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다시 묻지
단순히 눈만 사납게 빛난 것이 아니다. 하무백의 몸에서 사나운 기세가 은은히 뿜어져 나왔다.
“네 놈들이 그 빌어먹을 멸공을 탐내는 거냐? 네 놈들이 그걸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하무백의 물음.
그러나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네 명의 호법과 영소혜.
그들 모두 하무백의 기세를 버티느라 이를 악물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영소혜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터질 듯 붉게 물들었다.
부릅뜬 눈에는 핏발이 서, 눈가로 피가 조금씩 배어 나왔다.
하무백이 가장 가까이 있는 호법을 향해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다. 하무백과 안면이 있던 둘 중 하나였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무백이 들어온 문을 뚫고 날아갔다.
“헉!”
“무슨!”
문 앞에 모여 있던 이들은 깜짝 놀랐다.
호법들이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넷이 합심하여 펼쳤던 기막이 부서졌다.
“무슨 일인 겐가?”
철담개가 부서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루주 혼자 있을 곳에 다른 세 노인이 함께 있다니. 그들 중 철담개는 안면이 익은 이를 발견했다.
“역시 그랬구먼. 하오문이라……. 허, 하오문이 이곳에 기루를 낸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들어오면서 어느 정도 예상을 했기에 수하를 보내 확인케 했다.
그 수하가 돌아오기 전에 이렇게 자신의 눈으로 확인을 했지만.
“철담개 어르신. 하오문이라 하셨습니까?”
팽도원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제 아들이 제 집처럼 지내던 곳이 하오문의 사업장이었다니,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이들이 사업장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아는 까닭이다.
제 망나니 아들이 이곳에서 기녀들의 치마폭에 싸여 가문의 기밀을 술술 불었을 가능성이 컸다.
팽가 코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모르고 있었다니.
참담했다.
“이놈들이 아무래도 멸공을 탐하는 듯하군요.”
하무백이 살기 어린 음성으로 철담개에게 말했다.
그 말에 철담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정사를 막론하고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무공이다.
당장, 이번 일로 팽가는 어쩌면 오대세가에서 제외되는 타격을 입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아니 더 이상 세가라 불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강한 무공에 대한 갈망은 하오문의 숙원이었겠지. 그러니 지금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게지.”
철담개의 중얼거림에 하무백은 여전히 영소혜를 노려보고 있었다.
“군호는 어디 있다고 하는가? 하 교관.”
팽도원이 다급히 물었다.
“수신호위를 죽이고 떠났다고 했소.”
돌아온 대답에 팽도원과 팽거율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팽가의 장손이 팽가의 무사를 죽였다니. 놈은 이미 멸공에 판단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팽도원은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제 손으로 제 아들을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못난 놈이지만, 그래도 자식이거늘.
그 자식이 어찌 이런단 말인가.
“크윽.”
문을 뚫고 날아가 벽에 처박힌 호법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무백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살아 있었나?”
그 말에 남은 세 호법과 영소혜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죽이려는 의도였다고 들렸기에.
“다시 묻지. 세 번째 물음에 아직 답하지 않았으니. 팽군호. 어디 있지? 그리고 멸공의 비급은? 이번에도 모른다고 하면 끝이다. 판단 잘해라. 네 놈들이 모른다면 거지들 풀면 그만이다.”
하무백이 말하는 거지들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당장 곁에 개방의 철담개가 있었으니.
“그, 그……. 모, 모른다고! 밤에 술값도 안 내고 야반도주한 놈의 행적을 어떻게 알아!”
영소혜가 악을 쓰듯 외쳤다.
서걱.
그리고 이어진 섬뜩한 절삭음.
“어?”
시원한 듯 화끈한 듯한 느낌에 순간 영소혜의 입에서 의아한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의 목에 붉은 혈선이 나타났고, 그대로 그녀는 자신의 몸을 거꾸로 보았으니까.
“어? 어떻…….”
더 이상 음성도 생각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그대로 절명했다.
그 모습에 남은 세 호법은 두 눈을 부릅떴다.
하오문주의 딸이었다.
하무백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런데도 목을 베는데 아무런 망설임이나 거리낌이 없었다.
“이, 이공녀!!”
호법 하나가 대경하여 외쳤다.
그 외침에 철담개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 자리에 왜 하오문의 호법이 넷이나 있나 했더니.
이공녀라면 하오문주의 둘째 딸이라는 이야기 아니던가.
“자네. 알고 있었나?”
철담개의 물음에 하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
철담개는 낮은 탄성을 흘렸다. 알고서도 저 단호한 손속이라니.
역시나 지난 전쟁에서 보여주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무백! 감히 이공녀를……. 정녕 하오문이 두렵지 않더냐!”
호법 하나가 분노 가득한 일성을 터트렸다.
서걱.
그리고 그의 목이 하무백의 검에 떨어졌다.
남은 이는 둘.
거침없는 하무백의 검에 두 사람은 입을 닫았다. 그리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너희 둘은 아직 대답을 안 했군.”
하무백의 담담한 말.
그러나 그런 담담함과는 달리 진득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입을 떼지도, 그렇다고 닫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하무백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서걱. 서걱.
남은 둘도 그대로 베었다.
“자, 자네.”
하무백의 손속에 철담개를 비롯한 이들은 깜짝 놀랐다.
설마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베어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기 하나 남았소.”
가장 먼저 하무백에게 맞고 날아간 이.
“나름 하오문 이호법(二護法)이지.”
하무백이 그리 말하며 그곳으로 걸어갔다.
“으으…….”
그는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단 한 방이었건만.
“엄살 그만 부리고.”
하무백이 무심히 말했다.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하무백.
“좀 전에 말했지만, 그냥 거지들 풀어도 돼. 난 곧장 장안으로 가면 되고.”
그 말에 이호법의 몸이 경직되었다. 신음 소리도 멎었다.
장안.
하오문의 총타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저놈은 총타의 위치를 안다. 여전히 저놈이 알고 있는 그 위치다.
저놈이 날뛴다면, 하오문의 총타는…….
상상만으로 온몸이 식은땀으로 뒤덮였다.
“이봐. 너희 잘 알고 있지 않나? 내가 혈교 놈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그런데 멸공으로 장난질을 쳐?”
“사, 살려주시오…….”
이호법의 입에서 간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일단 살아야 했다. 살아서 총타에 소식을 전해야 했다.
이공녀의 죽음도. 이 미친놈의 미친 짓도.
“그럼 대답을 해.”
하무백의 말에 이호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쓰러진 채, 고개를 숙였기에 누구도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만, 하무백은 그가 보내는 전음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허튼 수작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하무백은 몸을 돌렸다.
“어, 어딘가?”
철담개가 재빨리 따라붙으며 물었다.
하무백은 아무런 대답 없이 걸음만 옮길 뿐이다.
그렇게 모두가 사라진 후.
살았다는 안도감이 얼굴에 자리한 이호법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걸렸다.
반드시 감춰야 할 사실 하나를 감추는 데 성공했다.
하무백이 팽군호와 비급의 소재에 집중한 덕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끝까지 그 사실을 함구한 덕에 그의 주의가 오롯이 팽군호에게만 집중되었으니.
***
이른 새벽.
“헉!”
하오문주 예초아.
그녀는 끔찍한 악몽에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전쟁이 끝난 이후로 이런 악몽은 처음이었다.
마치 다시 그 전장에 가 있는 듯한 그런 느낌.
“그런 끔찍한 일을 겪지 않으려면, 혜아야. 꼭 성공해야 한다.”
예초아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우린 힘이 필요하단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둘째 딸 영소혜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다.
“하오문은 힘이 없었기에, 지난 전쟁에서 그런 핍박을 받은 게다. 정파와 사파할 것 없이 거대문파 놈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토사구팽.
하오문은 지난 두 번의 전쟁에서 개방과 함께 중원 각지의 정보를 모으고 전달하느라 갖은 고생을 다했다.
혈교와 마교에게 잃은 문도 수만 얼마던가.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것은 없었다.
다시 예전 같은 멸시뿐.
개방은 달랐다.
그들의 이름은 더 찬란히 빛났다.
같은 희생을 치렀으나 결과는 달랐다. 왜 그런 걸까.
“힘이지.”
다시금 그때를 떠올리던 예초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음성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개방은 정파의 명문인 구파일방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단순히 방도 수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능히 다른 문파들과 자웅을 결할 수 있는 무공이 있기 때문이다.
취팔선보, 강룡십팔장, 타구봉법이라는 뛰어난 절기가.
하지만 하오문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소매치기, 도박꾼, 점소이, 기녀, 점쟁이 등 천하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이들이 어찌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으랴.
그런 무공이 있으면 그들이 그리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그런 이들이라도 모여서 세력을 이루고,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으니 강호 무림의 한 자리를 차지할만한 무공을 얻기는 했다.
그게 전부였다.
거대 문파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딱 그 정도였다.
거지놈들은 강력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데, 자신들은 어찌 거지만도 못하단 말인가. 그놈들이 그런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힘이 필요했다.
저주 받은 멸공, 혼돈혈하멸공.
그 멸공을 가지고 있는 방파의 단서를 찾는 일을 하던 곳이 하오문 아니던가.
그랬기에 그 존재와 무서움, 위력에 대해 잘 알았다.
알았기에 지난 전쟁에서는 전력을 다해 단서를 찾아 정천맹과 사해련(邪海聯)에 알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버려진 후 후회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중 하나 정도는 빼돌려야 했다.
그 힘을 연구했어야 했다. 그러면 하오문도 어쩌면 무시 받지 않을 힘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런 후회를 하던 중.
실마리를 팽가에서 찾았다.
팽가의 세력권이었기에 지부나 분타는 설치하지 못했으나, 기녀나 점소이들은 몇몇 팽가 근처에 보내놓았던 터다.
거대문파들의 동향은 파악했어야 했으니.
그러던 중, 팽가의 장손이라는 팽군호가 술에 취해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것을 마침 하오문의 기녀가 들은 것이다.
그 내용이 보고로 올라왔고, 예초아는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혼돈혈하멸공.
그것이 팽가에 있었다.
발견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즉시 지부를 만들었고, 자신의 딸을 보냈다.
그리고 팽군호를 완벽히 구워삶았다.
술 좋아하는 망나니였기에 더욱 쉬웠다. 그런 놈이 갑자기 교룡관에 간다고 했을 때는 아차 싶었으나.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그 이후로 일이 급류에 휩쓸린 듯 진행되어, 팽무율이 혼돈혈하멸공을 천하에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비급은.
필사되어 이곳으로 오는 중일 게다.
팽군호가 비급을 팽가에서 가지고서는 대해루의 귀빈실로 왔으니까.
멍청한 놈답게 기녀를 품고 잠들 때도 그 비급을 아무렇게나 널브러뜨려 놓았다.
호법들이 비밀통로를 통해 그가 비급을 보는 것을 엿봐도 그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필사하고 원본과 확인하고.
혹여나 필사를 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먼저 익힐까, 철저히 부분, 부분 나눴다.
멸공이다.
분석하고 파훼하여, 저주 받은 멸공 부분을 드러낸 후에 익혀야 했다.
그러기 위해 멸공을 연구할 인원은 이미 준비가 된 터다.
“이제 조금이다. 조금.”
예초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려 자신의 딸에 호법 다섯을 보낸 일이다. 호법 다섯이 간 것은 딸조차 모르는 일.
이런 일이 실패할 리 없었다.
반드시 성공한다.
그러하니 힘이 없어 하오문이 겪은 설움, 그것에서 벗어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
전서응 한 마리가, 하오문의 장안 총타로 날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