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56화 (56/312)

56화. 왔는가?

“다 왔군.”

하무백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팽무량은 자신이 타고 왔던 말이 끄는 수레에 실려 거적떼기로 덮혀있었다.

말 등에 싣고 움직이면 여기저기서 시선을 끌 게 자명했기에 하무백이 취한 조치다.

멀리 팽가의 담장과 정문이 보였다.

“철담개. 일은 제대로 한 모양이네.”

하무백이 기감으로 담장 너머 팽가의 분위기를 느끼고는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철담개는 가슴을 당당히 폈다. 나의 능력이 어떠냐는 듯이.

후개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눈으로 하무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그 눈빛이 많이 누그러졌다.

밤마다 진행된 철담개의 면담 덕이다.

면담이라기에는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어쨌든 후개는 이제 하무백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인간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전히 믿지를 못하지만, 처음처럼 감히 덤비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역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멸공으로 강해진 팽가 가주의 양팔을 자르고 양 발목의 근맥을 끊어 버리는 모습을.

그것을 정말 어린 아이 팔 비틀 듯 간단히 해냈다.

사실 후개는 그 움직임을 전부 쫓지 못했다.

한순간 분노로 그 사실을 까맣게 있었지만, 철담개가 면담 좀 하자며 그것을 일깨웠을 때는 눈앞이 깜깜해졌었다.

자신이 어떤 미친 짓을 하려 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 뒤로 제법 고분고분해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개방의 부방주인 철담개를 저리 막 대하는 하무백을 볼 때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지, 질풍대주님!”

그때 정문의 수문위사가 팽도잠을 발견하고 달려오며 외쳤다.

다른 한 명은 재빨리 팽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대,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가, 가주님은요? 어찌 혼자 돌아오셨습니까?”

팽도잠은 수하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

팽도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철담개와 후개를 발견하고 이어서 가주가 타고 갔던 말이 매여진 수레도 보았다.

마지막으로 하무백에게 그의 시선이 멈췄다.

그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이미 팽가 내에 소문이 파다했다.

개방에서 사람이 다녀간 뒤의 일이다.

개방의 사람과 함께 나타난 이 사람, 그리고 가주님의 애마.

그는 직감할 수 있었다.

가문에 도는 소문이 사실임을.

“왔는가?”

그때 걸어 나온 이가 있었다.

아버지를 말리기 위해 팽가로 왔던 교룡관주 팽도율이다.

그는 여전히 팽가에 머물고 있었다.

팽도잠이 도착했다는 급보에, 팽가에서 하무백과 그나마 자주 마주쳤던 그가 가장 먼저 나온 것이다.

그 뒤로 팽거량과 팽도원이 따랐다.

“덕분에 수월했소. 관주. 헌데 아직 팽가에 있을 줄은 몰랐소이다.”

덕분에 수월했다.

그 말에 팽도잠이 흠칫 몸을 떨었다.

무엇이 수월했던 것인지 아는 탓이다. 직접 보고 겪었으니.

하무백이 팽가의 이동 경로를 알았던 근원이 눈앞에 있는 자신의 육촌. 팽도율이었던 것이다.

배신자인가?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그 덕에 팽가가 살아남은 건지도 모른다.

팽가로 오는 동안 지루했던지, 철담개가 가주가 익힌 무공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팽도잠과 후개는 그 이야기에 집중했었다.

수레에 실려 오는 가주 역시 귀가 열려있고 정신이 깨어있었기에 그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멸공.

지난 혈교와의 전쟁에서 명문 정파를 처참히 무너뜨렸던 암혈강시.

멀쩡한 사람을 그런 암혈강시로 만드는 무공이 세상에 존재했다니.

그리고 그것을 팽가 가주가 익혔다니.

지난 전쟁에 참전했던 팽도잠도 미처 몰랐던 이야기다.

팽도잠은 그저 혈교가 간악한 수로 정파의 고수를 암혈강시로 만들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지난 두 번의 전쟁. 그에 대한 정보의 비대칭이 심했다.

정천맹에서도 고위층들만이 모든 정보를 틀어쥐고 있었다.

그 여파가 지금 나타난 것이다.

혼원류하.

혼돈혈하멸공이 위장한 무공의 이름을 알아냈을 때, 정천맹은 그 이름을 숨겼다.

이유는 그럴듯했다.

일부러 그 무공을 찾아 익히려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십 성까지만 익히면, 성격이 폭급해지는 정도의 부작용만 있을 뿐, 강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압도적은 위력의 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탐욕에 눈이 먼 이들이 그 생각을 하고 일부러 혼돈혈하멸공을 찾아 익힐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때문에 혼원류하라는 이름은 소수의 핵심층만이 알고 있었다.

팽거율도 몰랐다.

해서, 혼원류하의 존재를 밝혀내고, 각 명문정파에 혹시라도 은밀히 퍼져 있을 그 무공을 찾는 수색도 소수의 인원들에 의해 행해졌다.

팽가 역시 그 수색을 받았다.

허나, 그 때는 이미 팽무량이 혼원류하를 챙겨 폐관에 들었을 때였다.

폐관에 든 가주를 끌어낼 수도 없는 일.

그렇게 팽무량은 혼원류하를 익힐 수 있었다.

혼원류하를 익히겠다고, 본가에 칩거한 팽무량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혼돈혈하멸공이라는 것이 암혈강시를 만들어낸다는 정보는 얻었지만, 그것이 혼원류하라는 것은 몰랐다.

팽무린은 장로원에서 그 정보에 접할 수 있었지만, 본가에서 설마 가주가 그것을 익히고 있을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수색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니.

철담개는 팽도잠과 후개에게 혼돈혈하멸공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도, 그것이 혼원류하라는 다른 이름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은 숨겼다.

여전히 정천맹의 결정은 혼원류하라는 이름을 알리지 않는다는 것이었기에.

팽무량 역시 입을 꾹 닫고, 자신이 익힌 것은 혼돈혈하멸공이 아니라, 혼원류하라고 항변하지도 않았다. 멸공의 저주를 이미 몸으로 겪고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주께서는 저곳에 계신 건가?”

팽도율이 수레를 보며 물었다. 하무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팽도율이 다가가 거적을 슬쩍 들췄다.

일그러진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양팔이 사라진 채, 누워있는 그 몰골을 보고 있자니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아버님……. 어쩌자고 그 멸공을 익히셨습니까?”

한탄과도 같은 말이다.

팽무량의 얼굴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팽도원과 팽거량이 천천히 다가왔다.

“오랜만이구만.”

팽거량이 어두운 얼굴로 하무백을 보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하무백이 담담히 그 인사를 받았다. 그런 하무백의 행동에 팽도율이 깜짝 놀라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그를 보아오면서, 그가 저렇게 예의를 다해 인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뭘 그리 놀라는 게냐. 나름 함께 생사의 위기를 넘은 사이다.”

팽거량이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팽가의 소가주인 팽도원이라 합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도록 하지요.”

팽도원의 안내에 따라 하무백은 팽가에 들어갔다.

팽무량은 팽가의 무사들이 어디론가 데리고 갔으나 하무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금제를 풀 수 있는 이가 이곳에 없을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으니.

게다가 팽가는 지금 거의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삼백의 무사들이 모두 단전이 파괴되었으니.

더 이상 오대세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소가주의 집무실에 자리가 마련되었다.

“먼저 저희 가주님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되신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사정을 보아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팽도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무백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보다는 비급부터 찾아서 폐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가주라는 직책을 가진 상대에게 하무백은 예의를 갖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 저주받은 멸공이 팽가에 있었다니……. 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분명 지난 전쟁 때, 정천맹의 조사단이 다녀갔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때는 팽도원은 팽가에 없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한창 전투에 임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조사단이 조사하지 못한 곳이 어딥니까?”

“가주의 폐관수련실일세. 내 미리 알아보았네.”

대답은 팽도율에게서 들렸다.

“그곳에는?”

“없었네.”

이어진 하무백의 물음에 답한 것은 철담개다. 이미 개방의 방도들이 조사를 마치고 보고한 것이다.

철담개는 이곳으로 이동하는 사이, 정천맹으로부터 팽가에 대한 조사 권한을 부여받았다.

정천맹으로서는 따로 조사단을 파견하는 것보다는 하무백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철담개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효율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철담개가 가장 먼저 지시한 일이 구 년 전의 조사에서 빠트린 부분에 대한 조사였다.

“흐음…….”

하무백이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가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는가?”

철담개가 물었다.

“팽가비고에 가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이 하나 있습니다.”

팽도율이 바로 답했다.

“그럼 그곳부터 뒤져야겠군.”

철담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팽도율의 말에 철담개가 인상을 찡그렸다.

“조사를 거부하겠다는 겐가?”

“아닙니다. 열쇠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가신 거라 생각을 했는데……. 조금 전 전해온 소식으로는 아버지께서도 가지고 계시지 않는군요.”

“부수면 될 일이오.”

하무백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열쇠가 없다는 것에 진한 의심이 들었다.

“그게……. 기관으로 연결되어, 팽가비고 전체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팽도원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끄응.”

철담개가 신음을 흘렸다.

혼원류하의 비급을 폐기하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한 세가의 비고 전체를 박살낼 수는 없었다.

“안전하게 하려면 비고를 일단 비워야겠구먼.”

철담개가 낭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최소 두 달은 걸릴 거 같습니다.”

팽도율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비고를 비울 때 걸릴 시간을 계산해 두었다.

팽가의 전 인원을 동원했을 때 두 달이다.

“일단 한 번 봅시다.”

하무백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가장 앞장서 나가는 하무백.

팽도율이 황급히 움직여 그 앞에서 길을 이끌었다.

팽가비고 깊숙한 심처.

최심층으로 가는 문 앞에 다들 멈춰 섰다.

굳게 닫힌 채, 꾹 잠겨 있는 문.

열쇠를 가져오라며 아가리를 다물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저 문에 기관으로 비고의 주요 부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잘못 부수면 비고가 그대로 무너지지요.”

팽도원의 설명에 철담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기관의 흔적이 보였다.

그가 기관에 대한 조예는 깊지 않았지만, 그래도 설치 여부는 판별할 수 있었다.

하무백은 물끄러미 문을 바라보았다. 철담개가 확인까지 했으면 그런 거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관과 연결된 취약부를 단번에 베어내, 연결을 끊으면 된다.

다만, 그 정도로 기관에 정통한 이가, 이곳을 조사하고 그 부분을 찾아야 한다.

그게 가능한 이가 있는 곳은.

“만물련이나 당가에 협조를 요청한다면?”

하무백이 혼잣말인 듯, 질문인 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팽도원과 팽도율의 안색이 나빠졌다.

만물련은 신진팔대문파의 일원으로 구파일방, 오대세가와는 사이가 나빴다.

당가는 팽가와 같은 오대세가로, 이런 치부를 보이고 싶지 않을 터.

“맹의 결정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팽도원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만물련이나 당가의 협조.

맹에서 그것을 결정하려면 결국 장로원의 결정이 있어야 하고, 그 결정에 대해 해당 문파에서 답신을 줘야 한다.

결국 비고를 비우는 것과 비슷한 시간이 걸릴 터.

‘어쩔 수 없군.’

결국 하무백은 결정을 내렸다.

말하지 않은 또 다른 방법 하나.

자신이 기관과 문의 연결을 자른다.

기관에 대한 지식은 얕았지만, 그 얕은 지식으로도 가능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

하무백의 두 눈이 투명하게 변했다.

무극명륜안이 발동한 것이다.

하무백은 천천히 문에 다가가 내공을 불어넣었다.

“자네, 뭐 하는…….”

철담개가 막 무어라 하려는 찰나, 하무백이 검을 뽑아 들었다.

무극명륜안은 내공의 움직임을 보는 안공이었기에, 하무백이 본인의 내공을 흘러 넣어 기관을 타고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서걱.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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