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상대해 드려야겠지
“기어코…….”
팽도율은 손에 들린 서신을 내려놓고 두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당최 아버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 저런 아집을 부리시는 건지. 대체 무엇이 아버님의 눈을 가리고 판단력을 흐려 놓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최악의 선택을 아버지가 했기에.
팽도율은 등불에 서신을 가져가 불태워버렸다. 이런 것이 자신의 집무실에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삼매진화를 일으켜 태우기에는 그 한 줌의 내공조차 아까운 내용의 서신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팽도율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가 지난번에 본 하무백의 모습, 그리고 지난 전쟁에서 하무백이 보여준 신위를 생각한다면 절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사내다.
그런데 팽가의 가주인 아버지는 결국 군호 그 개잡놈의 복수를 위해 하무백의 처단을 결정하셨다.
어쩌면 팽가가 처단당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모르신 채.
“일단은 그를 먼저 만나봐야지.”
하무백에게 팽가의 결정을 미리 알려주는 것.
이것은 어쩌면 가주인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팽도율은 이것은 가문에 대한 배신이 아닌 가문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라 여겼다.
지난 전쟁에서 혈교의 정예부대 이백 명을 홀로 괴멸시킨 전적이 있는 하무백이다.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물론 이백대 일의 건곤일척의 승부는 아니었다.
본인이 혼자임을 철저히 이용한 치고 빠지는 유격전 형태의 전투였다.
그럼에도, 혈교 정예부대를 괴멸 시킨 그의 신색은 너무나도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팽가의 전력이 그때의 그 정예부대보다 강하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를 처단하겠다고 싸움을 건다니.
‘아무도 그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것인가? 하긴……. 기록에 없는 전투이니.’
기록에는 없었다.
팽도율의 기억에 있을 뿐.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전공을 축소하기 위한 백도회의 술책이었으니.
팽도율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수련이 한창일 시간이었기에.
“응? 무슨 일이시오? 관주?”
딱딱한 얼굴로 다가오는 팽도율을 발견한 하무백이 물었다.
“잠시 조용히 이야기 좀 나누도록 하지.”
무거운 그의 목소리에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함께 했다.
칠 조 생도는 이제 이런 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각자의 수련에 열중했다.
“무슨 일이오?”
근처 빈 연무장에 자리한 하무백이 물었다.
[팽가의 결정이 오늘 나에게 서신으로 도착했네.]
인적이 없는 곳임에도, 전음으로 말을 하는 팽도율.
그리고 그 내용.
하무백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팽가의 결정? 그게 자신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저리 어두운 안색으로 무겁게 말을 하는 걸까?
팽도율은 하무백의 반응에서, 그가 팽군호에 대한 일은 안중에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니 저리 갸웃거리지.
하무백에게 있어 팽가라는 가문은 고작 그 정도라는 것이다. 헌데 가주인 아버지는…….
[지난번, 군호의 일 때문이네.]
팽군호의 이름이 나오자 하무백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기막 둘렀으니 편히 말해 보시오. 관주. 군호? 그놈의 일이 왜?”
그 음성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팽도율과 하무백이 있는 장소의 소리가 다른 이는 들을 수 없게 기막을 둘렀다는 말에 팽도율은 전음을 멈추고 육성으로 이야기했다.
“가주께서, 복수를 하겠다 하시는군.”
“풋.”
그 말에 하무백에 순간 웃음을 흘렸다.
“누가 누구에게? 기껏 란이와 팽거량 얼굴을 봐서 그 정도로 해뒀더니?”
그 말에는 은은하게 끓어오르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면목이 없네. 가주께서 판단력이 흐려지신 듯허이.”
“허. 위험한 곳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인간이…….”
지난 전쟁에서 하무백은 팽가에 대해 나름 좋은 인상을 가졌었다.
정말 용맹하게 적과 싸웠으니. 그 중 팽거량에 대해서는 감탄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 용감한 팽가의 무인들 중 가주는 없었다. 물어보니, 가문을 지키고 있단다.
당시 그 대답에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있었다.
“뭐, 복수를 하겠다면 상대해 드려야겠지.”
하무백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살기가 그득했다.
“하 교관. 아니, 하 대협. 부디 팽가의 사정을 봐주게나. 이건 아무리 봐도 가주의 독단이야. 팽가의 결정이 아닐세. 내 조속히 팽가로 돌아가 해결을 볼 터이니. 그동안 제발 손속에 사정을 둬주게. 이리 부탁하네.”
팽도율의 목소리는 간절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그리 해야 할 이유는 없소이다. 관주.”
냉정하기 그지없는 대답을 남기고, 하무백은 몸을 돌렸다.
팽도율은 그런 하무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담담했다. 하무백이 이런 대답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어차피 자신이 하무백의 편임을 알리려는 목적이었으니, 그것은 달성했다.
“어서 움직여야겠군.”
팽도율은 다음 수를 위해 움직였다. 빨리 본가로 가서 형님과 원로원의 원로들을 만나야 했다.
***
팽가비고.
그 최심층.
오직 가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방에 팽무량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하나의 서책이 놓여 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풀어볼까, 비고 내, 무공 서적들을 모아놓은 서고를 생각 없이 거닐다가 발견한 서책이다.
딱 10년 전이다.
그러니까 혈교 놈들이 발호할 때 즈음이었다.
자신이 이 서책을 발견한 것은.
막 정천맹 지원 부대를 편성하던 때였다. 자신이 직접 지휘해서 갈 계획이었으나, 이 서책이 모든 것을 뒤바꾸었다.
세간에는 팽무량은 전쟁이 무서워 가문에 숨은 가주라 비아냥거리는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쓰기에는 이 서책이 지닌 가치가 너무나 엄청났기에.
대체 왜, 가문의 선조들은 이 보물 같은 서책을 이곳에 처박아 놓은 것인지, 그리고 이후로 왜 발견하지 못했는지 의문이었다.
혼원류하(混元流河).
서책에 쓰여 있는 무공이다.
정확히는 내공심법.
팽가의 내공심법은 아니었다. 팽가의 가전무공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정리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저런 무공은 없었다.
처음에는 잡서인 줄 알았다.
다만 혼원이라는 두 글자에 끌려 읽게 되었다. 당시 혼원탈백도가 벽에 막혀 있던 때였으니.
팽가제일도가 가주인 자신이 아닌, 사촌동생 팽거량임에 열등감과 자괴감도 느끼고 있던 때다.
그때 발견한 이 무공은 팽무량에게는 한 줄기 빛이었다.
혼원탈백도에는 그 짝이 되는 혼원신공이라는 내공심법이 있었다.
그 대신 잠깐 서책에 나온 내용대로 운용해본 혼원류하라는 심법.
깜짝 놀랐다.
혼원신공에 비할 바가 아닌 강맹한 기운이 도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 당시의 그 희열이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팽무량은 혼원류하를 익히기 위해 폐관에 들었고, 사람들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팽가의 가주를 겁쟁이라 수군거렸다.
“분명히 달랐다. 크흐.”
사나운 웃음이 팽무량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팽가에서 팽거량을 만났을 때 이미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보다 훨씬 강해져 있음을.
모두 은밀히 익힌 혼원류하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번 정청맹 행에서 맹주 소휘웅을 만나서 다시 한번 확신했다.
자신이 결코 그에게 뒤떨어지지 않음을.
그의 기세를 받으면서도 도무지 그에게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이길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지만.
그것을 확인했기에, 장로원에서 자신의 요구를 기각 당한 후 팽가 단독으로 놈을 칠 결정을 내린 것이다.
놈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자신은 능히 그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융중혈투. 그깟 과장된 이야기에 부화뇌동하는 것들이란……. 쯧.”
융중혈투(隆中血鬪).
혈교 정예무사 이백 명을 단신으로 전멸시켰다는 하무백의 전투. 당시 하무백은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그를 아는 이들은 그 이후 그를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정천맹주 소휘웅보다 그를 더 강하게 여기기도 했을 정도니.
그러나 당시 열세였던 전세를 뒤집기 위해, 영웅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해서 정천맹에서 만든 영웅, 그게 하무백이라고 팽무량은 여기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융중혈투 이후, 정천맹에서 전세를 뒤집은 이후, 하무백 그의 행보가 전무한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융중혈투는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정천맹의 그 어떠한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런 가짜 영웅에게 자신의 손자가 그 꼴을 당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 아이는 자신이 완성할 혼원류하와 혼원탈백도를 이어받아 팽가를 천하제일가로 만들 아이다.
“이제 곧 십 성이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팽무량이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구 성에 머물러 있던 혼원류하다. 그럼에도 소휘웅과 자웅을 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때가 구 성의 막바지였으니.
이제 십 성을 이루면, 자신이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교룡관으로 향할 것이다.
그 씹어먹을 놈의 목을 베러.
단전에서 올라온 기운이 전신을 휘몰아쳐 달린 때, 때로는 급류와 같이, 때로는 도도한 대하의 흐름과 같이.
그야말로 류하.
흐르는 강과 같은 내공의 움직임이다.
이윽고 전신을 휘몰아치던 기운이 대해를 향해 뻗어가듯 사지백해로 거대한 흐름을 만들더니, 거대한 기운의 바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순간.
쾅! 하는 거대한 폭발과 함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크아악.”
검붉은 피를 토해낸 팽무량.
그의 두 눈이 은은한 홍광을 띠며 빛났다.
가부좌를 풀고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그.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크하. 크하하하하. 우하하하하하!”
앙천광소를 터트리는 팽무량.
“이게 십 성이구나. 크하하하. 당장 확인해 봐야겠다.”
그는 팽가비고를 나와 가주 전용의 폐관수련실로 들었다.
곧장 도를 뽑아 들고 펼치는 혼원탈백도.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강맹하고 또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혼원류하를 운용하는 동안 그가 발하는 강기는 은은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좋구나!”
도를 휘두를 때마다 시원한 그의 추임새가 터져 나왔다.
이 정도라면, 능히 극성에 이른 혼원탈백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위력이었다.
극성의 혼원탈백도.
본 적은 없으나 가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있었다.
팽가 역사상 단 세 명만이 혼원탈백도의 극성을 이루었고, 그들 모두 당시 강호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가 되었다고 했다.
정사마를 통틀어서 말이다.
지금 팽무량은 자신이 감히 그러한 천하삼대고수에 능히 비견될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하는 것이다.
“놈. 기다려라. 내 친히 네 놈의 목을 따주마.”
팽무량은 두 눈을 살벌히 빛내며 폐관수련실을 나왔다.
모든 확인이 끝났으니 남은 것은 교룡관으로 떠날 일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가주가 친히 진두지휘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팽가의 정예무사 삼백 명이 동원되었다.
팽가 전체 전력의 칠 할에 해당하는 인원이다.
남은 이들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가문에 남아 있는 인원이 전부였다.
가문은 소가주인 팽도원에게 맡겼다.
“아버지…….”
“시끄럽다. 군호나 잘 돌보고 있어라.”
간절한 아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팽무량은 말에 올랐다.
“자, 다들 가자! 가서 팽가의 명예에 먹칠을 한 놈의 목을 따자꾸나!”
팽무량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삼백의 인원이 이동을 시작했다.
팽도율이 본가에 도착한 것은 그리고 나서 이틀 뒤였다.
“허……. 그럴 수가…….”
지름길을 통해 전력으로 말을 달려오는 바람에, 관도를 통해 이동한 아버지의 행렬과 길이 엇갈려 버린 것이다.
“형님.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나도 최선을 다했다만……. 막무가내시다.”
팽도원이 침중한 얼굴로 답했다.
“예전에는 그리도 사리에 밝으셨던 분이, 왜 저리 되신 건지…….”
팽도율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본가에 올 때부터 결심했던 것이다.
“원로원으로 가시지요. 원로들께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특히 태상호법께서요.”
“도율아…….”
태상호법이란 말에 팽도윤은 눈을 잘게 떨며 동생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