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거 구미가 당기는 징계로군요
철운쌍도(鐵雲雙刀).
팽가제일도라 칭해지는 팽도웅의 별호다.
철혈벽력도와 능운팔영도라는 두 가지 도법을 능숙하게 펼쳐서 얻게 된 별호이다.
두 가지 도법 모두 십 성의 경지에 이른 지 오래다. 십이 성의 대성에 이르기까지는 이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만이 남아있는 상태.
능히 절정고수 중에서도 그 경지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는 상태였다.
아니 이미 초절정의 초입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팽가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의 도법 두 가지를 쉬이 구분하고 알아보지 못했다.
그걸 저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알아보았다.
더군다나 자신의 도법에서 자신의 사부를 알아차리다니.
“어찌 알긴? 보이니 알지. 애초에 팽가에서 능운팔영도를 익힌 이가 팽거량 말고 또 누가 있다고. 아, 네가 있군. 뭐, 팽거량에게는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뛰어난 도법을 물려줄 제자가 없는 걸 늘 안타까워했으니…….”
“네, 네 놈이 함부로 그 입에 그 존함을 올릴 분이 아니다!”
마치 옆집 친구 이야기를 하듯, 자신의 사부 이야기를 하는 하무백의 행태에 팽도웅이 기수식이 풀린 것도 잊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팽도웅을 보고는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이건… 제자를 잘 얻은 건지, 못 얻은 건지 가늠이 안 되네.”
“다, 닥쳐라!”
팽도웅이 거칠게 외쳤다.
“그보다 너 기수식 풀렸는데? 팽거량이 그렇게 가르쳤냐?”
“크윽.”
하무백의 적나라한 지적에 팽무량은 이를 악물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기수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세를 풀어버린 것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으니.
“그럼 얼마나 배웠나 볼까? 철혈벽력도라면 별 흥미가 없는데, 능운팔영도라면 좀 다르지. 제대로 익혔다면 저놈이 오늘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게다.”
마지막 말을 할 때 하무백의 음성에 은은한 살기가 스며있었다.
능운팔영도라는 도법 때문에 살짝 분위기가 풀어졌으나, 하무백은 지금 이 사달이 왜 벌어졌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네 이놈!!!”
노호성과 함께 움직이는 도는 팽도웅의 우렁찬 목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여인의 춤사위를 보는 듯 부드럽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도.
달리 보면 어느 여승의 승무 같아 보이기도 했다.
“겉모습 흉내는 제법 그럴듯하게 내는군.”
하무백이 이번에는 검을 진지하게 움직였다.
저 정도 경지의 능운팔영도라면 제대로 상대를 해주는 것이, 저 무공에 대한 예의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무백 그가 생각하는 팽가의 최고 무공이 바로 능운팔영도였기 때문이다.
가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혼원탈백도 보다 오히려 한 수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하무백의 검이 곧게 뻗어갔다.
유려한 곡선 사이를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직선.
그 직선에 곡선이 여지없이 흩어지고 부서졌다.
“으윽.”
팽도웅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너무 손쉽게 자신의 도가 파훼되고 있기 때문이다.
능운팔영도는 팽도웅에게 팽가제일도라는 명예를 선사한 도법이다.
철혈벽력도로 감당을 못할 상대도 능운팔영도라면 능히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의 비장의 절기였건만.
너무 허무하게 당하고 있었다.
저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듯한 검에 실린 힘도 엄청났다.
도와 검이 부딪힐 때마다 팽도웅의 손바닥이 찌르르 울렸다.
능운팔영도가 극한의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도법이라 하지만, 그래도 팽가의 도다.
팽가의 도가 가진 것 중 패(覇)는 버렸으나, 중(重)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무겁고도 부드러운 도.
그것이 능운팔영도의 요체였다.
그런데, 상대의 검의 위력에 도가 밀렸다.
팽도율 자신이 가진 도의 무거움으로 상대의 검이 가진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익.”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팽도웅은 이를 더욱 악물었다.
“어설퍼. 깜냥도 안 되는데 두 가지 도법을 익히니 그런 게다. 쯧.”
하무백이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휘두르며 혀를 차며 말했다.
“팽거량도 불쌍하군. 기껏 구한 제자가 이런 꼴이라니.”
이어진 말은 팽도웅에게 있어서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네 이놈!”
“같은 소리 몇 번이나 지르지 말고. 네 놈 목청 큰 건 알겠다만, 도를 든 놈이 목소리만 커서 뭐하나. 실력이 못 따라가는데.”
그리 말하는 하무백의 검이 점점 강맹하게 움직였다.
이화접목의 묘리를 이용한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어떻게든 그 힘을 흘려내려 용을 쓰는 팽도웅이었지만.
점점 뒤로 밀리고 있었다.
흘리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도무지 팽도웅이 감당할 수 없는 강맹한 검격이 날아듦에 따라 그의 움직임은 점차 느려졌다.
종국에는 흘려낼 생각조차 하지도 못하고 그저 도를 들고 전력을 다해 막을 뿐이다.
그럴수록 하무백의 검격이 주는 충격이 팽도웅의 몸에, 그리고 그의 도에 점차 쌓였다.
악다문 입술 사이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팽도웅은 들끓는 내부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으나 역부족이었다.
‘무슨 놈의 검격이…….’
그의 내공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검격이다.
능운팔영도의 여덟 가지 초식 중 하나가 감당할 수 없는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는 것이다.
그리고 눈앞의 상대가 펼치는 공격은 그 초식으로도 감당을 못했다.
파훼된 것이다.
‘사부는 그 어떤 공격도 흘려낼 수 있다 했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쯧. 고작 이런 정도로 능운팔영도를 십 성 익혔다고 자만하고 있었겠지. 그러니 팽가제일도 같은 허명을 얻었을 테고. 이 정도는 팽거량의 도에 발끝도 미치지 못하거늘.”
하무백의 말이 많아졌다.
다른 부분에 있어서 팽도웅에게 분노한 모습이다.
팽거량.
그는 지난 전쟁에서 하무백이 믿고 등을 맡겼던 전우 중 한 명이었기에.
그가 받아들인 제자가, 그의 훌륭한 도법을 이렇게 형편없이 펼치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넘어서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능운팔영도의 진정한 위용을 직접 겪은 하무백이었기에, 그런 것이다.
“이제 그만 끝내자. 그런 알량한 도따위.”
하무백의 검이 풍기는 기운이 변했다.
지금까지도 강맹했건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냥 보기에도 세상 모든 것을 무너뜨릴 듯한 어마어마하나 거력이 담겨 있었다.
하무백은 정말 단순히 그 검을 휘둘렀다.
맹룡대 칠 조 생도들이 무수히 휘둘렀던 삼재검법의 한 초식처럼.
그 결과는 달랐다.
“크헉…….”
팽도웅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의 도는 부러져 형편없이 나동그라졌다.
“도, 도웅아!”
초조한 얼굴로 둘의 대결을 지켜보면 팽도율이 황급히 몸을 날려 팽도웅을 안아 들었다.
하무백은 저쪽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한 번 슥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한설빙이 있는 곳이었다.
그 목적은 당연히 팽군호다.
“…….”
“꿀꺽.”
칠 조 생도들과 주우명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런 하무백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위용 때문이다.
팽가제일도라는 팽도웅을 어린애 데리고 장난치듯 상대해서 그 도를 부쉈다.
만일 교룡관 다른 생도에게 오늘 본 것을 이야기한다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싸움이 나리라.
“하 교관님!”
그때.
하무백을 막아선 이가 있었다.
하설란이다.
사사로이 오라버니가 아닌, 공적인 교관이라는 호칭으로.
지금까지는 너무 급박하게 전개되는 사건에 하설란도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팽도웅이 피를 토하며 날아갈 때였다.
그 모습이 그녀의 정신을 번쩍 일깨웠다.
이 모든 사달은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을 희롱한 팽군호 그놈의 잘못이 십 할이다.
하지만 자신의 오라버니인 하무백이 저리 폭주하는 것은 어쨌든 자신의 안위를 염려한 탓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곳에서 오라버니를 막을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사부님도 막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사부님이 먼저 폭주하셨으니.
“교관이 생도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폭행하는 것은 관규 위반인 듯합니다.”
하설란이 청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모두가 의외라는 얼굴로 하설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무백의 여동생임은 팽도웅을 제외한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무백이 그녀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피해자인 그녀가 설마 팽군호를 보호하고 나설 줄은 몰랐다.
‘여기서 더 하면, 오라버니가 팽가와 싸워야 할지도 몰라.’
한 달 남짓한 교룡관 생활이었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대강의 무림 정세에 대해 알게 되었다.
팽가가 정천맹을 구성하는 명문대파 중 하나인 오대세가의 일원임도 알고 있다.
팽군호가 시도 때도 없이 가문 자랑을 한 탓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도 다른 이들의 평가나, 교룡관 내 장서고의 기록물이나 서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팽가는 명문대파고, 오라버니는 한 개인이다.
이 이상 이 갈등이 커지게 둘 수가 없었다.
그녀는 팽군호를 지키기 위함이 아닌 하무백을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이다.
하무백은 하설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당찬 모습에 살짝 놀라기도 했다.
“관주. 이 생도의 주장을 어찌 생각하시오?”
팽도웅의 내상을 급히 살피던 팽도율이 하무백의 물음에 몸을 일으켰다. 급한 불은 껐기에 가능했다.
“분명 팽군호 저놈이 관규를 어기는 잘못을 저질렀을 테니, 하 교관의 행동은 그에 대한 훈계로 볼 수는 있네. 하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그건 훈계가 아니라 폭행이 될 수도 있는 게지.”
팽도율은 일단 무조건 팽군호가 잘못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들어갔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하무백의 화를 달랠 수 있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에 대한 징계는 뭐요?”
“최대 파면 정도겠군. 생도 측 입장도 들어봐야 하지만 말이네.”
“흐음.”
하무백은 팔짱을 끼고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파면 따위가 겁나는 게 아니다. 파면당하면 그냥 여동생과 사부와 함께 강호나 주유하다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살면 된다. 그뿐이다.
자신이 무림에, 정천맹에 투신한 목적은 이미 이뤘으니.
더군다나 파면을 당한다면, 자신을 정천맹에 묶어 두려는 그에게 적당한 핑계이기도 했고.
“그거 구미가 당기는 징계로군요.”
그래서일까. 본심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대답에 팽도율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의 동생이 막아서 준 덕에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말했건만.
하긴 애초에 저자가 뭐가 아쉬워 교룡관 교관 자리에 연연하겠는가.
그러나.
“잠깐만요! 관주님. 파면이라고요?”
다른 곳에서 뾰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한설빙이었다.
“하 교관께서는 구미가 당기는 징계일지 몰라도 저는 전혀 아니군요.”
그러면서 자신의 발 앞에 널브러져 있던 팽군호 앞을 막아섰다.
“단주의 파면은 제가 필사적으로 막겠어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허리에서 낭창거리는 연검까지 뽑아 들었다.
자신은 진심임을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행동에 반색을 한 것은 팽도율이었다. 그녀라면 어느 정도 하무백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설란과 한설빙.
두 여인이 하무백을 막아 세우고 있었다.
“안 됩니다! 파면은!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하라고요!”
그때 큰 소리로 외치며 끼어드는 이가 있었으니 당진산이었다.
하무백의 시선이 그리로 돌아갔다.
“아니. 무공 가르치고, 약 먹이고, 빡세게 굴렸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거기 가면 죽는다면서요? 저야 그렇다 치고, 얘들은요? 운뢰는 노모와 여동생까지 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당진산이 다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맞습니다! 안 됩니다!”
단목운뢰가 크게 외쳤다.
“안 돼요.”
짧지만 한기 가득한 연하민.
“안 됩니다.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백리평도 빠지지 않았다.
“파면은 안 됩니다!”
낙우진도 답지 않게 크게 외쳤다.
하무백의 파면을 결정하는 것은 관주인 팽도율이다. 그럼에도 칠 조 생도는 하무백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팽도웅과의 대결을 지켜본 그들은 아는 것다,
검병을 쥔 이가 누구인지.
팽도율은 마음속으로 그런 그들에게 온 힘을 다해 응원을 보냈다.
제발 하무백을 여기서 멈춰 세워 달라고.
하무백이 얼굴을 찡그렸고, 이마에 내 천 자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