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55화 (55/312)

55화. 그게 팽가를 살렸소

“허, 거참…….”

하무백의 외침에 늙은 거지 하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걸어 나왔다.

그를 본 팽도잠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넨 여전하구만. 그래. 하하하. 뭐, 자네 이목을 속이고 숨어 있는 게 가능할 거란 생각은 안 했네.”

거지는 하무백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팽도잠은 의구심을 가졌다. 전에 만났을 때 보여주었던 형형한 안광은 어디 가고, 그저 사람 좋은 눈웃음만 짓고 있단 말인가.

“오랜만이요. 철담개.”

“그러게나 말일세. 그런데 자네라면 나였다는 거 알고 있지 않았나? 그냥 처음부터 날 부르지, 뭘 거지라 부르고 그러나.”

“그럼 다른 이들은 거지가 아닌가 보오?”

“아, 하하, 아니네. 거지 맞네. 거지 맞아.”

개방 부방주인 철담개.

팽무량이 개봉을 다녀간 뒤,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그가 직접 따라붙었다.

무려 하무백과 싸우러 간다는데, 그의 근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했다.

수하 열을 대동하고 따라붙어서 조금 전 믿지 못할 광경을 목도했다.

그럼에도 그 어떤 수하도 보내지 못했다.

하무백이 바로 자신들을 찾았기 때문이다.

거지라는 말에 발끈해서 혈기왕성한 수하 놈이 뛰쳐나갈까봐 자신이 제일 먼저 튀어나온 것이고.

“개봉부터 따라붙었소?”

“역시나. 자네는 이 치들의 경로를 알고 있었구만.”

철담개가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말에 팽도잠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자신들의 움직임은 팽가에서도 극비였다. 하무백이 미리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우려였는지는 조금 전까지 치가 떨리도록 겪었지만.

“그게 팽가를 살렸소.”

하무백의 대답에 철담개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그렇게 되었구만.”

“당연히 전부 보았겠지?”

철담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봐도 정말 살 떨리게 강한 인간이다.

간밤에 그 화살을 쏴댈 때, 혹시라도 자신들이 맞을까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던가. 해서 멀리서 천천히 쫓았다.

그러나 역시나 하무백은 하무백.

철저히 팽가의 무사들만 골라서 공격했다. 어떻게 그런 구분이 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보여준 팽무량과의 결투.

결투라기에는 너무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이미 예상했지만.

그보다 예상 밖의 일은 팽무량의 무공이었다.

설마 그 저주받은 무공을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러면 나머지 일은 철담개께서 알아서 해주실 거라 믿고 난 이놈을 끌고 팽가로 가겠소.”

“나도 함께 가도 되겠나?”

철담개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음대로.”

철담개가 어떤 인물인지 하무백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지난 전쟁의 전우였으니까.

철담개라는 이름과는 정반대로 담이 정말 콩알만큼 작은 이였다.

오히려 그 덕에 생존해 중요한 정보를 여러 번 알려왔었다.

그의 경험과 연륜이라면, 자신을 따라와도 별문제 없을 것을 알기에 하무백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 사이 철담개는 전음으로 수하들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렸다.

그의 전음이 끝나는 순간 네 마리의 전서응과 네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올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그럼 가지.”

하무백은 곧장 말을 끌고 걸음을 옮겼다. 팽가의 무사들이 올라왔던 길이다.

밤새 하무백이 화살을 쏘고, 비수를 던졌던 그 길.

단전이 파괴된 채, 바닥에 쓰러진 팽가의 무인들은 그런 하무백의 등을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팽도잠은 잠시 망설이다가 하무백의 뒤를 따랐다. 팽가로 간다고 했으니, 어쨌든 팽가의 무인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그들이 떠난 자리, 거지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쯧쯧. 그러게, 우리 부방주님이 조심 좀 하라 하지 않았나.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오.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소이다.”

개방 방도의 위로가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살았으면 뭐 하는가, 이제 더 이상 무인이 아닌 것을.

세상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한 팽가 무사들 사이를 개방 방도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철담개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하무백의 일행은 총 다섯 명이었다.

하무백과, 팽무량, 팽도잠, 철담개 그리고 젊은 거지 하나였다.

하무백은 그 거지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에 젊은 거지는 조금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얼굴이 붉게 변했다.

철담개는 그런 젊은 거지의 뒤통수를 툭툭 두드렸다.

[주제도 모르고 깝치지 말거라.]

그리고 이어진 전음.

그 전음은 젊은 거지의 얼굴을 더욱 붉게 만들었지만,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철담개의 주먹 덕에 젊은 거지는 화를 억누를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실력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대개방을 저리 무시하다니…….’

자신이 무시당한 것에 대한 화였으나, 그것을 개방이 무시당했다고 여기는 젊은 거지였다.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하무백을 노려보았다. 하무백이라면 그 시선을 모를 리 없었다.

“철담개.”

묵묵히 걷던 하무백의 입이 열렸다.

“왜 그러는가?”

“개방은 여전히 후개 뽑는 데는 영 재주가 없나 보오.”

하무백의 말에 철담개는 그저 허허거리고 웃으며 시선을 먼 산을 향해 돌렸으나.

젊은 거지는 아니었다.

얼굴이 붉다 못해 당장이라도 터질 듯했다.

“뭐, 너무 그러지 말게나.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 그러네. 그래도 의협심만큼은 우리 개방도 중에서 최고인 친구네.”

후개.

다른 문파로 치면 소문주의 지위에 해당하는 개방의 직위였다.

다음 대 방주로 내정된 거지.

그것이 후개다.

때문에 허리끈도 부방주와 같은 팔결이다. 다만 평소에는 아무런 매듭도 없는 허리끈을 매고 다니다가, 공식적으로 후개의 직위로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만 팔결을 맨다.

지금 젊은 거지의 허리끈에도 아무런 매듭이 없었다.

“의협심이라……. 그 의협심 덕에 셋이나 먼저 갔지. 뭐, 그중에는 젊은 꼰대 같은 친구도 있었고.”

하무백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지난 두 번의 전쟁에서 개방은 큰 피해를 입었다. 정파 무림의 정보통 역할을 하는 방파였기에, 적들이 거지만 보이면 집요하게 노렸기 때문이다.

그때, 개방의 후개 셋이 죽었다.

후개가 죽어서, 차기 후개를 세우면 또 죽고, 다시 세웠는데 또 죽고.

개방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의협심이 강한 이들이 후개가 되다 보니, 숙여야 할 때 숙이지 않았다가 죽은 것이다.

그중 하나는 하무백이 말한 대로, 개방에 대한 자부심이 과해서 흔히 꼰대라 불릴 짓을 하다가 명을 달리했다.

“허허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후개의 뒷목을 꽉 잡은 철담개는 그저 웃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왠지 꼰대 같은 친구 같소이다.”

막 발작하려는 후개의 아혈을 철담개가 잽싸게 점했다.

“철담개. 난 말이오. 오히려 철담개 같은 이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오.”

하무백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았다.

철담개.

그는 지금 담뿐 아니라, 간마저 콩알만 해졌다.

이 빌어먹을 후개 놈이 주제도 모르고 하무백에게 덤볐다가, 팽가 꼴이 나지 말란 법이 없으니.

아무래도 오늘 밤, 단단히 정신 교육을 좀 해둬야 할 것 같았다.

***

개방을 통한 급보가 정천맹의 맹주전과 장로원에 전해졌다.

그야말로 급보였다. 정천맹이 당장 뒤집어질 정도로.

즉시, 맹주와 장로들이 모인 회의가 개최되었다.

“허어……. 이 무슨 참담한 일이…….”

누군가의 한숨에 한 명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팽무린이었다.

팽가의 가주가 그 무공을 익혔다니.

팽가 대표로 정천맹의 장로직에 있는 그가 고개를 들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지난번, 그가 그리도 폭급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그 멸공의 영향인 모양입니다.”

하무백의 목을 따야겠다고, 정천맹에서 난리를 치고 간 것이 얼마 전이다.

당연히 다들 그때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정말 그런 거 잘도 찾아내는군.”

호북연가의 가주, 연자경이 담담히 말하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장로의 말씀대로 지난 전쟁 때부터 그는 정말 그 저주받은 멸공을 잘도 찾아냈지요.”

아미파의 정유사태가 맞장구를 쳤다.

“자,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팽 가주의 성취가 어느 정도인가 그것이지요.”

화산의 선청우가 주변을 환기시켰다.

“갓 십 성이 되었다고 하는군요.”

맹주 소휘웅이 담담히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불행 중 다행입니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개방에서 보낸 전서의 내용에 다 있는 내용이었지만, 급박히 소집된 회의인지라 장로들 모두가 그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탓이다.

“십 성이면, 저주받을 멸공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이니까요.”

“단전을 파괴하면 될 일이지요. 단전은 파괴했답니까?”

선청우의 물음에 소휘웅이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가 팽가와 얽힌 일이 있다보니, 일단 그걸 해결할 요량인 모양입니다. 금제만 가한 채 팽가로 향한다는군요.”

소휘웅의 대답에 각양각색의 반응이 나왔다.

“쯧. 그러다가 십이 성에 도달해서, 멸공이 본색을 드러내면 어쩌려고.”

연자경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혈교의 암혈강시라면 질리도록 상대한 게 그 친구입니다. 잘 대처할 겁니다.”

소휘웅이 웃음 띤 얼굴로 하무백을 두둔했다. 그 내심 깊숙한 곳은 연자경에 대한 짜증이 가득했다.

백도회의 세 수장 중 한 명이 바로 연자경이다. 정천맹 장로의 대장로이자 서열 3위.

사사건건 자신의 일에 훼방을 놓는 것이 바로 그였다.

하무백을 교룡관으로 보내는데 가장 큰 입김을 가한 것이 그이기도 했고.

혼돈혈하멸공.

혈교에서 정파 무림에 은밀히 뿌린 그 심법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강시의 제조였다.

혼돈혈하혈공이 십이성 극성에 이르면, 단전과 내공이 혈교 비전의 암혈강시 제조에 꼭 맞게 변한다.

그러면 그 내공이 본인의 의지를 벗어나 움직여 이지를 제압하고, 혼돈혈하멸공을 익힌 자를 강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익힌 자를 멸한다고 하여, 멸공인 것이다.

그런 목적의 무공이기에, 혼원류하라는 그럴듯한 이름에, 정순하고 대단한 위력의 심법으로 위장하고 있다.

그 본색을 조금씩 드러내는 것이 구 성에 이르렀을 때부터다.

그때부터 조금씩 성정이 폭급해지며, 혼돈혈하멸공의 내공이 익힌 자의 무공에 은연중 간섭을 시작한다.

많은 이들을 빨리 암혈강시로 만들기 위해, 혼돈혈하멸공은 군데군데 속성이 가능하게끔 단서를 만들어 두었다.

무재가 있는 이들이라면, 그 부분을 발견하여, 더욱 빨리 익히고, 더욱 빨리 강시가 되는 것이다.

혼원류하의 엄청난 위력에 빠져들어 속성의 길을 밟으면 그대로 십이성 대성을 이루어 강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암혈강시는 지난 전쟁에서 정천맹에게 큰 우환 거리였다.

명문정파 내부에서 존경받는 고수가 갑자기 강시가 되어 본인의 사문을 박살을 내고 있으니.

정말 다시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 멸공이요, 강시였다.

게다가 암혈강시는 묵철강시와 함께 혈교에서 만들어낸 강시들 중 가장 끔찍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 기억을 떠올린 장로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허면, 팽가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연자경의 물음이 팽무린을 향해 날아갔다.

팽무린이 몸을 잘게 떨었다.

가주가 그 꼴이 되었으니, 팽가의 입장을 낼 상황이 아니다.

자신 역시 조금 전에야 그 사실을 전해 들었다. 팽가에도 이 사건이 전해졌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본가에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해…….”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언짢은 시선이 여기저기서 날아와 팽무린에게로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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