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49화 (49/312)

49화. 거기까지

“잘 알지요. 알다마다요.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운 전우일 때도 있었으니.”

“네 놈이…….”

전우라는 말이 나오자 팽무량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가문을 지키는 가주라는 이유로 지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 덕에 제 목숨을 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동료라면 그만큼 믿음직한 사람도 없습니다.”

담담히 이야기하는 팽거량의 음성에 팽도웅도 집중했다. 그 역시 하무백의 정체가 궁금하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사부가 그를 전우라 칭했다.

알고 있는 사이처럼 이야기했지만, 저런 사이일 줄이야.

게다가 사부의 목숨을 구하기까지.

‘대체 어찌 된 놈인 거지…….’

지금도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연배였건만, 지난 전쟁 때라면 새파란 핏덩이나 다름없었을 것이건만.

“그랬기에 그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분노한 모습을 저는 딱 한 번 본 적이 있지요. 그리고 그 덕에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형님. 이만하길 다행인 겁니다.”

“네 놈이 정녕…….”

팽무량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팽거량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행여나 복수하겠다는 허튼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가 이렇게 끝을 냈으면 끝난 겁니다. 그에게 복수하겠다는 요량으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팽가는 그 길로 몰락입니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느냐! 어찌 본가가 한 개인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 하느냐!”

팽가의 몰락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팽무량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네 놈은! 도웅이를 망쳐놓은 잘못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고!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망발을 지껄이고 있어!”

분노에 찬 외침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팽거량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감당치 못하는 자를 어찌 내 반절에도 미치지 못하는 도웅이 감당하겠소. 형님도 그의 오초지적이 되지 못할 게요.”

부릅뜬 두 눈에 핏발이 가득 서는 팽무량.

자신의 실력까지 폄훼하는 말에 그의 온몸에서 거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그럼에도 팽거량은 평온했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기운이었기 때문에.

“가주로서 명한다. 원로원의 팽거량은 앞으로 석 달간 근신에 들라. 그리고 팽도웅에 대한 일체의 관여를 금한다. 그리고 팽호량은 팽도웅을 제대로 가르쳐라!”

분노에 찬 팽무량의 명에 팽거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주전을 나갔다.

“저, 저 놈이…….”

“무량 형님… 거량 형님의 말이…….”

“닥쳐라! 네 놈도 근신에 들고 싶으냐!”

팽호량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팽무량의 분노에 찬 외침이 그의 입을 닫았다.

팽호량은 씁쓸한 얼굴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지난 전쟁에 참전했고, 멀리서나마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랬기에, 팽거량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거늘, 가주는 그저 자신만의 시야 속에 갇혀 있었다.

“본맹으로 갈 것이다. 준비해라!”

그리 명을 내린 팽무량은 팽군호에게 다가갔다.

“염려 말거라. 군호야. 내 기필코 네 원한을 갚아주마. 어서 가자꾸나.”

그렇게 팽군호를 데리고 가주전을 벗어나는 팽무량.

남아있는 팽도원의 얼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기어코 복수를 하실 생각이시로군요…….”

팽호량이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가주전을 벗어났다.

***

“저어. 교관님.”

수련이 끝날 즈음.

하설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응? 왜?”

한설빙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두며 물었다.

“저희 오라버니와 잘 아시는 사이신가요?”

한 달 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그런 사이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묻지는 못하고 궁금증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팽군호의 사건을 겪고 나니, 더 이상 그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오늘 이렇게 물어보게 된 것이다.

한설빙이 궁금함이 가득한 하설란의 두 눈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음. 난 사실 어느 정도 잘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니었네?”

“네?”

“이렇게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다는 걸 몰랐거든.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동료들 전부. 어쩜 그렇게 철저히 자신을 감출 수가 있는지 말이야. 쯧.”

“아…….”

한설빙의 혀 차는 소리에 하설란은 작은 탄성을 흘렸다.

“그, 저… 제가 오라버니랑 아주 어릴 때 떨어져서 최근에야 만났거든요.”

그 말에 한설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거야 잘 알지. 내가 하 교관님과 함께 저 진창에서 구른 세월이 있으니. 한 7년 전쯤? 그때 잠깐 자리를 비운 적 빼고는 최근까지… 아, 그럼 7년 전에 자리를 비웠던 게?”

“네. 아마 잠시 저를 보러 오셨던 거 같아요.”

주우명은 멀찍이 떨어져서 자신의 검법을 살폈다. 사적인 이야기인 듯하여, 자신이 들으면 안 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명. 이리로 와. 고작 거기까지 가봐야 어차피 다 들리는 거 알아.”

그런 주우명을 한설빙이 불렀다.

그까지 불렀기에 하설란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왜 그런 건가 하고.

“뭐, 하 교관님 이야기는 들어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우명은 내가 아니라 무연진인께 들을 수도 있으니. 그래도 나한테 듣는 게 나을 테지. 그럼 다 같이 식사나 하러 갈까?”

그렇게 한설빙은 이제 둘만 남은 자신의 조원들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어? 이 길은?”

담룡각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하설란의 의문에 한설빙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담룡각에서 하면 재미없잖아. 어차피 교관과 함께 움직이면 외출도 가능하고.”

그렇게 한설빙은 어느새 자신의 단골집이 된 어느 골목의 허름한 주점으로 향했다. 적당한 식사와 적당한 술이 나오는 작은 곳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여기 주인장이 취미로 운영하는 곳인지, 올 때마다 이렇더라고. 그래서 좋아하지.”

“거, 영업하는 곳에서 무슨 악담인가?”

물잔을 들고 온 중년의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실을 말한 거죠. 적당히 챙겨주세요.”

“그러지. 오늘은 혼자가 아닌데? 이 헌앙한 공자와 소저는 누구신가?”

“제자요.”

“아, 교룡관 교관이라 했었지. 알았네. 평소처럼 챙겨주면 되는가?”

주인장의 물음에 한설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과 술은 금세 차려졌다.

“자, 한 잔씩들 받아.”

싸구려 백주를 잔에 가득 채워 건네는 한설빙.

주우명과 하설란 모두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왜 그래? 술 처음 마셔… 아!”

말을 하다가 깨달았다.

처음일 게다.

주우명은 도사들의 문파인 무당의 제자이고, 하설란은 하무백 그 인간이 술을 마시게 두지 않았을 거 같았다.

“네.”

“예.”

두 사람이 나지막이 답했다.

“뭐, 그럼 알아서들 해. 마시든 말든. 그래도 혼자 술잔 들고 있는 건 분위기 쓸쓸하니까. 그렇게 앞에만 두고.”

한설빙은 딱히 강요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식사를 하며 싸구려 백주 한 잔을 함께 하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저녁 식사였다.

그랬기에 담룡각보다 이 허름한 주점을 좋아하는 것이고.

쓰디쓴 백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시원했다.

그렇게 상쾌한 표정으로 술잔을 내려놓는 한설빙.

하설란이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더니 머뭇머뭇 손을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으로 뻗는다.

“응? 마셔본 적 있어?”

“아뇨. 처음이에요. 그런데 궁금하네요. 한 번 마셔봐도 될 거 같아요.”

한설빙의 물음에 답하는 하설란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녀는 현재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났다. 물론 팽군호의 일처럼 무서운 일도 있었지만.

“하 교관님이 못 마시게 한 거야?”

한설빙이 턱을 괴도 하설란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아니라, 제가 몸이 좀 많이 안 좋았어요……. 뭐, 지금은 괜찮지만요.”

“뭐, 그렇다면야. 많이 쓰니까 아주 살짝, 입술만 축인다는 느낌으로 먼저 맛을 봐.”

하설란은 한설빙이 시키는 대로 조심스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저게 뭐라고 저리 진중하고 긴장한 표정인지. 그 행동에 한설빙은 물론 주우명까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크으.”

맛을 본 하설란의 입에서 걸쭉한 술꾼의 음성과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때?”

“음. 맛은 쓰고, 목구멍은 화끈 거리는 게… 이런 걸 왜 마시나 싶긴 한데… 왠지 다시 마시고 싶어지네요.”

하설란의 대답에 한설빙이 피식 웃었다.

“이거 내가 실수했네. 어쩌면 엄청난 주신(酒神)을 탄생시킨 거 아닌가 몰라.”

한설빙은 너스레를 바라보며 하설란은 그 사이 다시 한번 술잔을 홀짝였다.

금세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식사.

주우명과 하설란은 음식의 맛에 감탄했다.

맛있었다.

담룡각 음식 이상으로 맛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손님이 없는 것인지 의문이었으나,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건 이곳 주인에게 실례라 생각한 것이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하무백.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그 말에 하설란과 주우명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미 충분히 배부르게 먹었다. 거기에 더해 하설란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강한 인간이야. 무서우리만치 엄청나게 강한…….”

두 사람의 시선이 한설빙에게 집중됐다.

“우리 단으로 처음 왔을 때 어디서 저런 인간이 나타났나 싶었어. 정말 괴물이라는 말도 모자랄 정도로 강했거든. 그리고 처음에는 악귀 같기도 했어. 흡사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하듯 적들을 베어 넘겼으니까.”

“아…….”

그 말에 하설란이 낮은 탄성을 흘렸다.

오라비가 왜 그런지 알 것 같아서였다. 물론 그녀가 기억하는 일은 아니다. 사부에게 들었을 뿐.

“그래서 뭐가 궁금할까? 오라버니에 대해.”

“그… 오라버니는, 교관님께서 본 오라버니께서는 많이 힘들어하셨나요? 불행해 보이셨을까요?”

그녀가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그것이었다.

자신의 절맥을 치료하기 위해, 그리고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정천맹에 투신한 오라버니라 들었다.

그런 오라버니의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 궁금했던 것이다.

세상에 나온 지금, 그녀는 제법 행복하다고 느꼈다. 자신의 지금의 행복을 위해 과거 오라버니의 행복은 사라진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음… 불행이라… 그 인간은 말이지…….”

기억을 더듬으며 막 무언가를 말해주려 할 때.

“거기까지.”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한설빙이 깜짝 놀랐다. 나름 기감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탓이다.

‘하아. 역시 이 인간은…….’

마음속으로만 나직이 한숨을 쉬는 그녀.

그들이 자리한 식탁에 하무백이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주우명이 마시지 않은 채 모셔만 두고 있던 술잔을 가져가 단번에 비웠다.

“란아. 내가 힘든 적은 있어도 불행한 적은 없었다. 네가 있었으니까. 유일한 가족인 네가 있어서 내가 불행한 적은 없었다.”

그 말을 하고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무백.

“그리고 술은 적당히 마셔라. 그리 좋은 건 아니다.”

그리고는 훌쩍 떠났다.

“훗. 봤지? 정말 도깨비 같은 인간이야. 아, 그래 도깨비. 저 인간한테 딱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네.”

한설빙의 말에도 하설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을 뿐이다.

네가 있어서 불행한 적이 없었다는 오라비의 말이.

그녀의 가슴 깊이 박혀 뇌리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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