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없군
하무백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들 눈을 홉떴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이곳이 풍비박산이 날 테니.
사람들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잠시간 있었다.
조용했다.
그들이 예상했던 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무백은 그런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일별하고는 반으로 쪼개진 문 사이로 들어갔다.
“가, 같이 가세.”
팽도율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고, 이어서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작은 통로를 지나 작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출하지만 정갈하게 잘 정돈된 방이다.
가주가 편안히 책에 집중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한쪽에는 작은 서가가 있어, 몇 권의 비급이 꽂혀 있었다.
서탁 위는 아무것도 없이 깔끔했다.
하무백은 찬찬히 그곳을 살폈다. 함께 들어온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중 철담개의 시선이 가장 날카로웠다.
“없군.”
그의 짤막한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만이 아는 비밀공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여기에는 없어. 후우.”
한숨 섞인 철담개의 말에 다들 동의했다. 그들 정도의 고수에게 이 작은 방을 살피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때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그냥 없는 게 아니야.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그게 맞는 말이지.”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하무백에게로 향했다.
그 말에 철담개가 다시 한번 방을 자세히 살폈다. 그의 시선이 서가에서 멈췄다.
“그렇군…….”
철담개는 하무백이 그리 말한 연유를 알아냈다.
그가 작은 서가로 걸어갔다.
“소가주. 정말 이 방은 오직 가주만이 드나들 수 있었는가?”
철담개의 물음에 팽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도 지금 처음 들어와 봤습니다.”
그 말에 철담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 것 같은데…….”
“어떤 연유로 그러십니까?”
팽도원의 물음에 철담개가 서가의 한 곳을 손으로 짚었다.
“여길 보게나. 서책 한 권이 딱 들어갈 자리가 비어있고, 아래가 깨끗해.”
다른 이들의 시선은 그게 왜? 라는 의문을 담고 있었다.
“다른 자리를 보게나. 먼지가 잔뜩 쌓여 있지. 오랜 세월, 오직 이 자리만 서책을 꽂았다 뺀 흔적이란 거지. 책을 자주 보며 보관한 흔적은 없는데 책은 없다? 누군가가 가져간 것밖에 더 있겠는가?”
“아버님께서 은밀히 챙겨 가신 것은…….”
팽도원의 말에 철담개가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이미 이곳 말고는 샅샅이 수색했네.”
“비밀스레 취급하셨으니, 혹시 가져가신 것은……”
“없었습니다.”
하무백이 짧게 말했다.
그를 제압한 후, 이미 그의 짐을 모두 뒤진 뒤였다.
혼돈혈하멸공을 찾아야 했으니.
없었다.
“흐음…….”
모두의 얼굴에 고민이 내려앉았다.
“일단은 나가도록 합시다. 이곳은 혹시 모르니 더 조사해 보고.”
철담개는 팽도원의 허락을 구한 후 개방 방도 둘을 불러다 조사를 명했다. 팽가의 무사 둘도 함께였다.
팽도원의 안내로 일행은 팽무량에게로 향했다.
일이 이렇게 된 것, 결국 그의 입에서 비급의 행방을 알아내야 했다.
팽도원이 향하는 곳은 팽가의 의각이었다.
일단 그의 몸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기에 취한 조치인 듯했다.
하무백은 그 뒤를 따르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기감을 넓혀 팽가 곳곳도 살폈다.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뒤를 따르던 하무백이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러는가?”
그와 나란히 걷던 팽거율이 물었다.
“그놈은 어디 있습니까?”
하무백이 팽거율에게 물었다.
“누구 말인가?”
“팽군호.”
하무백에 짧게 답했다.
그가 직접 묵사발을 내놨기에, 그의 기척은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기감으로 팽가를 아무리 살펴도 없었다.
그 꼴이 되고서 말이다.
하무백의 답에 팽거율은 참담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그 놈은 아마 기방에 있을 겁니다.”
대답은 팽도원에게서 들려왔다. 자신의 자식이었기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놈이……. 본래도 개망나니였습니다만, 얼굴이 망가진 후로는 그 도가……. 후우. 운신이 가능해진 후로는 기방에 틀어박혀 본가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봤던 게 아버지께서 본가를 나서실 때로군요.”
하무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이다.
“그 기방이 어딥니까?”
하무백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팽도원의 시선이 함께 움직이던 팽가의 무사에게로 향했다.
“대해루입니다.”
무사가 재빨리 답했다.
북경제일기루라 불린다고 첨언도 했다.
“일단 팽무량에게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하무백의 걸음이 빨라졌다. 팽도원이 재빨리 그 뒤를 따라붙었다.
의각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텐데도, 하무백은 잘도 길을 찾아갔다.
기감으로 팽무량의 위치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소가주인 팽도원에 앞서 의각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걸음을 내디뎠다.
의각 내부의 의원과 가솔들은 하무백의 난입에 깜짝 놀랐으나, 금세 고개를 돌렸다.
하무백이 뿜어내는 살벌한 기세에 기가 질린 것이다.
하무백은 곧장 팽무량이 누워있는 침상으로 향했다.
그의 곁에는 두 사람의 의원이 달라붙어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있었다.
“호사를 누리는군.”
하무백의 말에 눈을 감고 있던 팽무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염라대왕 앞에 가더라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팽군호에게 비급을 줬나?”
차가운 하무백의 목소리. 황급히 뒤따라오던 팽도원이 그 말에 놀라 우뚝 멈춰 섰다.
팽무량 역시 두 눈을 부릅떴다.
“무, 무슨 헛소리냐…….”
팽무량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네 비밀방에 비급이 없었다.”
“그, 그런…….”
팽무량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하무백이 그의 단전을 금제함으로 인해 멸공의 영향력이 거의 사라졌다.
그랬기에 지금은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 그 아이를 말려주게! 제발!!”
양팔이 잘린 상태로 복근의 힘만으로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 팽무량이 간절한 얼굴로 하무백에게 말했다.
그 반응에서 하무백은 그가 의도적으로 팽군호에게 비급을 넘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지를 되찾은 팽무량은 혼원류하가 얼마나 위험한 무공인지 깨달았기에, 절대 자신의 손자가 그것을 익히게 둘 수 없었다.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팽도원이 놀라서 물었다.
“그, 그 아이가 그 방의 열쇠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 어릴 적에 종종 내가 그 방에 데리고 갔으니…….”
그 말에 팽도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도 못 가봤던 그 방을……. 그 아이가 출입한 적이 있었다니.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그 저주받을 멸공의 비급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대해루 위치는?”
하무백이 고개를 돌려 아까 대해루를 알려준 무사에게 물었다.
“어, 저, 그, 그게…….”
그 무사는 순간 당황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하무백이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리고 몸을 훌쩍 날렸다.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치는 그는, 그야말로 바람 그 자체였다.
***
“킥킥킥. 복수한다. 그 빌어먹을 년놈들……. 킥킥킥.”
동경을 바라보던 팽군호가 미친놈처럼 웃음을 흘렸다.
박살이 나서 흐물흐물 흘러내린 한쪽 얼굴.
눈만 겨우 뜰 수 있었다. 코는 완전히 주저앉았고 턱은 박살이 나서 입을 제대로 벌리지 못했다.
자신을 이런 괴물로 만들어놨으니, 복수는 너무도 당연한 일.
할아버지께서 해주신다 했지만, 자신의 손으로 그 년놈들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그러려면 강해져야지. 그딴 놈은 아무것도 아니게 강해져야 해…….”
그런데, 문제는 그 씹어 먹을 놈이 무지막지하게 강하다는 것이다.
현 팽가제일도라는 팽도웅을 아무것도 아닌 듯 가지고 놀 정도로.
팽가의 무공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뜻.
그때 불현듯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6년 전이던가, 7년 전이던가.
팽가비고에 존재하는 가주만의 비밀의 방.
그곳에서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 경세적인 신공을 얻어 수련 중이시라고.
대성만 하면 할아버지가 천하제일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천하제일인이 되면 자신에게 그 신공을 전수해주신다 하셨다.
어린 시절 그 말씀을 하시던 할아버지가 얼마나 멋져 보였던가.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자신의 우상이었다.
“그래……. 경세적인 신공……. 크크크.”
어차피 자신에게 준다고 하셨던 무공이다. 미리 챙긴들 무엇이 문제랴.
팽군호는 그 길로 팽가비고로 향했고, 모처에서 열쇠를 찾아 가주만의 밀실로 향했다.
서가를 뒤질 것도 없었다.
딱 한 권만이 손때가 반들반들하니 묻어 있었으니.
“혼원류하라……. 이름도 그럴듯하군. 크크크. 기다려라 하씨 년놈들. 곧 발기발기 찢어서 씹어 먹어주마.”
비급을 품에 챙긴 팽군호는 그 길로 본가를 나왔다.
단골 기루인 대해루로 향했다.
본가는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
그렇게 대해루의 귀빈실에 처박혀, 동하면 기녀를 품고, 동하지 않으면 비급을 익혔다.
익힐수록 대단한 비급이었다.
게다가 쉬웠다.
이런 경세의 무공이 이렇게 쉬울 수 있다니.
아니, 그러니 경세의 무공이겠지.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순식간에 삼 성의 수준에 올랐다.
절로 기분이 좋았다.
안 해서 그렇지, 사실은 자신은 무공의 천재가 분명했다.
그즈음 기녀들을 통해 한 소문이 들려왔다.
할아버지가 패배한 채로, 놈에게 붙들려 팽가로 오고 있다고 한다.
팽군호는 그 소식에 인상을 찌푸렸다.
기녀들이 어찌 그런 비밀스러운 정보를 알고 있는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릴 뿐이다.
“안 되겠군. 떠나야겠어.”
주머니는 두둑했다.
할아버지가 언제든 필요한 만큼 돈을 꺼내 쓸 수 있게 해주었기에, 주머니가 비었던 적은 없었다.
물론 한도는 있었지만, 지금껏 그 한도에 도달한 적이 없었다.
다시 돈을 챙기는 데도 그랬다.
이 부분은 소가주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아버지고 어쩌지 못한 것이다.
덕분에 대해루 귀빈실에서 이리 지낸 것이지.
팽군호가 떠나기로 마음먹으니, 귀찮은 것이 있었다. 보표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쫓아다니는 세가의 무사 둘.
감시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지만, 혼원류하가 있는 지금은 달랐다.
깊은 밤.
간단히 그 둘의 목을 땄다.
그리고 대해루를 떠났다.
하무백이 팽가에 도착하기 전날의 일이었다.
***
대해루 정문 앞.
목덜미를 잡고 끌고 온 무사를 내려놓은 하무백은 잠시간 대해루를 바라보더니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없군…….”
“헉. 헉. 헉…….”
드디어 땅에 두 발을 디딘 무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이런 경공이 있단 말인가.
팽가 정예 삼백 명의 단전을 깨부쉈다고 들었는데, 과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무지막지한 괴물과 싸웠다니, 가주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런 의문이 드는 찰나.
“같이 좀 가세. 뭐가 그리 빠르나…….”
철담개가 도착했다.
과연 개방에서도 가장 빠른 삼인 중 하나라는 그다운 경공이었다.
“어떤가?”
호흡을 고른 철담개가 하무백을 보고 물었다.
“없어.”
짧은 대답에 철담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볼 일이 있을 것 같군.”
하무백이 대해루의 정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