저놈은 교관만 사라지면 이곳으로 온다. 마치 칠 조 조원이라도 되는 양.

이유야 뻔하다.

같은 조의 주우명 때문이다.

팽군호가 아무리 팽가주의 손자라 하나, 주우명에게는 배경에서 밀린다. 팽가 내에서 팽가주의 손자라는 신분과 배경으로 안하무인으로 지내던 놈이니, 자기보다 배경이 더 뛰어난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것을 못 견디는 게다.

거만함을 뿜어낼 수 없으니.

그러니 만만한 칠 조에 와서 저리 이죽거린다.

“그래. 아직도 나랑 비무할 생각이 없는 건가? 남궁지후를 잡았다는 실력자들이?”

놈이 내려다보는 시선이 기분이 나빴기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놈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있었다.

“동투제에 나와. 그러면 돼.”

낙우진이 짧게 말했다.

그 말에 팽군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놈은 태생적으로 또래의 반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고작 반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저리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말이 짧다.”

그르렁거리는 팽군호의 말.

“여긴 팽가가 아니다.”

당진산이 차갑게 말했다.

“이익.”

당진산이 당가주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분노를 애써 삭이는 팽군호다.

그러나 주우명 앞에서 그러는 것만큼 위축되지는 않았다.

당가주의 아들이라 하나, 당진산은 장자가 아니고 배분 또한 자신과 같았다.

팽가는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가주직에 계셔서 그렇지, 사실은 아버지가 가주 직에 올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면 나도 소가주인데…….’

당진산을 바라보다가 쓸데없는 생각까지 떠올리는 팽군호다.

“고작 반말도 못 견디는 놈이 무슨.”

낙우진이 피식 웃었다.

“미천한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팽군호가 피식 웃으며 이죽거렸다.

한 달 내내 이곳을 찾아왔었다.

그런 만큼 낙우진이 어디에 분노를 터트리는지, 팽군호는 잘 알았다.

그리고 오늘도 일부러 그것을 건드렸다.

미천한.

낙우진을 분노케 하는 말이었다.

평소 과묵한 낙우진이 오늘 당추의 소식에 반응을 한 것도 아마, 지속적으로 팽군호가 미천하다며 자극한 탓인지도 몰랐다.

“이 새끼가…….”

낙우진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칠 조 생도 넷이 그런 낙우진을 둘러쌌다.

낙우진의 과거는 다들 모른다. 그랬기에 그가 왜 미천하다는 말에 저리 과하게 반응하는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전우다.

하투제를 함께 겪으며, 같은 조원, 동료를 넘어 전우라는 의식이 이들 사이에 자리했다.

“동투제에 나와라. 여기서 시비 걸지 말고.”

백리평이 차가운 눈으로 팽군호를 바라보며 시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익…….”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그 이상의 말을 꺼내지는 않는 팽군호다. 그저 분함을 애써 삭일 뿐.

그냥 봐도 보였다.

이곳에서 가장 강한 이가, 바로 저 백리평이다.

남궁지후를 꺾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저놈일 게다.

괜히 구파일방의 제자가 아니다.

이곳에 매일 같이 나타나 시비를 걸면서 알아봤다. 저놈은 강하다. 자신보다 강하다.

그것을 알기에 괜히 낙우진을 건드린 것이다. 이곳에서 제일 만만해 보였기에.

백리평 또한 그 신분이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종남파 전대 장문인의 손자이니. 물론 현재 종남파에서는 끈 떨어진 연 신세라는 것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핵심 인물들 사이에서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괜히 전대 장문인이라 하는 게 아니다.

지난 전쟁 때 장렬히 전사했으니.

그리고 현 장문인은 전대 장문인의 사제로,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대 장문인의 손자인 백리평을 경원시한다는 것을 알 사람은 알았다.

물론 이곳 칠 조 잡것 나부랭이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겠지만.

그 부분을 긁어볼까란 생각을 막 떠올린 팽군호.

하지만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응? 군호 또 여기 와 있는 거야?”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때문이다.

여전히 진중하며 힘이 있는 목소리다. 말투는 많이 편해졌지만, 목소리 속에 은연 중 서려 있는 위엄은 감출 수가 없었다.

주우명이다.

늘 그랬다.

팽군호가 선을 넘어서 발작을 할라치면 이렇게 주우명이 나타났다.

묘한 우연이다.

팽군호가 그러는 것인지, 주우명이 그러는 것인지 정말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팽 공자께서는 오늘도 이곳에 와 계신 건가요?”

이어서 들리는 단아한 목소리.

하설란이다.

이제는 같은 생도라 다들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데도 불구하고 극구 경어가 편하다면 저리 말을 하고 있었다.

“어? 하 소저. 오늘 수련도 즐거우셨습니까?”

하설란을 본 당진산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네. 보람된 하루였어요.”

하설란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칠 조 조원들은 저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들의 교관과 남매라는 사실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겨우 전반기를 함께한 것뿐이지만, 그들이 겪고 알고 있는 하무백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주우명과 하설란이 나타난 순간 팽군호의 기가 팍 꺾였다.

주우명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었고, 하설란 역시 담당교관이 끼고 돌았다.

자신의 담당교관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팽군호였기에 인편을 통해 가문에 교관의 뒷조사를 시켰었다.

돌아온 답은 허튼 짓 하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엄한 서찰이었다.

자기 일이라면 무조건 지지해주던 할아버지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기에 한설빙 교관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짐작했다.

이곳에 온 그 날 이후 많은 것들이 마음에 안 들었다.

답답한 것 투성이다.

사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저 하설란이라는 아이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팽가에서였다면 자신의 배꼽 아래에 있었을 테니.

그 미모가 팽군호의 음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한설빙 교관 때문이었다.

무언가 자신을 완벽하게 억누르는 무언가를 가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거기에 더해 저 주우명 새끼도 있었고.

칠 조 놈들도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이곳에서 혼자였다. 완벽히 고립된.

‘빈 두 자리에 손발처럼 부릴 놈들이라도 좀 넣어 달라해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관주가 숙부이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이런 부탁 정도는 할아버지가 능히 들어주시리라.

‘그래, 그래야겠다.’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을 떠올렸는지,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다.

“끌끌. 수련 시간 끝났으면 밥을 먹으러 가든가, 숙소로 가든가 그것도 아니면 수련을 더 하던가. 이렇게 모여서 뭘 그리 노닥거리누?”

그때 들려온 늙수그레한 음성.

이 일대를 관리하는 노인이었다.

교룡관 내의 일꾼들은 보통은 젊고 건장한 이들이었으나 저 노인은 달랐다.

늙은이였다. 음성 또한 이미 들은 바와 같이 늙수그레했다.

그런데 건장했다. 그것도 굉장히 건장했다.

여느 일꾼들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그랬기에 감히 일꾼 따위가 자신에게 저딴 망발을 내뱉는데도 가만히 있는 것이다.

덩치가 건장하다 한들, 늙은이에 일꾼일 뿐이다. 당장 치도곤을 내려고 하면 낼 수도 있으나 그러지 않았다.

고작 일꾼 따위에게 그러는 것이 얼마나 쪽팔리는 일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리분별이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모를 일이다.

전부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인 이곳이었기에 그저 모든 것이 짜증날 뿐이다.

저 노인의 기세에 압도당했음을 팽군호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아, 어르신. 그렇잖아도 이제 식사하러 가려던 참입니다. 같이 갈 건가?”

어느새 안면을 터놓은 것인지 주우명이 노인에게 정중히 말했다. 그리고는 시선을 칠 조의 생도 다섯에게로 돌렸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일곱 사람이 담룡남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팽군호.

“빌어먹을 새끼들. 내가 언젠가는 본때를 보여주마. 지금 마음껏 즐기고들 있어라. 씨발.”

이를 뿌드득 갈며 욕설을 흘려내고 있었다.

“허어. 마음을 곱게 써야지.”

그런 그의 귀로 일꾼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애써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담룡서각을 향해서였다.

잠룡대의 생도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다. 그것에 팽가의 제자들도 몇 있으니 그곳에서 이 분을 풀어야 할 것 같았다.

“씨발. 내가 미쳤지. 이딴 맹룡대가 뭐라고 이리로 오겠다고 한 거지.”

한 달이 지났으나 단 하나도 애초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분노에 찬 팽군호의 두 눈이 흐리게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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