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너였던 게냐?
“아, 그전에 먼저 연락을 취해야겠군요. 전서응이 있는 곳으로 가시지요.”
“연락이라니?”
팽도율의 말에 팽도원이 물었다.
“그에게 알려야지요. 팽가에서 아버님께서 출발하셨다고.”
그 말에 팽도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
가문의 움직임을 적에게 알리자는 말이었으니 그럴만했다.
팽도율은 형의 그런 반응에 피식 웃었다.
“형님은 설마 그 행동이 가문을 배신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그…….”
팽도원은 생각이 복잡한 듯했다.
“가문을 위한 겁니다. 제가 아는 상식선에서는 필패입니다. 그는 개인이고 우리는 집단이에요. 그가 작정하고 숨어버린다면, 그 누가 그를 찾을 수 있습니까?”
팽도율의 말에 팽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그가 작정하고 은신한다면 찾기가 요원해진다. 그리고 자신들은 밤마다 잠을 설치겠지. 어디서 그의 검이 날아올지 알 수 없으니.
“제가 알리지 않아도 어차피 알게 됩니다. 그 정도 되는 팽가의 무사들이 무창에 입성하는 순간에요. 오히려 관의 관심까지 끌어버리면 우리에게도 나쁜 일입니다. 그러면 그때 팽가의 움직임을 알아도 몸을 움직이는데 하등 아쉬울 게 없습니다. 차라리 미리 알려 그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사두는 게 낫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팽도원은 바삐 걸음을 옮기는 동생의 뒤를 무거운 발걸음으로 뒤따랐다.
***
팽도율이 긴급히 날려 보낸 전서응은 사흘이 되지 않아 교룡관에 도착했고, 밀봉된 서신은 하무백의 손에 전해졌다.
“흠…….”
서신을 내려다보며 잠깐 고민하는 하무백.
무려 삼백 명을 동원해서 자신의 목을 따겠다고 가주가 직접 출전할 줄이야.
“팽가 가주가 미친놈이었군.”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하무백.
그들과 싸우는 게 두려운 게 아니었다.
그들을 모두 처리함으로써 어렵게 지운 살기가 다시금 자신의 몸에 자리하는 것을 저어하는 것이다.
하무백은 서신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사부와 의논하기 위함이다.
사부는 맹룡대 이십 조의 연무장 근처 길에서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 게냐?”
하무백의 분위기를 읽은 위지군이 물었다.
“팽가에서 재미있는 일을 벌였습니다.”
위지군이 하무백이 건넨 서신을 받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허어. 삼백이라…….”
어이가 없다는 듯한 위지군의 말투와 달리 그는 여전히 평온한 신색으로 빗자루질에 열중하는 듯 보였다.
하무백은 단지 그 곁에 서 있는 것으로 보였다.
허나 그 둘 주변으로 이미 기막이 둘러쳐져 소리가 차단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일하면서 온갖 강호의 소문을 다 들었지. 일꾼들이 생각보다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더구나. 청란도에서 지낸 동안 정말로 강호가 어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까막눈이었어. 끌끌.”
작은 웃음을 흘린 위지군. 이어서 본론을 말했다.
“그중 한 소영웅의 전설을 들었다. 융중산에서 혈교 정예무사 이백을 홀로 괴멸시키고 장렬히 산화했다던가?”
융중혈투에 대해 정천맹에서 강호인들에게 흘린 소문이었다.
적당한 사실에, 적당한 과장.
그리고 소영웅의 장렬한 전사는 강호인들의 가슴 속에 웅심을 지피기에 좋은 소재였으니.
“적당히 양념을 쳐서 정천맹에서 퍼트린 소문이지요.”
“너였던 게냐?”
“네.”
“흘흘. 그 피 냄새가 그리 네 몸에 배어든 게로구나.”
“면목 없습니다.”
“네 잘못이더냐. 세상의 잘못인 것을. 당시 네 가슴 속에 자리한 분노와 울분이 어느 정도인지 내가 잘 아는 것을.”
위지군은 허허로이 답했다.
“팽가에서도 그게 너라는 것을 알고 있구나.”
“오대세가는 정천맹의 핵심 일원이니까요. 맹의 고위층 중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그저 보통의 강호인들이 모를 뿐.”
“그런 것치고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던데?”
“자세히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치들 입장에서는요. 융중산은 제갈세가의 본거지였으니까요.”
그랬다.
당시 혈교의 정예, 다르게는 결사대로 봐야 할 이백의 무사들은 정천맹의 전략전술과 지략을 담당하는 제갈세가를 괴멸시키기 위해 성동격서의 계략을 펼쳐서 비어 있는 제갈세가의 본가를 노리고 진격하던 이들이다.
제갈세가는 그런 혈교의 계략에 완벽히 속았었고, 다급히 지원부대를 보냈으나 시간에 맞춰 도착한 이가 하무백 혼자였다.
다른 이들은 그보다 사흘 늦게 당도했고, 그 사흘 동안 하무백은 홀로 혈교 결사대 이백을 전멸시켰다.
그 후 하무백을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그를 신격화하며 진정한 영웅으로 대했지만, 다수는 아니었다.
그 전투는 정천맹의 공식적인 기록에 남지 않았다. 그저 제갈세가의 입김이 들어간 대로 정천맹에서 가공한 소문이 강호에 퍼졌을 뿐.
이름 없이 산화한 영웅.
그것이 하무백이었다.
제갈세가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막기 위해.
그리된 일이다.
하무백은 그때, 정천맹의 어두운 일면을 보았고, 그래서 소휘웅의 손을 잡았다.
그 결과가 전쟁이 끝난 후 백도회에 의한 좌천인, 교룡관으로의 발령이었고.
“혈교 결사대 이백을 홀로 전멸시켰으니, 삼백의 정예를 데리고 온다라……. 그 숫자야 중요하지 않다만, 네가 걱정이구나.”
“란이가 걱정입니다. 다시 제 몸에서 피 냄새가 나면 그 아이가 무서워하고 걱정할 테니까요.”
하무백이 저어하는 것이 이것이었다.
“어찌할 게냐?”
“그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 뵈러 왔습니다.”
빗자루질을 하는 손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일단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야겠구나.”
위지군의 말에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 냄새가 배는 것이 걱정이면, 피 냄새가 배지 않게 하면 될 게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 네 능력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아…….”
그 말에 하무백이 낮은 탄성을 흘렸다.
전쟁에 얼마나 절여졌으면, 그 간단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오직 그들 전부를 죽일 생각만 했을까.
“아직 몸에 밴 피가 덜 빠진 모양입니다.”
“차차 괜찮아질 게다.”
위지군의 말에 하무백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고 너무 사정을 봐줘서는 안 된다. 그럼 다시 또 올 테니까. 다시는 덤빌 생각을 못 하도록 철저히 박살을 내야겠지.”
“전부 단전을 부숴야겠군요.”
“그리고 적은 양의 피는 어쩔 수 없을 게다.”
그 말에 하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 팽무량.
그를 살려두면 분명 다시금 자신을 노릴 것이다. 아니 그때는 하설란을 노릴지도 모른다. 그는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
다만 그럴 때는, 팽가와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팽도율. 그 친구를 다시 만나 보거라.”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하무백은 자신의 숙소에서 간단한 채비를 하고 빠른 속도로 교룡관을 벗어났다.
‘내가 안일했다.’
우선 대장간에 들러 적당한 활과 화살을 장만하며 하무백은 자책했다.
덤비면 모두 부숴버리면 된다고 단순히 생각했기에, 팽도율의 부탁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토끼 무리가 덤빈다고 호랑이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그런데 아니었다.
토끼와 호랑이가 아니었다.
자신은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래야 하는 것들이 있었으니.
지금 하무백에게는 그것이 바로 여동생, 하설란이다.
그녀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모두 없애버린다는 것만 생각했지, 자신이 그녀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건 미처 생각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팽군호를 곤죽을 만들 때, 설란의 두 눈에 어렸던 것은 자신에 대한 걱정만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사부에게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몸에 피가 너무 진하게 배어있다.
지난 여름 빼낸 것으로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
그 생각을 못 했기에, 덤비면 부수면 된다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다시 몸에 뒤집어쓸 피를 간과한 채.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신경 써야 했다.
‘어렵군.’
생각 그대로였다.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
생각을 정리하며 하무백은 경공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팽도율이 서신으로 팽가 전력의 이동 경로까지 알려줬기에 그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
팽가 무사들의 행렬은 가는 곳마다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그럴 수밖에.
무려 삼백 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이동하는 위압감이 어디 보통이던가.
그런 무리가 개봉에 입성했다.
길 곳곳에 거지들이 눈에 띄었다. 개봉이라는 대도시가 거지가 이리 많은 곳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나 특이한 것은 유독 팽가 무사들 주변에 거지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것도 잔뜩 긴장한 얼굴의 거지들이다.
“쯧. 개방인가?”
개봉의 거지들이라면 당연히 떠오르는 방파다.
구파일방 중 일방.
방도 수의 규모로만 따지면 능히 천하제일방이라 할 만한 곳.
“저, 가주님.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늙수그레한 거지가 조심스레 팽무량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팽무량이 힐끗 그의 허리를 바라보았다.
개방 방도의 지위를 표시하는 새끼줄로 두른 허리끈의 매듭을 확인한 것이다.
여섯 개의 매듭이 보였다.
육결제자였다.
그리 낮지 않은 지위의 개방도였다.
“안내해라.”
팽무량은 거지의 뒤를 따라 개봉의 한 곳으로 갔다.
커다란 움막이 자리한 한적한 곳.
움막의 입구에는 형형한 안광을 흩뿌리고 있는 늙은 거지 하나가 서 있었다.
팔결 제자.
개방의 부방주, 철담개(鐵膽丐)였다.
“오랜만이외다. 철담개.”
“팽가 가주님을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주께서 정천맹에 가 계신지라 제가 맞이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팽가 가주의 응대에 개방의 부방주면 충분히 차고 넘치는 지위였으나, 팽무량의 체면을 생각해 겸손히 말하는 철담개다.
“방주는 내 얼마 전 본맹에 들렀을 때 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말렸지.
하무백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 그 이야기를 하러 개방 방주가 자신을 찾아왔었다.
“어인일로 본인을 뵙자 하셨습니까?”
“아주 누추한 곳이지만 잠시 드시지요.”
철담개가 움막 안을 가리켰다. 팽무량은 순순히 말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움막이지만, 단순한 움막이 아니었다.
개방의 총타였으니.
“이제 본론을 말씀하시지요.”
움막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방, 바닥에 앉은 팽무량이 철담개가 내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돌아가시지요.”
어쩌면 예상했을지도 모를 대답에 팽무량이 인상을 찌푸렸다.
“팽가의 일입니다.”
“그는 교룡관에 없습니다.”
돌아온 말에 팽무량의 얼굴에 작은 당혹이 순간적으로 어렸다가 사라졌다.
“가주께서 팽가를 떠나시던 날부터, 저희 개방의 눈과 귀가 그와 가주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예까지 오는 데 닷새 정도 걸리셨지요? 그제 그가 교룡관에서 사라졌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흐음……. 어디로 간 겁니까?”
“우린 그를 쫓을 능력이 없습니다.”
팽무량이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거량, 도원……. 이 녀석들이.”
마지막까지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녀석들이다. 아마 그놈들이 소식을 알린 건지도 몰랐다.
“하무백, 하무백 하더니 별거 없군요. 우리가 출진한 소식에 꼬리를 말고 도망을 가다니.”
팽무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순간 철담개의 얼굴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스쳤다.
“정녕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어찌 생각해야 하는 겁니까? 설마 그놈이 우리를 찾아오고 있단 말씀입니까?”
그 설마다.
개방에서 수집한 하무백이라는 인간의 정보로 추측한다면 그는 십 할의 확률로 팽무량을 노리고 이동 중일 것이다.
“교룡관에서 사라진 건, 하무백 그 하나뿐인 겁니까?”
“그렇습니다.”
“뭐, 그러면 두 번째 목표는 그대로 있군요.”
어느 정도 회복한 팽군호에게서 하무백의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들은 터다.
이번 출정의 목표는 그들 남매다.
하무백의 목을 따고, 그 여동생은 군호의 첩으로 줄 것이다.
“전력을 다해 말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개방도 맹룡대 이십 조가 새로 구성되고서야 그의 여동생에 대한 정보를 겨우 얻었었다.
그리고 그들이 분석한 결과는, 그녀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존재라는 것이다.
그녀는 하무백의 역린 그 자체라는 결론이었으니.
“차는 잘 마셨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팽무량.
철담개는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 조언을 남겼다.
“부디 산을 조심해서 지나십시오. 가능하다면 산으로 들어가지 마시고. 그러면 전력을 조금은 남기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분 나쁜 조언이었기에 팽무량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대별산이 떠올랐다.
무창으로 들어가려면 어쨌든 산을 넘어야 했고, 자신들이 정한 경로는 대별산을 지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