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알 만하군……
처음 보는 사내다.
그럼에도 팽무량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놈이 하무백이라고.
그러니 그런 사나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씹어 뱉은 것이다.
하무백이 스윽 고개를 들어 팽무량을 응시했다.
“팽가 가주? 팽무량이라고 했던가?”
“으드득. 그렇다. 내가 바로 팽무량이다. 당장 이리 와서 네 놈의 목을 내놓거라!”
도갑을 쥔 손에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꽉 움켜쥐고는 분노를 담아 외쳤다.
하무백은 그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대화는 소용이 없는 상황이니. 저놈 목만 따고 끝내면 될 일이다.
이 정도 피를 손에 묻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무백이 바위에서 몸을 일으켜 땅에 발을 딛었다.
“누구 목? 내 생각에는 네 놈 목일 듯하다만.”
하무백의 담담한 말에 팽무량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으득.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팽무량의 몸에서 기세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분노로 가득한 기운이었다.
그런 둘의 대치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팽도잠이다.
이 자리에서 있는 이들 중 지난 전쟁에서 멀리서나마 하무백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유일한 이.
‘더, 더 무서워진 것 같다…….’
담담히 가주를 바라보고 있는 하무백이 은연중 풍기는 기세.
직접 느낄 수는 없었다.
팽도잠의 수준이 거기에 이르지는 못했으니.
그러나 한 번 본 적이 있기에,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꿀꺽.”
팽도잠은 마른침을 삼켰다.
“뭘, 그리 긴장하나. 이제 날도 밝았고, 여기에는 저놈이 숨을 곳도 없어. 지금까지는 살수 새끼마냥 비겁하게 우리를 공격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야. 저놈은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곁에 있던 폭풍대주가 팽도잠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아니야. 그건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어쩌면 우리가 죽은 목숨이야.’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지만, 도저히 입술을 뗄 수 없었기에 차마 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둔 말이다.
스르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팽무량이 도를 뽑았다.
“검을 뽑게는 해주마. 뽑아라.”
하무백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고.”
“건방진 새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팽무량의 도가 움직였다.
혼원탈백도.
팽가의 가주만이 익히는 팽가 최강의 도법.
하무백은 능운팔영도를 팽가 최고라고 꼽았지만, 기실 혼원탈백도를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맹하면서도 패도적인 움직임은, 과연 철혈벽력도보다 한 수 위였다.
거기에 정말로 상대의 혼을 뽑아버릴 듯한 신묘한 변화까지.
도법 자체로만 놓고 보면, 능히 팽가 최고의 도법이라 할만했다.
‘다만 익힌 이가 문제지.’
그럼에도 하무백은 여전히 팽거량의 능운팔영도가 팽가 최고의 도법이라 생각했다.
이 정도의 도법이라면 팽거량이 충분히 압도할 수 있을 테니.
해서 하무백은 검을 뽑지 않고 그대로 팽무량의 도격 속으로 몸을 날렸다.
살벌한 기세와 강기를 뿌리며 온 몸 곳곳을 노리고 날아드는 도였지만, 하무백은 너무나 태연하게 그것들을 피했다.
쾅!
가끔은 주먹으로 도면을 후려쳤는데, 요란한 폭음이 터지기도 했다.
고작 삼 초를 주고받았을 뿐인데, 하무백은 팽무량의 도가 가진 간격을 뚫고 자신의 주먹의 간격 안에 팽무량을 두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우선 단전부터.’
하무백의 왼주먹이 그대로 팽무량의 단전으로 날아들었다.
“으윽.”
혹시 이놈이 단전을 노리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집요하게 팽가 무인들의 단전만을 노렸으니까.
그 덕이었다.
가까스로 도를 움직여 하무백의 왼주먹을 비껴내고 땅을 굴렀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날아온 주먹에 단전이 박살 날 것 같았기에.
그렇게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며 굴러, 간격을 벌렸다.
놈의 간격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놈…….”
팽무량이 사나운 눈으로 하무백을 노려보았으나, 흙먼지를 뒤집어쓴 몰골로는 그 어떤 위압감도 주지 못했다.
하무백은 여전히 담담한 신색으로 팽무량을 보고 있었다.
“제법이군. 예상외야. 이번 한 수로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이익.”
하무백의 작은 중얼거림에 팽무량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게 물들었다.
‘강하다. 정말로…….’
그런 안색과는 반대로 팽무량의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한 번 상대하고 낭패를 겪었기에,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해야 했다.
불과 삼 초식만에 자신이 끝장날 뻔했으니.
“어디 이번에도 그 잘난 입으로 마음대로 지껄여 보거라.”
팽무량은 다시 도를 들었다.
“후읍.”
깊은 호흡을 삼키고.
내공의 운용을 바꿨다.
혼원류하.
혼원탈백도를 운용하는 내공심법을 바꿨다.
그걸로 팽무량의 기세가 삽시간에 확 바뀌었다.
주변으로 스멀스멀 뻗어가는 음산한 기운.
은은히 붉게 물든 두 눈.
강기의 빛깔에까지 은은한 붉은 빛이 덧입혀졌다.
그 모습에 하무백이 인상을 찡그렸다.
상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놈!”
커다란 외침과 함께 휘두르는 도.
하무백이 움찔하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스윽.
앞섭이 살짝 잘렸다.
도기가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변화, 위력이었다.
그랬기에 하무백이 미처 완전히 피하지 못한 것이다.
두 도격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기에.
“뭐지? 네 놈?”
하무백의 스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 팽무량이 보인 변화.
본 적이 있었다.
아니, 질리도록 보았다.
그랬기에 하무백의 몸에서 서릿발 같은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와 주변을 장악했다.
“으윽…….”
팽가의 무사들은 그 기운만으로 내부가 진탕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팽무량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오연한 얼굴로 다시 도를 움직일 뿐이다.
그렇게 펼쳐지는 혼원탈백도.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도법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압살할 듯한 패도의 극에 이른 강맹한 도격.
챙!
하무백은 결국 검을 뽑아서 상대의 도를 쳐냈고, 뒤로 주륵 밀렸다.
“크하하. 고작 그 정도더냐? 건방진 새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목을 따주마. 아니, 아니지. 목을 따는 걸로는 성에 안 차. 사지를 자르고 얼굴을 짓이겨 주마. 그리고 네 놈의 동생 년을 군호의 첩으로 던져주마. 군호가 그년을 어찌 유린하는지 그 몰골로 똑똑히 지켜보거라. 크하하하!”
팽가의 무사들마저 눈살을 찌푸릴 패륜적인 이야기다.
그 말에 하무백이 싱긋 웃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깊디깊은 살기가 담긴 웃음이다.
“역시. 확인할 필요도 없겠군. 네 놈이 지껄이는 말을 보면.”
성정에마저 영향을 미치는 내공.
하무백은 그런 무공을 아주 잘 알고, 정말 욕이 나오도록 겪었다.
하무백의 몸에서 묵빛 강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눈은 반대로 투명하게 빛났다.
무극명륜안을 운용한 것이다.
상대의 내공의 연원과 그 움직임을 읽어내는, 그야말로 사기 같은 무공.
해서 하무백도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무공이다.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부담도 제법 있었기에.
최근에 마지막으로 사용한 것이 칠 조 생도 다섯을 처음 만났을 때, 순간적으로 사용한 것이 전부였으니.
그럼에도 이번에는 사용해야 했다. 자신이 확신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 했으니.
역시나 짐작대로 선명히 보이는 붉은 내공이 단전에 똬리를 틀고 자리하고 있었다.
두 눈에서 투명한 빛이 사라지고 하무백이 팽무량을 보며 물었다.
“너. 혼원류하라는 심법을 익혔나?”
“네, 네 놈이 어떻게…….”
그 말에 팽무량이 깜짝 놀랐다. 자신만의 비밀이거늘, 그것을 어찌 저놈이 알고 있단 말인가.
“하아. 알 만하군…….”
하무백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무얼 알만하다는 게냐! 곱게 나의 도에 사지를 내놓거라!”
팽무량이 폭발적인 기운을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그의 도격이 떨어질 때마다 땅이 떨리고 하늘이 울렸다.
그럼에도 하무백은 앞섭을 내줬을 때와 달리 여유있게 그것들을 상대했다.
묵빛 강기를 머금은 검은 팽무량의 도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하무백의 얼굴은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마냥 차갑게 변해 있었다.
이 빌어먹을 무공을 또 상대하다니.
펼쳐지는 도법은 혼원탈백도였으나, 그 근본이 되는 내공은 혼원류하.
하니 정확한 명칭은 혼돈혈하멸공(混沌血河衊功).
혈교의 비전 심법이자, 음모가 숨어 있는 심법이다. 그 음모 때문에 멸공이다.
질리도록 상대했기에, 어찌 상대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만에 상대하거늘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할 정도다.
팽무량은 자신이 혼원탈백도를 극성에 가까운 위력으로 펼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터다.
사실은 그게 아니다.
혼돈혈하멸공이 혼원탈백도를 잡아 먹은 거다. 멸공의 움직임이 혼원탈백도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혼돈혈하멸공을 기반으로 펼치는 무공들은 그 특유의 경로가 있었다.
하무백은 그 경로를 눈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서걱.
묵빛 강기의 검이 움직였고, 팽무량의 오른팔이 잘려 뚝 떨어졌다.
“크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팽무율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흡사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비명이다.
하무백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서걱.
이번에는 왼팔이 떨어졌다.
“아악!”
계속해서 움직이는 검은 팽무량 두 발목의 근맥을 그대로 잘라 버렸다.
“커어억.”
발목에 힘을 줄 수가 없었기에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가, 양팔이 없어 균형을 잡을 수 없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양팔에서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가, 가주님!!”
“네 이놈!”
순식간에 끝난 결과에 팽가의 무사들이 몸을 날려 달려들었다.
하무백의 검이 무심히 움직였다.
“큭.”
“아악.”
“으악.”
비명이 터지는 수만큼의 단전이 터졌다.
그들은 힘없는 얼굴로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이는 하무백, 그리고 팽도잠.
단둘이었다.
“안 덤비나?”
하무백이 슬쩍 보고는 물었다.
팽도잠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누구인 줄 아는데, 헛된 부나방이 될 수는 없지요.”
팽도잠의 대답에 하무백이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군.”
“기억하고 있구려.”
“전우는 가급적 기억하려 하는 편이라.”
하무백이 짤막하게 답하고는 팽무량에게 다가갔다.
“가, 가주를 살려 주시오!”
그 모습에 하무백이 팽무량의 목을 베려는 것으로 오해한 팽도잠이 다급히 외쳤다.
“안 죽여. 살려야지. 반드시. 단전도 그대로 둬야 하고.”
그리 말하며 양어깨의 혈을 짚어 지혈을 하는 하무백.
“그게 무슨…….”
예상치 못한 대답에 팽도잠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니네 가주. 괴물이 되려고 했더군. 이제야 발견된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크으윽. 네, 네 이놈…….”
고통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하무백을 노려보는 팽무량.
“십 성 정도지?”
하무백의 물음에 고통에 겨운 중에도 팽무량은 두 눈을 부릅떴다.
어찌 자신의 성취를 저리 정확히 짚어낸단 말인가.
십 성을 이룬 것도 고작 얼마 전이거늘.
“후우. 무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십 년 동안 겨우 십 성이라. 그런데 또 속성법을 택하지 않고 우직하고 구결대로 수련을 했다라. 쯧.”
하무백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팽무량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런 하무백을 노려보았다. 양어깨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린 채로.
하무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팽무량이 타고 왔던 말이 그대로 있었다.
팽무량의 내공에 금제까지 가한 하무백은 그를 말 등에 올리고 대강 묶었다.
“정천맹에 연락할 수단이 있소?”
하무백의 물음에 팽도잠은 고개를 저었다. 전서응은커녕 전서구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 대답에 잠시 주변을 살피던 하무백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