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아슬아슬했어
하무백의 모습을 확인한 공손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무백이 팽가주와 일전을 치렀다는 정보에 언젠가는 그가 팽군호를 찾게 될 거라 예상을 했다.
그가 혈교를 얼마나 증오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
팽가주, 팽무량의 흔적을 거슬러 오다 보면, 팽군호에게 당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너무 빠르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적어도 문주와 자신의 예상으로는 팽군호가 십 성을 이뤄 자신들의 손에 죽은 이후였으니까.
‘지부의 인원들은…….’
하무백의 살벌한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지부에 남은 이들이 떠올랐다.
그중 하나는 이공녀이지 않던가.
살기 가득한 그의 눈빛은 버티는 것만도 버거웠다. 저 눈빛을 보고 있자니, 그들은 아마도…….
저놈이 어떠한지는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적으로 만나니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괴물이었다.
적어도 지난 전쟁에서는 사소한 갈등이 있었을지언정, 같은 편이었으니 몰랐던 것.
하무백의 시선이 다시 한번 팽군호에게로 향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때문이다.
“제법…….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 정도라니. 너……. 정말 쓰레기구나.”
하무백의 말에 팽군호는 두 눈을 부릅떴으나, 그게 전부였다.
그에게 각인된 공포가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에 팽군호 본인도 놀라고 있었다.
신공을 대성해 저 망할 놈을 씹어 먹겠다고 다짐하기를 얼마던가.
그런데 정작 마주치니 고양이 앞의 생쥐 꼴이라니.
비참하고도 비참했다.
하무백의 시선이 다시 공손경에게로 향했다.
“대답이 없는데?”
“…….”
공손경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체 너희 문주는 무슨 생각인 거지? 대호법까지 나서서 이런 곳을 만들고 저놈을 보호하고 있다니?”
하무백의 시선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보호?”
그때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팽군호의 모습이 하무백의 눈에 잡혔다.
저건 보호 받고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응? 설마……. 실험 중이었나?”
하무백이 머릿속에 떠오른 내용을 그대로 뱉었다.
흠칫하는 공손경.
무의식 중에 흘린 말에 그가 반응하자, 하무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말 제대로 작정을 한 모양이군.”
하무백의 얼굴이 악귀의 얼굴로 변했다. 그가 진정으로 분노한 모습이다.
“이런 곳을 잘도 만들어 두고 있었구만. 하 교관 자네는 어찌 이곳을 찾았나?”
그때 목책을 넘어온 철담개가 하무백에게 능글맞은 얼굴로 다가가다가 멈춰 섰다.
그가 풍기는 기운을 느낀 것이다.
지난 전쟁에서 저런 모습을 간혹 보았다. 저런 상태의 하무백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
다가가던 철담개는 오히려 뒤로 걸음을 물렸다. 그리고 다른 세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했다.
“정말 다행이야. 빨리 발견해서. 이곳에 이틀 정도 머물렀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답을 기대한 물음은 아니었다.
하무백의 검이 움직였다.
“큭.”
감지한 순간 공손경을 전력으로 물러났다. 팽군호를 챙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기감에 민감한 공손경이었기에,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적어도 공손경은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미간에서부터 시작되는 혈선.
공손경도 그 간질거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빌어먹을 괴물 새끼…….”
그 감각을 느낀 순간,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기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그대로 갈라져 죽었다.
“으힉!!”
그 모습에 팽군호는 대경했다.
언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하무백은 그런 팽군호를 일별하고 동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상당한 시간을 들여 준비한 듯, 내부 역시 두 개의 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중 한 곳을 들어갔다. 제법 사람이 머무른 흔적이 있는 곳이다.
다른 한 곳은 이제 막 사람이 머무르기 시작한 듯 보였으니, 이곳이 공손경의 거처일 터다.
이런 곳을 그가 준비하려면, 상당한 시일을 이곳에서 머물렀을 테니.
그곳에 몇 권의 서책과 서류가 있었다.
서류는 막 작성을 마친 듯했다.
이틀 전에 사 성에 불과했던 팽군호의 경지가 오늘은 육 성에 올랐다는 것.
이것은 분석해볼 여지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실험 중이었어…….”
하무백이 낮게 중얼거렸다.
다른 것들을 전부 철저히 뒤졌다.
그렇게 발견한 서책 한 권.
멸공의 필사본이었다.
비록 필사한 정도가 겨우 1할에 불과하다지만.
“아슬아슬했어.”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이놈들이 이곳에서 비급을 모두 필사하고 팽군호를 이용해 멸공을 익히는 과정에 대한 실험까지 마쳤다면?
분명 멸공을 고쳐서 익히려 시도했을 것이다.
하오문에서 가능할 일이면, 그 저주받을 멸공이 멸공이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수없이 많은 마물을 양성하는 결과가 되었을 뿐.
하무백은 삼매진화를 일으켜 모든 서책과 서류를 불태웠다.
매캐한 연기가 동굴을 채울 때.
“아악!”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하무백이 바깥으로 다시 나오니. 팽군호가 복부에서 피를 흘리며 웅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
피 묻은 도를 든 팽도원이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장남을 내려다보며 살기 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아들의 단전을 후벼파 파괴했다.
멸공을 없애려면 단전을 파괴할 수밖에 없었으니.
“네 놈에 대한 처결은 본가에 돌아가서 가칙에 따를 것이다. 죽이든 살리든.”
팽도원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팽군호는 그저 단전이 파괴된 고통과 충격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하무백은 무심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익힌 경지도 고작 육 성이고 딱히 무언가 벌인 일도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팽가의 무사를 죽인 것.
결국 팽가 내부의 일 아닌가. 앞으로 가주가 될 팽도원의 의견을 존중해야 했다.
다만, 하무백이 확인해야 할 것은 있었다.
“비급은 어디 있지?”
그 물음에 팽군호는 단전을 움켜쥐고 있던 양손으로 가슴을 감싸 쥐었다.
품에서 한 시도 빼놓지 않은 신공의 비급이 거기에 있었기에.
퍽.
가볍게 휘두른 주먹에 팽군호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그 모습에도 팽도원이나 팽도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무백은 여전히 짙은 살기를 줄기줄기 흘리고 있었다.
하무백은 팽군호의 품에서 혼원류하의 비급을 꺼냈다.
오랜 세월 묻은 손때가 있는 것이, 팽무량이 애지중지하던 그 비급이 맞았다.
내용까지 확인한 하무백의 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혼원류하의 비급은 사라졌다.
“후우. 제법 피곤했어.”
짧게 중얼거린 하무백이 걸음을 움직였다.
그 방향은 무창.
이제 교룡관으로 돌아갈 때였다.
이런 일을 벌인 하오문 총타로 찾아갈까도 했지만, 비급까지 모두 불태운 지금 딱히 그럴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손에 하오문주의 딸과 하오문의 호법 다섯이 목숨을 잃기도 했고.
철담개가 같이 있었으니, 나머지 일은 개방과 정천맹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그것이 하무백의 결론이었다.
당장 하무백을 쫓아가 자초지종을 묻고 싶은 철담개도 차마 그 뒤를 쫓지 못했다.
여전히 짙은 살기가 하무백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거, 사람하고는. 좀 부드럽게 지내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나……. 에효. 앞으로 거처를 옮겨야 겠구만. 늙은이 잠자리 바뀌면 잠 설치는데…….”
교룡관이 있는 무창에서 지내야겠다 마음먹은 철담개가 그리 중얼거렸다.
하무백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거리가 제법 떨어졌지만, 그라면 능히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
“이, 이게 대체…….”
예초아는 자신의 손에 들린 보고서를 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내용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혜, 혜아가……?”
딸의 죽음이 쓰여진 보고서다.
다른 호법 셋의 죽음도 함께 쓰여 있었다.
하무백의 손에서 살아남은 이 호법이 긴급히 보낸 급전이었다.
“아아……. 내 잘못이다……. 그 괴물에 대해서는 좀 더 주의를 단단히 줬어야 했는데…….”
예초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문의 숙원을 위해, 영소혜는 끝내 팽군호의 소재를 숨겼고 하무백의 검에 명을 달리했다.
그 소재를 알려줘도 됐을 일이다.
팽군호를 이용한 실험이 중요하기는 했지만, 딸의 목숨만큼은 아니었으니.
이미 필사본을 손에 넣었으니, 여의치 않으면 다른 이를 이용해 실험을 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헌데, 고작 팽군호 따위 때문에 목숨을 잃다니.
결국 이호법이 그 소재를 알려주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찾겠다는 하무백의 말에 그랬을 것이다.
그놈은 정말 그리할 놈이니.
“하무백……. 내 반드시 네 놈을 찢어 죽일 것이다.”
그녀의 눈물은 어느새 피눈물로 바뀌어 있었다.
가슴 깊은 곳의 분노가 스민 음성을 잘게 떨렸다.
“누구 없느냐?”
예초아의 부름에 그의 수하가 나타났다.
“혜아가 당했다. 그리고 이호법이 소오태산을 알려줬다 하니……. 대호법도 위험할 터, 급히 전서응을 보내고 사람도 보내라.”
이호법도 공손경이 있는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그 위치를 아는 이는 오죽 문주 예초아 자신뿐이다.
그랬기에 예초아가 수하에게 그 위치를 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애써 말하는 그녀는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기에 전서응 만이 아니라 사람도 보내는 것이다.
정확히 그곳을 확인하기 위해.
딸의 죽음이 한 가지는 확실히 지켰다.
혼원류하, 아니 혼돈혈하멸공의 필사본.
하무백은 그 필사본이 완성되어 하오문 총타에 있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소혜를 비롯한 호법들이 팽군호의 소재를 필사적으로 숨기는 모습에, 벌써 필사본을 완성했으리라는 것까지 생각지 못했으리라.
***
“하오문이 그런 미친 짓을 벌였을 줄이야…….”
소휘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찌하시겠소, 맹주?”
개방 방주 청죽신개(靑竹神丐).
그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부방주 철담개에게서 긴급한 전서를 받고는 그 길로 곧장 맹주를 찾은 참이다.
맹에서는 아직 팽가주의 멸공에 대한 결론도 나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하오문의 일까지 터지다니.
더군다나 하오문은 사파다.
사해련의 관리하에 있는 문파.
하오문을 문제 삼으려면 결국 사해련을 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하무백이 사고를 쳐놓은 상태다.
“그가 하오문주의 딸을 비롯해서 호법 넷을 죽였소이다. 아무리 멸공이 연관된 일이라지만…….”
이 역시 문제였다.
아무리 무림공적인 혈교의 멸공이라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추궁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물론 대호법이 팽군호를 숨기고 멸공에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해서 맹주를 먼저 찾은 거외다. 다른 늙은이들이 이 사실을 알면 거품 물고 달려들 테니.”
다른 구파의 장문인들은 하무백이 하오문으로 멸공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는 것보다, 그의 행보를 문제 삼을 것이다.
뻔히 보이는 일이다. 그를 어떻게든 찍어내려 하니.
개방은 구파일방 중 유일하게 하무백에게 호의적인 문파였다.
백도회의 구성원 중 유일하게 맹주와 척을 지지 않은 문파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함께했기에 백도회에 속해 있기는 하나 개방은 그 성향이 이권보다는 협을 중시했다.
특히나 현 개방 방주 청죽신개의 성향이 그러했다.
거기에 더해 지난 전쟁에서 하무백의 활약을 그 어느 문파보다 정확히 아는 곳이 개방이었다.
그랬기에 청죽신개는 한 명의 무인으로서 하무백을 존경하기까지 했다.
그가 전쟁에서 어떠했는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래서 이번 일도 이해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이다.
그로 인해 정천맹과 사해련의 입장이 미묘해질 수 있었다.
정천맹 내의 알력 역시 문제였고.
“방주께서 생각하시기에 하오문에서 어찌 나올 것 같습니까?”
“덮으려 하겠지요.”
소휘웅의 물음에 청죽신개의 대답이 곧장 나왔다.
소휘웅의 생각도 그랬다.
당장, 지금 팽가가 각대문파에게서 받고 있는 지탄을 보더라도.
사파라고 해서 멸공에 피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더 컸다.
그들은 더욱 환장해서 혼원류하를 찾아 익혔었으니.
그러니 하오문 역시 이 일이 알려진다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덮도록 하지요. 저쪽에서 덮는다면.”
소휘웅의 결정에 청죽신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을 했기에.
“그럼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청죽신개는 조용히 물러났고, 그가 가지고 온 서신은 소휘웅의 손에서 불에 타 스러졌다.